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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시험사회’ 문제를 풉시다②] 성적도 직업군도 이미 대물림…멸종한 '개천의 용'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신화를 꿈꾸던 시대에 자식의 ‘서울대 합격’ 혹은 ‘고시 패스’는 모든 부모들의 열망이었다. 서울대 합격자 게시판 앞에서 명단을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오래전의 일이 됐지만 수능 시대에도 시험을 통한 계층 상승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신화를 꿈꾸던 시대에 자식의 ‘서울대 합격’ 혹은 ‘고시 패스’는 모든 부모들의 열망이었다. 서울대 합격자 게시판 앞에서 명단을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오래전의 일이 됐지만 수능 시대에도 시험을 통한 계층 상승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막노동 6년 「首席(수석)」 공든 탑.’

1996년 1월31일 경향신문 사회면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공사판 노동으로 학원비를 벌면서 꿈을 키워온 스물다섯 젊은이가 서울대 인문계 수석을 차지했다. 합격 발표가 난 순간에도 그는 대구의 한 공사장에 있었다. 고교 졸업 6년 만에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간 장승수씨 이야기는 같은 해 여름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으로 나왔다. 포클레인 조수, LPG 가스통 배달부, 신문배달부, 택시기사 등을 거쳐 서울대생이 된 사연은 ‘개룡(개천에서 난 용) 신드롬’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장씨는 2003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

장씨는 2013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장승수에서 끝났다고 한다”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서울대에 가는 것 말고 새로운 꿈을 꿀 기회는 많아졌어요. 학벌이란 고정관념을 버리면 꿈과 열정, 성실로 성공한 ‘개룡’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새로운 꿈보다 ‘명문대’와 ‘사자 직업’을 좇는다.

고속성장 시대의 산물, 시험 만능주의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경제부흥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던 때 사회 곳곳에서 크고 작은 ‘용’들이 탄생했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자식들을 학교로 보냈다. ‘성공’은 소위 명문 학교를 나와서 사회적 명예와 부를 쌓는 것을 의미했다. 1980년대 학력고사 점수가 발표 난 다음날 신문에는 항상 전국 수석을 차지한 수험생 기사가 실렸다. 수석이 ‘개룡’이면 기사는 더 커졌다.

그렇지만 시험의 최고봉은 역시 ‘고시’다. 합격만 하면 국가 심장부로 곧장 뛰어들 수 있는 기회와 권력, 명예가 주어졌다. 이 때문에 고시는 가난하지만 야망이 큰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계층상승 사다리였다. 고등고시에서 사법시험으로 명칭이 바뀐지 오래됐지만 그후로도 줄곧 이 시험은 '사법고시'라 불린다. 사법시험이 고시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합격하면 단번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계층에 합류할 수 있었다.

시험으로 탄탄대로를 걷는 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개천용 신화’를 믿게 됐다. 오로지 실력으로 사람을 측정한다는 시험의 논리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시험국민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교육학자 이경숙씨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시험이 ‘공정성’이라는 긍정적 명분을 획득하게 됐다고 봤다. 이씨는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는 선언은 개방과 평등을 상징한다. 신분, 성별, 학력, 사회경제적 처지 등 수많은 외피에 매여 사는 인간에게 실력 하나만 남겨두고 모든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무한한 자유를 준다”고 했다.


시험이 공정하다는 믿음은 곧 시험을 잘 본 이들과 못 본 이들 사이의 서열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출세만 하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특권과 차별이 생겼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강자의 논리는 시험사회라는 동전의 또 다른 한 면이었다. 서열에서 앞서지 못한 이들은 ‘자식만은 성공시켜 인간답게 살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국대 교육학과 조상식 교수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역사적으로 각종 시험 시스템이 마련된 건 능력주의 사회에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개인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만든 게 시험이고 고시다. 문제는 급속도로 근대화를 겪으면서 시험이 계층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돼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은 ‘수저계급론’ 

시험으로 고속성장에 필요한 국가 엘리트들을 양산하는 패러다임은 ‘창의력’이 더 중요한 요인이 된 지금은 맞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시험 만능주의에 일말의 정당성을 안겨주던 계층이동 사다리로서의 기능도 이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계층이 상승할 가능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통계청이 실시한 2017 사회조사에서 자식 세대가 열심히 노력하면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할 수 있다고 답한 이는 10명 중 3명에 불과했다. 2009년 조사 당시만 해도 절반가량이 “상승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계층이동 사다리가 빠르게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본인 세대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할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도 65.0%가 ‘낮다’고 답했다.

지난해 1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 실태진단 및 대응방안’ 보고서에선 190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세대보다 후반에 태어난 세대가 부모의 학력과 직업, 사회적 계층을 대물림하는 경향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가 15세 무렵 느낀 자신의 주관적 계층과 현재 주관적 계층을 분석한 결과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정보화 세대라 불리는 1975~1995년생들에게서 아버지가 중상층 이상일 때 자식도 중상층 이상일 확률은 아버지가 하층일 때 자식이 중상층 이상이 될 확률보다 훨씬 높았다. 지난 7월 한국노동연구원의 ‘직업계층 이동성과 기회불균등 분석’ 보고서 역시 자식이 부모 직업군까지 대물림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험을 통한 출세의 꿈은 과거의 일이고, 부모가 ‘흙수저’면 자식도 흙수저라는 ‘수저계급론’이 지금 한국사회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김영식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장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보면 가정형편에 따라 학습 태도나 습관, 자기를 위한 노력이나 의지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갈수록 빈부차가 커지고 계층 이동성이 낮아지니 학생의 계층상승 욕구가 떨어진다. 과거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한 학생들이 많았다면 지금 아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체념한다”고 말했다.

[‘시험사회’ 문제를 풉시다](중)성적도 직업군도 이미 대물림…‘시험 통한 출세’는 허상일 뿐


전국 25개 로스쿨 재학생 중 67.8%가 월소득 804만원 이상인 고소득층 가구에 속한다. 시험제도는 사시에서 로스쿨로 바뀌었지만, 정작 사법시험 합격자와 로스쿨 합격자의 출신 대학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학업에 드는 비용도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지역 특목고 학생 4명 중 1명이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 아이들이고, 영재학교 입학생 열에 일곱은 수도권 출신이다. 서울대 입학생 가운데 특목고·자사고 출신과 고소득층 자녀 비율이 높다는 뉴스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신뢰 없는 사회가 만든 비극

고시는 사라지고 있다. 2013년 외무고시가 사라졌고 사법시험은 올해 마지막 합격자 55명을 남기고 70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행정고시도 종종 ‘폐지’ 도마에 오른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관피아’ 논란이 일자 박근혜 대통령은 민관유착 고리를 끊기 위해 행정고시를 대폭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고시가 있어야 개천에서 용이 나올 기회가 있고 최소한 특혜는 막을 수 있다는 반발에 부딪혔다. 학생부종합전형 같은 수시 비중을 줄이고 대입 전형에서 다시 수능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맥을 같이한다.

시험사회는 급성장 시대의 경험, 고착화된 계층, 사회 불신이 맺은 결과다. 시험사회가 만들어낸 ‘개룡 신화’는 수저계급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흙수저들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 역설적으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김영식 위원장은 “사회의 주류인 40·50대들은 시험을 통해 대학에 갔고 지금의 자기 위치를 만들었다. 여기에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에 대한 불신이 겹치면서 시험이 갖는 힘은 더 커졌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기업과 대학들이 정량화된 시험으로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 때문에 선발 방법을 질적인 평가로 바꿨다. 하지만 한국사회에는 정실, 인맥, 학맥 등 ‘게임의 룰’을 지키지 않는 후진적 잔재들이 많다. 그래서 양적인 평가가 공적 객관성을 더 확보하는 거 아니냐는 대중의 생각이 다시 싹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교육정책으로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사회적으로 접근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이 우선돼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