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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포항지진과 우리의 맨얼굴④] 하늘에 맡긴 재난 대비

“지금 또 흔들리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피신해야 됩니까.” 

2005년 봄, 119에 시민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당시 일본 후쿠오카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의 진동은 전국에서 감지됐고, 특히 부산에서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흔들림이 계속됐다. 1978년 충남 홍성 지진 이래 진동 범위가 가장 넓은 사례였다. 정부의 대처는 엉망이었고, 방송사들은 30분~1시간이 지나서야 자막을 내보냈다. 정부는 행동수칙조차 제대로 안내하지 못했다. 이 일을 계기로 정부는 지진재해대책법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12년, 한국의 지진대책은 얼마나 진보했을까. 지난 15일 규모 5.4의 포항 지진 때 기상청의 긴급재난문자 발송은 매우 빨랐다. 옛 소방방재청의 업무를 흡수한 행정안전부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꾸려 매일 브리핑을 했다. 그러나 변화는 지표면 위에서만 일어났을 뿐이다. 땅 밑 활성단층 정보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지진이 났을 때만 법석을 떨 뿐 여론이 잠잠해지면 장기적 대책은 뒷전으로 밀려난 탓이다.


조원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진 대응이 잘돼 있는 나라들에서는 병원이나 학교 같은 공공시설은 절대 활성단층 위에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활성단층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전국은 물론, 원전이 대거 몰려 있는 지역의 활성단층 지도도 없다. 1차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 2008년 공포된 지진재해대책법 23조에 ‘활성단층 조사·연구 및 활성단층 지도 작성’에 관한 조항이 있다. 정부에 활성단층을 조사·연구할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단층 지도를 만들어 공개할 수 있게 했다. 이 지도에 따라 이전에 지어진 시설물들에 대해서도 보완·보강을 권고할 수 있도록 했다.

옛 소방방재청은 법에 따라 2009년 ‘활성단층 지도 제작’ 연구용역을 발주했으나, 예산을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다. 한 지질학자는 “양산단층 한 곳만 조사하기에도 모자란 돈을 주고 3년 안에 전국의 활성단층 지도를 그리라고 하니, 결과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12년 제작된 활성단층 지도는 석연찮은 이유로 ‘비공개’ 결정이 내려졌다. 지도 작성 계획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국민안전처는 뒤늦게 지질학자들을 동원해 태스크포스를 꾸려 ‘어떻게 지도를 만들지’ 연구했다. 이 논의는 2014년 거의 끝났지만 당국은 별 반응이 없었다. 국민안전처가 지도를 만들 예산을 배정한 것은 경주 지진이 발생한 뒤였고, 작업은 올해에야 시작됐다. 

이 기나긴 과정은 한국이 재난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원로 지질학자인 이기화 서울대 명예교수가 “양산단층이 활성단층일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은 1983년이다. 정부는 20여년 뒤 지진 대응 부실에 대한 비판을 받고서야 ‘땅속 위험’을 미리 확인해 대비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그러고도 10년을 허송세월하다 경주 지진이 닥친 후에야 본격적으로 활성단층 지도 제작에 나섰다. 빗물에 농사의 운을 맡기는 천수답처럼 재난 대비를 ‘하늘에 맡기는’ 식이었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땅값, 집값에 민감한 사회 분위기에도 압박감을 느낀다. 땅속 지하수가 지표면으로 솟구치는 ‘액상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국내에도 있지만 개별적으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가는 해당 지역 여론의 압박에 노출된다. 조원철 교수의 말을 빌리면 “지진 정보를 생명처럼 다뤄야 하는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지진이 아니고 건물이다.” 지진 연구자들이 ‘경구’처럼 외는 말이다.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 땅속 사정을 들여다보고, 그 부근 건축물의 안전성을 강화하고 정보를 공개해 시민들도 스스로 대비할 방법을 찾게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최재순 서경대 토목건축공학과 교수도 “퇴적층을 조금만 파내도 암반이 나오는 내륙지방과 달리 동해안 일대는 퇴적층이 두꺼워 액상화가 더 일어나기 쉽다”고 말했다. 이희권 강원대 지질학과 교수는 수도권 동북부의 왕숙천단층이 20만년 전까지 활동했던 젊은 단층임을 지난해 밝혀냈다. 학계에서는 신생대 4기(258만년~현재)에 들어와 활동한 단층은 다시 활동할 가능성이 높은 활성단층으로 분류한다.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늘에만 기대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포항의 단층들이 알려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