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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삶

[현장]"다리 좀 벌리고 앉으면 어때요" "남자라고 꼭 힘 세야 하나요" 초등학생들이 말하는 '교실 속 성차별'

“할머니네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제가 다리를 좀 벌리고 앉았더니 할머니가 다리 좀 오므리라고 했어요. 여자들은 다리를 쩍 벌리고 앉으면 안된대요. 할 수 없이 오므리고 앉았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시는지 기분이 나빴어요” (인천지역 초등학교 5학년 ㄱ양)

“태권도장에서 겨루기를 하다가 얼굴을 발로 세게 맞았는데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어요. 관장님이 남자가 뭘 질질 짜냐고, 그만 울라고 했는데 너무 억울했어요. 여자아이들이 울면 달래주면서요.” (경기지역 초등학교 5학년 ㄴ군)

어린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성역할을 학습한다. 남자아이들은 절대 울어선 안 되고 여자보다 힘이 세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여자아이들은 얌전하고 단정해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교실에서는 한쪽 성을 비하하거나 공격하는 말이 오간다.


아이들은 각종 매체와 온라인상에서 사용되는 여성비하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교실에서는 어떤 성차별적 언어표현을 만날 수 있을까.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22일 오후 인천과 경기지역의 두 초등학교에 다니는 5학년 남녀 학생 4명을 만났다. 아이들의 담임인 초등성평등연구회 소속 교사 2명도 함께 자리했다. 아이들은 “남자라도 울고 싶을 땐 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학급 번호가 남자부터 매겨지지 않고 공평하게 가나다순으로 매겨졌으면 좋겠다” 같은 소망을 쏟아냈다.

“여자애가 왜 옷을 똑바로 안 입냐” “남자애가 좀 참아야지”

남녀 가릴 것 없이 아이들은 성별 고정관념이 불편하다고 했다. ㄷ양이 다니는 경기지역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남학생의 출석번호를 1번부터, 여학생의 출석번호를 41번부터로 정하는 게 관례였다. ㄷ양은 “남자가 1번이고 여자가 41번이면 편견이 생길 것 같다. 남녀 상관없이 가나다순으로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부 교사들의 문제제기로 이 학교는 내년부터 매년 남녀 번호 순서를 바꾸기로 했다.

남자아이들은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성역할과 맞닥뜨릴 때 불편해진다. 인천지역 초등학교 5학년인 ㄹ군은 “남자라고 모든 여자아이들보다 힘이 더 세지는 않다”고 말했다. “엄청 무거운 걸 들어야 했는데 저는 힘들게 들었고, 어떤 여자애는 쉽게 들었어요. 걔가 저한테 남자가 왜 이렇게 힘이 없냐고 놀렸어요.” 반대로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처럼 활달하게 뛰어놀려 할 때 다양한 장벽을 만난다. ㄹ군은 “작년에 운동을 정말 잘하는 6학년 누나 세 명이 친구들한테 와서 축구를 같이 하자고 했는데 친구 두 명이 같이 하기 싫다고 욕을 하면서 꺼지라고 했다. 여자들은 축구를 못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성역할을 강요받는 남자아이들은 때로 억울해하기도 한다. ㄴ군은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을 때려도 혼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했다. “2학년 때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을 자꾸 때려서 우리가 참다가 딱 한 대 때렸는데, 여자아이들이 선생님한테 가서 이르니까 우리만 혼났어요. 그때 제 친구 중에는 팔에 멍든 애도 있어요.” 반대로 여자아이들은 ‘여자는 세심하고 단정해야 한다’는 성역할을 주입받는다. ㄱ양은 “예전 담임선생님이 여자애가 왜 이렇게 옷을 똑바로 못 입냐고, 왜 이렇게 글씨를 못 쓰냐고 했다”고 말했다.

“응 니 애미”, “보이루”… 교실 파고든 혐오표현

아이들은 이제 텔레비전 대신 유튜브를 더 많이 본다. 유명 BJ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ㄱ양과 ㄴ군은 이날 이 자리에 참석하러 오기 전 선생님과 함께 반 친구들이 유튜브 개인방송을 얼마나 보는지 조사했다. 친구들 25명 모두가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이는 단연 게임 스트리밍 방송을 하는 BJ ‘보겸’이다. 25명 중 12명이 이 방송을 본다. 그 밖에도 BJ 재넌, 김왼팔, 도티 등이 인기가 많다.

문제는 초등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BJ 중 일부가 방송을 하면서 욕설을 하거나 적절치 못한 유행어를 퍼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유튜브에서 욕설이나 비하 표현을 들어본 친구들은 15명이나 됐다. 초등학생을 겨냥한 일부 유튜버는 “바른말 고운말을 써서 재미없다”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ㄴ군은 “게임 스트리머가 많아지고 경쟁이 치열해지자 다들 자극적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말을 쓰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ㄹ군도 “게임에서 져서 짜증날 때 쓰는 욕설이나 나쁜 말이 유행어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스마트폰을 처음 이용하게 되는 아이들은 친구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욕설이나 혐오표현을 접한다. 이 가운데는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이 특히 많다. BJ 보겸이 자신의 이름과 ‘하이루’를 합쳐서 만든 인삿말 ‘보이루’는 일각에서 여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며 문제가 됐다. ㄱ양과 ㄴ군의 학급에서는 음란물에서 유래된 ‘앙 기모띠’, ‘얼굴’을 비하하는 말인 ‘와꾸’가 금지어다. ‘보이루’는 아직 금지어가 아니지만 담임선생님이 최근 ‘보이루’가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학생들에게 알려줬다.

초등학생들은 가족 구성원 중 여성을 꼬집어 비하하는 ‘패드립’도 일상적으로 접한다. ㄷ양과 ㄹ군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요즘 아이들끼리 말다툼을 하다가 “응 니 며느리”라고 대꾸하는 경우가 잦다. 별 뜻은 없다. 말싸움을 하던 중 대답할 말이 없거나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을 때 이렇게 말한다. 원래 아이들은 이럴 때 “응 니 애미”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를 비하하는 나쁜 말이라는 인식이 퍼지자 몇몇 아이들이 ‘애미’를 ‘며느리’라고만 바꿔 쓰기 시작했다. 비하의 대상이 ‘어머니’에서 ‘며느리’, 즉 다른 여성으로만 바뀐 셈이다.

정현백 장관은 “나도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서 치마를 둘러엎는 남자아이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여러분도 ‘여자애가 왜 이렇게 별나냐’ ‘남자애가 왜 그렇게 약해빠졌냐’ 같은 소리를 들으면 상처를 받을 것”이라며 “유튜브 같은 인터넷 방송 BJ가 쓰는 말을 따라서 쓰는 게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남을 깎아내리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가부는 앞으로 중·고등학생과 청년 등이 겪은 성차별 언어표현 경험과 해결방안에 대한 집담회를 열고, 연구용역으로 추진 중인 ‘일상 속 성차별 언어표현 현황 연구’에 반영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