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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시험사회' 문제를 풉시다③] 사회 자원 빨아들이는 블랙홀···'평생스펙' 틀을 깨자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에 소속된 초등학교 스포츠강사들이 지난 7월 12일 서울 창성동 국가일자리위원회 앞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처우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에 소속된 초등학교 스포츠강사들이 지난 7월 12일 서울 창성동 국가일자리위원회 앞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처우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학교는 12월에 가장 바쁘다. 교사들이 시험 결과를 정리하고, 생활기록부를 쓰고 성적을 처리해 통지를 해야 한다. 학년을 마무리하며 아이들과 헤어질 준비를 하고, 하루하루 업무폭탄에 시달리는 시기다.

다음 해에 ‘무사할까’를 걱정하며 두려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이들도 있다. 기간제 교사들은 업무 틈틈이 계속 일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계약이 연장될지 눈치를 살피고, 교육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신규채용 공고를가 떴는지 확인하고, 야근 후 빠듯한 시간을 쪼개 여러 학교에 원서를 넣는다. 운이 좋으면 쉬지 않고 근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단기계약을 전전하다가 몇 달에서 몇 년까지 일을 쉬어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 기간제 교사들이 학기마다 겪는 일이다.

이들이 다른 교사들과 다른 것은 임용시험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험에 합격하지 않았으니 아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들에게 교단을 맡겨서는 안된다. 일정한 능력과 역할이 있다고 판단해 아이들을 만날 기회를 줬다면 이들 역시 교사임을 인정해줘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렇지 않다. 불안정한 처지에 시달리는 이들의 노동 덕분에 정규직들이 쉴 수 있고 교대를 할 수 있고 업무를 줄일 수 있는데도, 밥그릇이 걸려 있다 생각되면 무자격자라 낙인찍는다.

시간은 ‘합격자’들에게만 쌓인다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면 능력이 쌓이고 승진도 되고 월급도 늘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합격자’라는 스펙을 가진 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임용시험에 합격한 정규직 교사와 기간제로 경력을 시작한 사람의 격차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좁혀지지 않는다. 경력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교사로서 아이들을 얼마나 잘 가르치고 존경을 받았는지, 근무평가가 좋았는지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흔히 ‘좋은 교사의 자질’이라 불리는 요소들이 기간제 교사를 평가할 때에는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학교 현장에선 수없이 많은 비정규직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런데도 임용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교사 대접을 받을 권리를 주는 것에 대한 사회적 지지는 강고하다. 박혜성 전국기간제교사연합회 대표는 “임용시험이 왜 교사가 되는 단 하나의 절대적 기준인지, 이 시험으로 교사의 전문성이나 자질이 갈음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기간제 교사 문제는 시험을 통과했는지가 고용 안정과 일자리의 질, 사회적 지위를 모두 결정짓는 현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한국 사회는 시험을 뚫고 합격한 이들에게 ‘평생 동안의 특권’을 보장하는 구조로 짜였다. 대학 입시는 첫 단계일 뿐이다. 소위 명문대생과 비명문대생의 격차는 그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격차로 이어진다. 시간이 지난다고 좁혀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커진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 수준은 2000년대 중반까지 정규직의 60%대였으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50%대로 내려앉았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이들은 1997년에 대기업 직원들이 받는 돈의 77.3%를 받았으나 갈수록 낮아져 지금은 60%대 초반에 그친다.

명문대를 나와 고시에 패스한 ‘시험의 승자’가 한순간에 인생역전의 특권을 거머쥐는 ‘개천용 신화’는 약해졌지만 시험으로 안정된 궤도에 진입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격차는 여전하다.

‘개천용’의 파이조차 줄어든 한국

신화가 약해진 측면이 있다면, 개천용들이 성취할 수 있는 파이의 크기조차 작아졌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사람들이 시험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과거에는 엄청난 특권이었지만 지금은 ‘안정된 일자리’다. 살 만한 임금을 주는 정규직 일자리가 줄어든 상황에서 이 파이를 가져가려는 ‘수험생’들의 경쟁은 오히려 더 치열해졌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학 숫자가 늘어나고 고학력 정규직 일자리를 원하는 이들이 늘었지만 기업들의 채용 인원은 오히려 줄었다”면서 “경쟁에 대한 젊은이들의 인식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서울시내의 대학을 나오면 그리 치열한 경쟁 없이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속성장한 제조업 일자리도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차지할 수 있는 일자리는 박봉의 비정규직뿐이다. 고교 입시와 대학 입시부터 정규직 취업시장을 뚫기 위한 공채시험, 안정된 삶과 연금을 가져다주는 공무원시험, 각종 고시에서 승자가 돼야만 선망하는 일자리에 진입할 수 있다.

직장을 잃거나, 살 집이 없거나,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망은 취약하다. 시험에 합격하는 것만이 삶의 질을 보장해준다는 수많은 취업지망생들의 인식에는 깊은 뿌리가 있는 것이다. 양 교수는 “학교는 뭔가를 배우는 곳이지만 학습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지 못하며, 모두가 시험 합격자와 낙오자로 갈려 낙오자들은 ‘평범하게 살 기회’를 잃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 수혜자는 ‘시험시장’이다. 1990년대 초반 과외금지령이 풀리면서 성장한 사교육 시장은 한 해 규모가 18조원에 달한다. 웬만한 광역자치단체의 1년 예산보다도 많은 돈을 사교육비로 쓰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한파가 덮치고 취업난이 심해진 후에는 공무원 응시생들과 취업준비생들을 위한 사교육이 폭증했다. 대입 수험생보다 더 절박한 취업준비생들은 입사시험을 뚫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시험과 관련된 돈의 흐름은 학원가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내년부터 정부가 자율형사립고와 외국어고의 학생 ‘우선선발권’을 없애기로 하자 이른바 ‘명문고’가 몰려 있는 서울 강남과 목동 아파트값이 한 달 새 수천만원씩 뛰었다. 시험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온 집안의 일’이다. 한 사람이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도 갈수록 는다. 4년제 대학생들의 평균 재학 기간이 5년을 넘어선 지 오래다. 취업준비에만 1년이 넘게 걸리는 탓이다. 결혼도, 출산도 미루거나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취업준비 기간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사회적 자원 빨아들이는 ‘시험 블랙홀’

소중한 시간과 자원이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일에 보태지기보다는 시험준비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면서 사회 전체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이한 시민교육센터 소장은 올해 출간한 저서 <중간착취자의 나라>에서 ‘시험 쳐서 들어온 정규직과 시험을 치지 않은 비정규직에게 같은 대우를 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시험 성적이 업무 자체에 별다른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 시험을 잘 쳤다는 것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올해 임용된 초등교사 박모씨(27)는 “임용시험을 잘 본 편이지만 의미를 잘 모르겠다. 교육과정을 그대로 외우기를 요구하는 이 시험제도가 교사의 자질과 무슨 관계가 있나 싶어, 공부하면서도 허무할 때가 더 많았다”고 말했다. 수능제도를 만든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인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조차 “학생들이 몇 년 만에 잊어버릴 만한 것을 왜 공부하도록 해야 하는가”라며 수능제도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시험사회' 문제를 풉시다](하)사회 자원 빨아들이는 블랙홀···'평생스펙' 틀을 깨자


최근 서울시내 한 사립 명문대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학벌주의가 심해지면 좋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진학할 때 힘들었던 만큼 명문대 출신이 대접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번의 시험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구조에서 개개인은 시험에 너무 많은 자원을 쏟아붓지만 그것은 시험 통과에만 필요한 것일 뿐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는 보탬이 되지 않는다. 또한 그 한 번의 시험을 통해 막대한 보상을 확보하게 된 이들, 그리고 그 장벽을 넘을 가능성이 없어진 이들 모두에게 더 이상 스스로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일 동기가 사라진다. 개인들의 시험 경쟁력은 엄청난데, 사회 전체의 생산적인 경쟁력은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박권일 칼럼니스트는 “한국은 원래 ‘소용돌이 사회’라고 부를 만큼 모든 자원이 중심부로 빨려들어가 중심과 주변의 격차가 큰 사회였다”며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제도와 그에 따른 물질주의와 입신출세주의가 워낙 강했고, 사회가 변동하는 과정에서도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험 블랙홀’의 사회에서 벗어나려면 취업시장을 유연화할 필요가 있다. 시험만이 직업·직장을 갖는 유일한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에서 경험과 능력을 쌓고 진출입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한다. 시험 합격을 곧 능력으로 보는 잘못된 능력주의도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