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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삶

8년만의 낙태 실태조사, 시작도 못한 이유는

낙태 수술 찬반 진영, 설문지 문항 싸고 이견 팽팽
복지부가 지난달부터 시행하기로 한 계획 어긋나

인공임신중절(낙태) 수술을 둔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정부가 당초 지난달부터 시행하기로 했던 실태조사는 아직 시작도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는 올해초부터 ‘전국 인공임신중절 변동 실태조사’를 추진해왔으며 연구기관을 선정하고 설문지를 만들어 지난달부터 임신 가능 연령대의 여성들을 상대로 수술 실태를 조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30일 보건복지부 관계자에 따르면,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심리를 두고 논쟁이 가열되면서 8월이 다 지나도록 조사를 시작하지 못했다. 조사가 늦어진 가장 큰 이유는 설문지의 문항을 놓고 낙태 수술 찬반 측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실태 조사에서는 낙태 수술 건수와 수술 받은 이유 등을 조사하는 것과 함께 낙태에 대한 의견도 묻는다. 이 중 ‘태아의 질환이 심할 때 이뤄지는 낙태 수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같은 질문에 대해 낙태 수술에 반대하는 단체가 “편향된 응답을 이끌어낼 것”이라며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 관계자는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설문지 작업이 이제 막바지에 들어간 상태”라고 말했다. 정부는 오는 10월 조사결과를 공개할 계획이었지만 조사가 늦어지는 바람에 발표도 미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낙태죄를 폐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뜨겁지만, 사회적 토론을 위한 기본적인 데이터조차 확보돼 있지 않은 상태다. 복지부는 2005년과 2010년 조사에서 연간 국내 낙태 수술 건수를 각각 34만2000건, 16만8000건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100만건 이상으로 추정해 큰 격차를 보였다. 정부는 예산부족을 이유로 그나마 2010년 이후로는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복지부는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이번에는 조사 대상을 이전의 4000명에서 1만명으로 늘리기로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낙태는 여성들이 쉽게 드러내기 힘든 문제라 표본이 더 많아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낙태실태 조사 결과는 헌재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관계자는 “(헌재 심리 전까지 결과가 나온다면)각각의 쟁점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이 어떻게 나왔는지 객관적으로 전달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복지부는 헌재가 낙태죄 위헌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낙태시술을 한 의사의 자격을 정지하는 행정규칙 시행을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지난 28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헌재에서 위헌법률 심사를 하고 있어 행정처분규칙을 강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들의 반발은 그치지 않고 있다.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우리가 문제삼는 건 행정처분이 아니라 정부가 모자보건법에서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낙태 수술 전면 거부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