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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가 살아야 환자도 살아요” 미국 간호사 노조 로이 홍이 본 ‘태움’ 악습

간호사들은 지금 일터가 지옥이라고 한다. 연일 드러나는 실태는 처참하다.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밥은 먹는 게 아니라 마셔야 하고, 몸이 아파도 심지어 임신을 해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교육을 빙자한 가혹행위를 간호사들은 공공연히 ‘태움’이라고 불러 왔다. 병원은 인력을 늘리지 않고, 대신 이런 반인권적 조직문화에 기대 부족분을 메꾼다. 평균 근속연수 5.4년 이직률 33.9%. 3~4년을 힘들게 공부해 자격증을 따고도 이 직종을 아예 떠난 간호사가 10만여명이나 된다. 

로이 홍 미국간호사노조 조직국장이 지난 2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최미랑 기자.


“병원이 기계에 투자하는 비용 일부만 사람에 투자했더라면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로이 홍 미국간호사노조(NNU) 조직국장(57)은 서울 아산병원의 한 간호사가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간호사는 병원 입사 후 상사의 폭언 등 가혹한 신입 교육 때문에 주변에 괴로움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기사 : 간호사 ‘죄인’ 만드는 ‘태움’ 문화, “생명 다룬다는 핑계로 이어진 악습 끊어야”

대형병원들은 환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신기술과 값비싼 첨단 설비를 자랑할 뿐 병상의 환자를 가장 까가이서 돌보는 전문인력의 처우와 인권은 뒷전이다. 국내 일부 병원은 간호사에게 환자를 데려오라고 영업까지 시킨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의료활동은 기계나 기술만으로 절대 할 수 없습니다. 특히 회복기 환자들은 돌보는 사람들이 조금만 신경써도 차도가 크게 달라진다고 해요. 간호 노동자를 전문인력으로 제대로 대우하지 않으면 환자는 낙후한 시스템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어요.”

홍 국장은 2001년부터 미국에서 간호사 노조를 조직하는 활동을 해왔다. 일을 마치고 눈물 흘리며 병원 문을 나서는 간호사를 붙잡고 무엇이 힘든지 묻고 노조를 만들자고 설득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병원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양상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비슷했다. “경영진은 사람 뿐만 아니라 비품 하나라도 줄이려고 합니다. 수술 후 회복중인 환자에게 미음을 떠먹여야 하는데 숟가락이 없어서 못 주는 사태가 정말 생깁니다. 얼마나 비참한가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뭉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그가 주장하는 이유다. 

‘간호사가 살아야 환자도 산다’···미국 간호사 노조가 보는 ‘태움’문화

의료인이 과로하면 의료사고는 터질 수 밖에 없다. 아파도 쉰다고 말 못하는 간호사들은 환자에게 불리한 작업을 지시받아도 거부하지 못한다. 홍 국장은 “현장 간호사들이 환자를 위해 당당하게 문제제기하고 보복을 받지 않는 수준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노동3권을 행사해 사측과 당당하게 맞서는 게 필수다. “병원은 경영진이 없어도 돌아가지만, 간호사가 없으면 하루도 돌아갈 수 없어요. 단결하면 힘이 생깁니다.” 일단 간호사의 임금과 노동시간부터 정상화하는 게 급선무다. “간호사도 최소한 자기 삶과 가정을 돌볼 수 있어야죠. 대한민국은 누가 봐도 그 정도의 부는 축적하고 있는 나라 아닙니까.”

홍 국장이 속한 미국간호사노조는 이와 관련해 법을 만들어낸 역사가 있다. 1990년대 미국에서 간호사들의 ‘탈출 러시’가 터졌을 때다. 기업논리가 병원으로 밀고 들어오자 대형 병원들은 컨설팅을 받아 효율화를 명분으로 대대적 감원에 나섰다. 잘린 간호사들은 인생의 위기를 맞았고 남은 사람들은 커진 노동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단순 협회 성격에 가깝던 캘리포니아간호사노조(CNA)는 이때부터 사측과 각을 세우고 투쟁에 들어갔다. 199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통과된 ‘간호사 대 환자 비율법’(Safe RN staffing ratio law)이 그 결실이다. 중증도에 따라 간호사 한 명이 1~6명의 환자만 돌보도록 했다.

2004년 법이 발효하자 변화는 컸다. 비용이 늘어났는데 병원이 오히려 더 잘 되는 경우도 나왔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은 적자가 나서 간호사를 줄이고, 간호사가 없어 병상이 비는 악순환에 허덕였다. 간호사들에겐 일이 힘들기로 악명이 높아 만성적 구인난에 시달렸다. 법 시행 이전 250여명의 간호사가 한 명당 평균 9~11명의 환자를 돌봤는데, 지금은 600여명이 한 명당 최대 다섯 명을 돌본다. “중요한 건 병원도 적자 경영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겁니다. 지금은 그 병원에서 일하겠다는 간호사들이 줄을 서 있어요.”

홍 국장은 처우를 개선하라는 국내 간호사들 목소리가 높은 지금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타이밍”이라고 강조했다. “숙련된 인력을 계속 잃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도 엄청난 낭비입니다. 병원에서부터 좋은 일자리의 모범사례를 만들면 심각한 청년실업에도 하나의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요.” 홍 국장은 “보수정권 10년동안 의료계를 둘러싼 논의는 오로지 민영화와 영리 추구에 집중됐다”며 “촛불정부는 ‘국민 건강을 책임진다’는 철학으로 의료 문제에 접근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또 “간호사 노조의 산별교섭과 인력 확충 관련 법 통과 등 주요 과제를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속한 노조는 미국에서도 ‘강성’으로 꼽힌다. 캘리포니아간호사노조는 ‘비율법’을 통과시켜 이름을 떨친 후 미국 전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2009년에는 이 노조를 중심으로 미국간호사노조가 출범했고, 지금은 조합원 수가 15만명을 넘는다. 버니 샌더스가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 미국간호사노조는 가장 먼저 지지 선언을 했었다. 

트럼프 정권은 대대적인 반노동 정책을 펴고 있다. 홍 국장은 “미국 정부는 지금 노동사건을 관할하는 연방노동관계위원회 운영위원 5명 가운데 3명을 친기업 인사로 앉히고, 노조 가입이 어렵도록 행정 절차 ‘개악’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이 나서서 촛불혁명을 이루고 민주정부를 다시 세운 한국이 너무 부럽다”고 했다. 

▶관련기사 : [기고] 미국 노동운동의 위기와 희망 

미국간호사노조 조합원들이 2011년 10월5일 미국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 참가해 행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미국간호사노조 조합원들이 2011년 10월5일 미국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 참가해 행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런 상황에서 노조는 ‘공공성’의 힘으로 어려움을 돌파해 나가야 한다고 그는 본다. 홍 국장은 “밥그릇만 챙기는 게 아니라 타인의 건강을 책임진다는 의무감까지 가진 게 우리 노조의 힘”이라고 했다. 미국간호사노조는 우선 캘리포니아에만 적용되는 ‘비율법’을 미국 전역으로 확대하고자 한다. 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내놓은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 법안을 지지하면서 의료개혁에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처럼 정부가 단일 건강보험을 운영해 전 국민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란 취지다. 월가 자본의 탐욕을 저지하기 위해 금융거래에 과세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도 주요 목표다. 

홍 국장은 1974년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받아 ‘조국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역사를 공부했다”는 그는 재미동포 사회에서 드물게 현지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레이건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던 1981년 노조 조직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해고와 민영화가 노동자를 옥죄었지만 주류 노동운동은 소수자 중의 소수자인 한인 문제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공항 하청업체에서 청소를 하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통역을 해 주며 노조 조직을 도왔다. 처음에는 대학에 다니면서 봉사활동 정도로 하다 곧 대학을 그만두고 전업으로 뛰어들었다. 1989년에는 안테나 제조업체인 다국적기업 피코가 한국 공장을 폐쇄하고 임금을 주지 않은 채 달아나자 본사에 소송을 하러 미국에 온 여성 노동자들을 돕기도 했다. 

한국땅을 다시 밟은 것은 1990년이었다. 당시 권인숙씨(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가 서울 구로동에 만든 노동인권회관을 방문해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노동운동을 하려고 위장취업했다 발각돼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성고문’을 당한 권 원장이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 인정을 받아내고 그 배상금으로 만든 노동상담소였다. 홍 국장은 미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한인이 많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남가주한인노동상담소를 만들고 활동했다. 2001년 캘리포니아간호사노조에 채용된 이래 노조 조직에 매진해온 그는 전국간호사노조 조직부국장을 거쳐 올해부터는 전국단위의 노조 조직 활동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았다.

보건의료노조 20주년을 맞아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그는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투 운동’에서 “사회 변혁의 희망을 본다”고 했다. 홍 국장은 “그동안 여성운동이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도 남성주의적 군사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사회 발전을 막아 왔다”며 “간호사 인권 문제도 결국 전체적인 인권 문제가 개선 돼야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활동하면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여성을 차별하지 않고 당당한 주인으로 세우는 직장 내 민주주의가 이뤄져야 기업도 잘 돼요. 병원도 예외가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