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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MBC 프리랜서 앵커가 “파업 대체인력 되지 않겠다” 선언한 이유

“MBC 계약직은 파업 대체인력이 아니다”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ㆍ프리랜서 앵커 김형기씨의 ‘개인 성명’ 왜

“파업 대체인력이 아닙니다”라는 성명을 낸 MBC 프리랜서 라디오 앵커 김형기씨가 6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면서 “파업에 나선 아나운서들의 대체인력이 돼 현 체제를 연장하는 데에 쓰이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파업 대체인력이 아닙니다”라는 성명을 낸 MBC 프리랜서 라디오 앵커 김형기씨가 6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면서 “파업에 나선 아나운서들의 대체인력이 돼 현 체제를 연장하는 데에 쓰이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파업 대체인력이 돼 사측에 인공호흡기를 달아주고 현 체제를 연장하는 재료로 이용되고 싶지 않습니다.”

MBC 노조의 총파업 사흘째인 6일 오후 1시, 김형기 프리랜서 앵커(33)는 어김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파업에 동참하기 힘든 비정규직 라디오 뉴스캐스터다. 그는 지난 3일 “저는 파업대체인력이 아닙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개인 성명을 냈다. 마이크를 놓을 수 없는 처지임에도, 그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성명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방송인의 외침이자, 무너진 공영방송에서 사측의 도구로 쓰이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선언이었다. 

그는 지난달 말 사측의 한 고위 관계자가 다른 캐스터를 사석으로 불러 “파업이 시작되면 TV뉴스 공백을 메워달라”는 취지의 요청을 했다는 사실도 폭로했다. 출연을 거부한 아나운서들이 비운 자리를 대체해달라고 한 셈이다. 파업을 목전에 둔 지난 1일에는 회사에 있던 캐스터가 회사의 요청으로 TV뉴스 코너 녹음에 참여하기도 했다. 6일 만난 김 앵커는 “전문성을 갖고 MBC에 입사했는데, 결국 대체인력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고 슬펐다”고 했다.

김 앵커는 지난해 2월 한 종교방송국의 정규직 아나운서 자리를 포기하고 MBC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그 때만 해도 아나운서 직종이 전문영역을 가진 방송인으로 분화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판단했고, 전문 뉴스진행자로서 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MBC 보도국에는 그처럼 라디오 뉴스만 진행하는 뉴스캐스터가 6명 있다.

방송국에는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정규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 앵커같은 계약직 캐스터들, 프리랜서 작가들, 파견직 조연출들도 모두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정규직 노조와 다른 경우가 많다. 라디오 뉴스캐스터라는 직종 자체가 파업에 참여한 아나운서들을 대거 업무에서 배제한 뒤 새로 만든 직종이다. MBC에서 저질러진 부당노동행위가 모두 시정되고 아나운서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면 직군이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 

김 앵커는 “법과 상식에 비춰보면 사측이 부당노동행위를 한 게 명백하고, 그간 부당하게 마이크를 빼앗긴 분들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방송에서 주어지는 역할이 한정된 만큼 나중에 들어온 비정규직들이 감수해야 할 부분도 있지 않겠나”라고도 덧붙였다.

비정규직이 제작을 거부했다가는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파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김 앵커뿐만 아니다. ‘파리목숨’이라 불릴 만큼 지위가 불안정한 프리랜서 작가들까지 나섰다. 한국방송작가협회와 KBS·MBC·SBS·EBS 시사교양작가들은 잇따라 성명을 내고 방송 파업에 지지를 보탰다. MBC <PD수첩> 팀에서 일하는 조희정 작가는 PD들이 제작 자율성 침해에 항의하며 제작중단에 나선 지난 7월 말부터 일이 끊겼다. 몇몇 작가들은 적금을 깨거나 보험을 해지했다. 조 작가도 단기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고 있다. 

단체행동권을 보장받는 정규직과 다르게 비정규직 작가들은 ‘복귀’를 보장받을 수도 없는 처지다. 그럼에도 <PD수첩> 작가들은 “사측이 경영진 입맛에 맞는 다른 PD들을 보낸다면 그들과는 일하지 않겠다”고 뜻을 모았다. “어렵더라도 언론 정상화를 위해서는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그는 말했다. KBS <요리인류> 팀의 조정화 작가는 “지금 이 시대에, 이 순간에 카메라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좌절감을 그동안 견디기 어려웠다”며 “제작이 중단돼 많은 작가들이 어려운 상황일 테지만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이 정상화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애초에 계약직을 쉽게 뽑아 파업 대체인력으로까지 사용하도록 만든 구조가 문제라고 김 앵커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김 앵커와 다른 캐스터들이 MBC와 맺은 계약서에는 “을(캐스터)이 정당한 사유 없이 계약을 위반할 경우 갑(회사)은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방송업계 계약직들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한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단체행동에 나서면 일자리를 잃을 뿐 아니라 위약금까지 물어야 하는 불공정한 계약서가 종종 발목을 잡는다. 

그는 “큰 방송국 정규직 이외에는 아나운서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한 현실에서 처우가 점점 나빠지다 결국 파업 대체인력으로 소모되기까지 이른 것”이라며 “언론 정상화를 위해서라도 비정규직 언론인들이 언론자유를 침해받지 않고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