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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 안전망이 없다①]안전을 돈으로 사는 시대

‘릴리안 생리대’로 촉발된 화학물질 신드롬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가습기 살균제, 살충제 계란 등 일상을 둘러싼 화학약품 독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있으나, 시민들을 안심시켜줄 연구결과나 당국의 대책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생리대 내 화학물질이 어떻게 여성건강에 피해를 일으키는지 밝힐 ‘역학조사’를 정부가 회피하는 데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식약처는 25일 “최근 3년간 생산·수입된 생리대 전 품목의 휘발성유기화합물(VOC)에 대해 우선 전수조사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생리주기 변화, 생리양 감소, 자궁질환 등 일회용 생리대 사용자가 호소한 다양한 피해가 VOC 영향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일회용 생리대엔 VOC 뿐아니라 수십종의 화학물질이 포함돼 있다.

현재 식약처 입장은 ‘일회용 생리대가 여성건강에 얼마나 피해를 끼치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27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산부인과·내분비과 전문의 등이 모여 전문가회의를 했지만 지난 3월 강원대 김만구 교수 연구팀이 실시한 실험결과(일회용생리대 VOC 방출 시험)에 대해서 시험방법이 타당한지, 실제 이렇게 (위험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표시했다”면서 “그러면 논란이 크니까 우리(식약처)가 직접 전수조사를 하겠다고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일회용 생리대 논란은 깨끗한 나라의 ‘릴리안’ 제품 사용자들이 다양한 피해 사례를 인터넷에서 호소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지난 3월 김만구 연구팀의 시험결과에서 릴리안의 tVOC(총 휘발성유기화합물 농도) 농도가 가장 높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여러 피해가 모두 VOC 탓이라는 증거는 없다. 생리대 내 수십종의 화학물질 중 다른 요인이 ‘주범’일 수도 있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역학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 계속되는 이유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최경호 교수는 “사람들이 부작용을 호소하면 어떤 성분, 어떤 원료가 문제인지 추적하고 그 성분의 농도 조사를 해야 한다”며 “VOC가 아닌 다른 성분이 문제라면, VOC 조사결과만으로는 밝혀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번 사례는 역학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서울 용산구에 사는 주부 ㄱ씨는 고등학교 1학년생인 딸을 위해 ‘반값’에 파는 생리대를 샀다가 최근 생리대 파문이 일면서 모두 버렸다. 그는 대신 동네 포목점에 들러 아기 기저귀용 천을 샀다. 면 생리대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ㄱ씨는 “아토피 증상이 있었던 아이에게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생리대를 계속 쓰라고 하기엔 너무 걱정스럽다”며 “번거롭더라도 면 생리대를 쓰라고 아이를 설득하고 있다”고 했다.

일회용 생리대를 써온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번 파문을 단지 하나의 브랜드나 ‘VOC’에 국한한 문제로 보지 않는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일회용 생리대 전반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밝혀서 안전한 생리대를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VOC 방출 시험을 직접 한 김만구 교수도 21일 CBS 인터뷰에서 “여성의 화학물질 노출을 줄이자는 취지에서 시험한 것”이라면서 “실제로 여성 건강에 미치는 독성을 파악하는 데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지금은 기초자료가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최경호 교수는 당장 논란이 된 VOC 농도 시험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식약처 태도를 두고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자칫 ‘언발에 오줌누기’ 식의 대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VOC가 아닌 다른 요인을 더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서강대 화학과 이덕환 교수는 지나치게 흡습성이 좋은 ‘고분자 흡수체’를 걱정한다. 생리대 속의 고분자흡수체는 1990년대 이전까지는 알갱이 형태였는데 이후 섬유형으로 바뀌었다. 알갱이는 흡수할 수 있는 액체의 부피가 한정돼 있지만 섬유형은 이를 크게 늘릴 수 있기 때문에 흡수력이 훨씬 좋다.

이 교수는 “미국에선 1980년대에 체내에 삽입하는 생리대 ‘탐폰’에 고분자흡수체를 썼다가 여성들이 돌연사하는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다”면서 “흡습성이 지나치게 좋은 화학물질을 쓸 경우 특정 박테리아가 번성해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고, 이후 탐폰에서 고분자흡수체는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번 생리대 파동에서도 흡습성을 높이기 위한 물질이 오히려 피해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식약처 관계자는 역학조사에 대해 “필요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원론적인 입장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전수조사와 병행해야 한다”(최 교수), “피해자들에게 해법을 줄 유일한 방법은 역학조사”(이종현 박사)라고 말하지만 식약처는 느긋하다. “일단 VOC가 조사를 해 보고 그걸 바탕으로 역학조사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인지를 논의해 보겠다”(식약처 관계자)는 것이다. 식약처가 실시한 VOC 조사 결과가 심각하지 않을 경우 역학조사는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

식약처는 부작용 사례 수집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고 있다. 여성환경연대가 수집한 3009명의 피해사례에 대해 공유 요청을 한 기관은 식약처가 아닌 한국소비자원이었다. 25일 식약처가 주최한 전문가회의에서는 피해를 호소한 여성들을 상대로 한 광범위한 설문조사와 역학조사도 실시할 필요성이 언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식약처 관계자는 “(전문가회의에서) 역학조사 필요성 얘기는 없었다”고 일축하면서 “부작용 수집 방안을 따로 내놓지 않은 이유는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을 통해 누구나 부작용 사례를 신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생리대의 화학물질 중 무슨 성분이 어떻게, 어느 정도나 피해를 일으키는지 알려면 정부가 훨씬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EH R&C 환경보건안전연구소의 이종현 박사(독성학)는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이 소송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관리당국이 민사상의 문제로 놔둔다면, 정부는 소비자와 기업 사이의 ‘제3자’가 돼버리는 것”이라면서 “(이번 사례를) 환경보건법에 의한 ‘역학조사 청원’으로 받아들이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환경보건법에 따르면 ‘환경유해인자’에 의한 피해가 있거나 예상될 때 국민청원 형식으로 역학조사를 요구할 수 있다.

역학조사를 한다면 식약처보다는 질병관리본부와 환경부가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질본과 환경부는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 환경성 질환 관련 역학조사 인프라를 구축했다. 특히 환경부는 각 대학병원별로 환경보건센터를 지정해 환경성 질환 역학연구를 맡기고 있다. 가임기 여성을 대상으로 한 환경성 질환 코호트(공통된 통계적 요소를 공유하는 집단) 조사에도 나선 상황이다. 이 박사는 “이런 인프라를 적극 활용해서 원인을 밝혀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약처는 지난해부터 VOC 등 화학물질의 검출량과 위해성 평가 조사연구 용역을 진행 중이다. VOC 86종, 농약성분 14종, 기타 화학물질 등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밝히는 연구다. 하지만 일회용생리대가 어떤 과정을 통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역학조사와는 다르다.

이번 기회에 어린이·성인용 기저귀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의약외품인 생리대와 달리 어린이용 기저귀는 ‘안전관리 대상 어린이 제품’, 성인용 기저귀는 ‘안전관리 대상 공산품’으로 분류돼 있다. 다만 안전성 검사 항목이 다른 공산품에 비해 많다. 최경호 교수는 “신설된 위생용품관리법에 따라 내년 4월에야 어린이용·성인용 일회용 기저귀를 팬티라이너 등과 위생용품으로 통합관리할 수 있게 된다”면서 “현재 식약처의 발표엔 기저귀에 대한 ‘안전성 조사 실시’ 정도로 추상적으로 표현돼 있는데, 생리대 역학조사를 실시한 후 기저귀에 대한 조사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을 돈으로 사는 시대, 탈출구 없는 저소득층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ㆍ릴리안 피해도 학생·20대 집중…계층 간 ‘안전 격차’ 불가피

“영국산 유기농 생리대 ○○○ 추천해요.”

깨끗한나라의 릴리안 제품으로 불거진 생리대 파문 속에 온라인에선 ‘해외 생리대’ 직접구매(직구)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화학물질 안전성 기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유럽의 생리대가 인기다. 경기 일산에 사는 한모씨(35)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대응이 수시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결국 ‘해외 직구’를 결심했다. 그는 “처음에는 세계에서 생리대의 VOC(휘발성유기화합물)를 검사하는 나라는 없다며 그동안 해온 품질검사를 그대로 한 번 더 하겠다고 하더니, 논란이 계속되니까 이번에는 릴리안에서 문제가 된 VOC만 얘기하는 걸 보고 믿음을 완전히 잃었다”고 했다.

한씨 같은 요즘 소비자들에게 생리대 해외 직구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여러 가전제품을 해외 직구로 사본 경험이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믿을 수 있는 해외 생리대’에 대한 정보가 돌아다닌다. 국내 제품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고 하지만, 어차피 국산도 ‘오가닉 코튼(유기농 순면)’을 내세운 생리대 값은 만만치 않다.

SNS에서는 “한국에서 가임기 여성으로 사는 서러움” “한국 것만 아니면 된다”는 글들이 올라온다. 정부가 생활과 밀접한 물건의 안전성에 대해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에, 시민들은 안전을 돈으로 사야 하는 형편에 놓였다. 해외제품에 대한 정보를 잘 찾아낼 수 있고 온라인 쇼핑에 시간과 돈을 쏟을 수 있는 여성들은 ‘좀 더 안전한’ 생리대를 찾아나선다. 하지만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해외 직구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사치다. 고급이 아닌 일반 생리대조차도 값이 너무 비싸 쓰지 못하는 소녀들의 고통이 사회문제가 됐던 것이 지난해 일이었다. ‘릴리안 공포’도 주로 주머니가 가벼운 계층에 쏠려 있다. 여성환경연대가 릴리안 제품 건강피해 사례를 접수한 결과를 보면 20대가 44.1%, 30대가 36.8%였다.

젊은층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제보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겠지만 이 제품의 구매자 중에 젊은층이 많은 탓도 있다. 지난 26일 찾은 서울의 한 대형마트 생리대 코너 판매원은 “릴리안은 처음 나올 때부터 1+1 같은 할인행사를 많이 했고, 다른 제품들보다 많게는 5000원가량 싸기 때문에 학생들이나 20대 여성들이 많이 사갔다”고 말했다. 생리대 안전문제에서도 ‘계급 격차’가 나타나는 것이다. 릴리안 제품은 저소득층 생리대 지원에 활용되기도 했다. 좋은 의도로 지원한 것이라 해도, ‘돈 없어 생리대조차 못하는 아이들에게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물건이 전달된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화학물질 안전망’을 만들지 않는 한 경제적 형편이나 문화자본에 의한 계층 간 안전의 격차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몸 안에 삽입하는 반영구적 생리용품인 ‘생리컵’ 수입을 허용할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런 차이가 드러났다. 

여성환경연대의 고금숙 팀장은 “정부가 일회용 생리대의 건강 역학조사를 하고 엄격한 안전기준을 만들어 유통시키지 않는 한 ‘안전한 생리대를 쓸 권리’는 경제력에 좌우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고 팀장은 “저소득층을 위한 생리대 지원사업 같은 것은 당연히 계속해야 하지만,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할 권리를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