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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교육에 ‘노동’은 없다]①“알바의 권리, 학교에선 왜 가르쳐주지 않죠?”


“비싸진 임금으로 노동의 수요량이 감소하고 새로이 노동을 공급하려는 구직자도 늘어나 노동 시장에서 초과 공급, 즉 실업이 발생할 수도 있다.”(비상교육)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시행된 정부의 최저임금제가 오히려 일자리만 감소시키는 경우는 정부실패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교학사)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에서 최저임금제도와 관련된 내용을 찾으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비상교육 교과서에선 최저가격제를 설명하면서 이에 대한 부작용의 사례로 최저임금을 거론했다. 교학사 교재에서는 ‘정부실패’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등장했다. ‘경제’는 고등학교 과목 가운데 ‘사회’, ‘법과 정치’와 아울러 ‘노동’을 가장 많이 다루는 교과목이다.

2016년 한 조사에서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1위로 ‘공무원’(22.6%)이, 2위로는 ‘건물주와 임대업자’(16.1%)가 꼽혔다. 안정적이고 높은 소득이 보장된다는 이유에서였다. 1980년대 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생기던 시절, 교사가 ‘노동자’인가가 사회적 이슈가 됐다. 노동자는 곧 육체노동을 하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왜곡돼 있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경제’, ‘사회’, ‘진로와 직업’ 교과서의 ‘노동’과 ‘근로’ 관련 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권도현 기자


그 후 30년 가까이 흐르면서 인식은 많이 바뀌었고, 누구든 일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노동자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노골적인 ‘직업의 귀천’이 차지하던 곳에, 이제는 노동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불로소득자들의 논리가 파고들었다. 힘들여 일해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은 흙수저, 루저, 낙오자로 취급받는다.

[노동이 부끄러워요?](1) “노동 생각하면 노예 떠올라…내 꿈은 노동자가 아니에요”  
“청소년 10명 중 9명 가까이 노동자라는 단어에 거부감”

그 밑바탕에는 노동을 경시하고 일하는 사람의 가치와 권리를 도외시하는 교육이 있다. 10대 청소년들 상당수가 이미 아르바이트 노동을 하고 있다. 지금의 아이들은 저성장 속에 양극화로 질이 떨어진 일자리에 진입해야 할 냉혹한 현실에 맞닥뜨린다. 하지만 교과서에는 장밋빛 직업전망과 성공한 직업인들이 나올 뿐, 일하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않는다. 열악한 노동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거나 사고를 당하는 특성화고 학생들 사건이 불거지면 정부가 긴급대책을 내놓지만, 그 아이들도 교사들도 고용주들도 노동문제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고 배운 적은 없다.

노동법을 누가 아나요 

“글쎄요. 동료들 아무도 모를 걸요?” 오성한씨(32·가명)에게 법이 정해 놓은 주당 최대 노동시간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기업 5년차 사원인 오씨의 직장에서는 포괄임금제가 시행되고 있다. 야근을 해도, 주말근무를 해도 수당은 나오지 않는다.

“노동하는 사람들 권리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그냥 취업하고, 연봉계약서에 사인하고, 그러다 보니 다들 회사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데만 익숙한 것 같아요.”

전혜연씨(25·가명)는 지난해 첫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겪고 생전 처음 포털사이트에서 근로기준법을 찾아봤다. 입사한 곳은 정부에서 ‘청년친화강소기업’으로 선정한 곳이었다. 인사 담당자는 출근 첫날 도장을 가지고 오라더니 근로계약서를 보여주지도 않고 멋대로 도장을 찍었다. 면접 때 약속한 300% 상여금은 1년차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왜 얘기가 달라졌느냐”고 묻자 인사 담당자는 “어디서 들어오자마자 돈 얘기부터 하냐. 이 얘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하면 너는 회사 생활을 못한다”고 윽박질렀다. “근로계약서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어요. 사회에 나오기 전까진 이런 걸 왜 몰라야 하죠?”

신성호 전국사회교사모임 연구위원은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공통 과정인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실업 문제를 포함해 노동 관련 교육은 중학교에서 2시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고등학교 사회교과에는 노동 관련 문제가 포함돼 있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을 파악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근로자에게 필요한 권리를 찾아본다’는 교육목표도 설정돼 있다.

미래엔 고교 ‘사회’ 교과서에는 ‘청소년 취업, 제대로 알고 합시다’라는 내용으로 삽화와 함께 근로조건을 가르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청소년도 성인과 같은 최저임금이 적용된다는 것, 일하기 전에 근로계약서부터 써야 한다는 것, 청소년 유해업소에서 일하는 것은 위법행위라는 것, 일하다 다치면 산업재해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노동이 부끄러워요?](2) 노동교육, 초·중·고 수업 1만시간 중 고작 5시간뿐 
[노동이 부끄러워요?](3) 노조 자료로 학교서 ‘노동권’ 수업…영국 “시민권 발전 위해 필요” 

지학사 교과서는 ‘최저임금제의 과거와 오늘’을 그래픽과 함께 설명하고, ‘최저임금 미만율을 참고로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해보자’는 논술과제를 제시했다. 교학사 ‘경제’ 교과서에는 ‘노동자의 권리와 책임’ 항목 옆에 한 페이지에 걸쳐 노동3권과 노동자의 권리를 담은 헌법 조항과 관련 법률들을 실었다.

2015년 온라인 구직 사이트 ‘알바몬’은 걸그룹 멤버 혜리를 모델로 “법으로 정한 대한민국 최저시급은 5580원”이라는 광고를 내보내 큰 호응을 얻었다. 알바몬 광고 화면 갈무리

2015년 온라인 구직 사이트 ‘알바몬’은 걸그룹 멤버 혜리를 모델로 “법으로 정한 대한민국 최저시급은 5580원”이라는 광고를 내보내 큰 호응을 얻었다. 알바몬 광고 화면 갈무리

하지만 교과서별 편차가 작지 않다. 최저임금제도와 전태일의 분신까지 담은 교과서도 있지만, 노동3권조차 소개하지 않은 책도 있다. 그 밖에 선택 교과목인 ‘법과 정치’ ‘사회문화’ 등 과목에 관련 내용이 조금씩 흩어져 있다. 이런 교과들을 고르지 않는 학생은 접할 수조차 없다. 모든 수업이 ‘입시 비중’으로 결정되는 현실에서, 수업 시수로는 전체 85시간 중 약 1.8시간 분량에 불과하며 200~300쪽짜리 교과서에서 많으면 4쪽 정도만 할애된다.

알바 인권은 혜리에게 배운다?

“500만 알바 여러분, 법으로 정한 대한민국 최저시급은 5580원입니다. 5580원. 이마저도 안 주면 히잉~.”

3년 전 온라인 구직 사이트 알바몬 광고에서 혜리가 이렇게 외쳤을 때 파급력은 컸다. 청소년 아르바이트생들은 주휴수당 계산법, 떼인 임금 받는 법 같은 것을 광고를 보고 알게 되고, 네이버 검색으로 배우고, 친구들끼리 물어 해결한다. 어느 것 하나 학교에선 알려주지 않는다.

“미래 사회는 변화와 더불어 인간 중심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중략) 따라서 사회 변화와 더불어 고임금, 고용 안정성, 발전 가능성이 큰 유망 직업을 예측하고, 직업 세계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동아출판사의 고등학교 ‘진로와 직업’ 교과서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각 장에는 영화감독 김기덕, 엔터테인먼트 사업가 양현석, 영화배우 앤젤리나 졸리, 체조선수 양학선 등의 사례가 소개됐다. 적성과 사회 변화를 고려해 직업을 고르도록 유도하고, 진학을 할지 취업을 할지 고르게 한 다음 직업윤리를 가르치는 게 이 교과 대부분 교과서의 흐름이다.

[세상읽기]노동인권교육의 중요성 
[정리뉴스]‘알바가 갑’ 혜리 감사패 받아···‘알바몬 사태’ 왜 일어났나 

실제로 일자리를 갖게 됐을 때 어떤 문제에 봉착하는지 고려한 부분은 전무하다. 몇몇 교과서는 방송분야 일자리를 유망 직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방송업계 종사자들이 겪는 부당한 처우와 노동현실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송재혁 전교조 대변인은 “노동이라는 용어를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교과 과정에선 ‘근로’라는 말을 쓴다. 노동기본권을 긍정적으로 가르치고 행사해야 할 권리임을 알려줘야 하는데 이런 것도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특히 박근혜 정부 시절의 개정 교육과정은 노동인권 교육을 축소시키면서 자본가 정신과 탁월한 기업가들을 추앙하게 만드는 교육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진로’만 있고 ‘노동’은 없다

대학입시에서 학생부종합전형(학종) 비중이 커진 뒤 학부모와 입시 준비생은 진로탐색, 진로체험에 사활을 건다. 영화나 책을 보고 감상문을 쓸 때나, 학교 동아리 활동을 기록할 때나, ‘학종’에선 모두 희망 진로와 연결을 지어야만 대입 스펙이 된다. 미래의 일자리를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 고등학교 3년간의 교육 체험활동을 꿰맞추다시피 한다. 하지만 거시경제와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을 가르치고 근로계약서의 견본을 교과서에 예시해놓고 직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교과서에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내용은 거의 없다.

고교 2학년생 ㄱ양은 중학교 시절 반 친구들과 단체로 서울대학교를 방문했다. 자유학기제에 따른 ‘진로체험활동’의 일환이었지만 유명 대학 캠퍼스를 구경해보고 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학교 측이 이런 ‘수업’을 집어넣는 것은 진로교육이 최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도덕교과를 가르치는 ㄴ교사는 “진로·직업교육 안에는 미래에 대한 철학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고 말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원작으로 만든 뮤지컬을 감상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뮤지컬 배우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토론하게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이 겪는 현실은 가르치지 않는다.

ㄴ교사는 “시민으로서의 권리, 노동 인권에 대한 얘기 없이 직업의 종류와 직업윤리만 가르치는 건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4차 산업혁명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질 것으로 예상된다면, 일자리 20개를 50개로 늘리자고 요구할 수 있는 아이들로 키워야 해요. 이런 교육 없이 개인들이 각자 직업교육을 받아야 직장을 제대로 가질 수 있다고만 주입해선 안됩니다.”

[아침을 열며]당신도, 아이도 노동자다 
“청소년들의 노동인권 선생님이 지켜주세요” 

교과서를 바꾸는 것과 별도로 교육현장에서 제대로 가르치게 하려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다. 서울시의회는 지난해 말 ‘노동인권교육 활성화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서울에선 올해부터 일부 학교에 ‘노동인권교육’이 의무화됐다. 서울시교육감은 매년 노동인권교육 시행계획을 세워야 한다. 직업교육을 하는 서울지역 고등학교는 학기당 2시간씩 연간 4시간의 노동인권 관련 교육을 해야 한다. 그동안 마이스터고나 특성화고들은 현장실습을 앞둔 학생들에게 노동법 교육을 했지만 노동인권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해 8월 일선 근로감독관들과 만나 “노동법 교육을 고등학교 과정에서 의무화하겠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노동의 가치와 권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을 교육의 근본에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청년유니온의 김민수 위원장은 “단순히 임금체불 대응법만 알고자 한다면 대중매체 속 혜리를 따라갈 수 없다. 학교에선 더욱 근본적인 내용을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 사회에서 과연 일이란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 노동법은 어떻게 형성돼 왔고 현대 사회에선 어떤 의미가 있으며 권리와 계약이란 무엇인지, 이런 내용을 알아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