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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열전

"너는 3류" 폭언에 인격무시, 강제 야근…10명 중 3명 "직장갑질 심각"

김상범·김지혜 기자 ksb1231@kyunghyang.com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서울 광화문 네거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서울 광화문 네거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황민주씨(28)는 2년 전부터 방송사 막내작가로 일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근로계약서’라는 걸 본 적이 없다. 프리랜서 신분으로 PD나 팀장 등에게 개인적으로 고용됐다가 작품이 끝나면 일자리를 잃는다. 노동의 대가는 ‘임금’이 아닌 ‘원고료’나 ‘취재비’라는 이름으로 받아왔다. 돈 대신 상품권을 지급받은 막내 작가도 있었다. 하루 14~15시간 대본을 쓰고 자료조사를 하면서도 “고작 이따위 일 해놓고 돈 받는 게 부끄럽지 않냐”,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잘라버릴 수 있다”는 폭언에 매일같이 시달렸다. 황씨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도 ‘방송판 좁아서 어디 가서 일 못한다’는 협박만 되돌아왔다”고 털어놨다.

서울의 한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정재환씨(가명·32), 회사가 보수적인 분위기라 자잘한 서류정리같은 선배들 뒤치닥꺼리에 시달리기 일쑤다. 한 번은 회식 때 젊은 직원들끼리 모여 앉았다가 “과장님 고기는 누가 구울 거냐”라는 말과 함께 욕설을 들었다. 계약직 직원들에게는 “니가 3류라 일을 제대로 못 하는 거다”라는 폭언도 심심찮게 오간다. 

‘갑질’은 사회적 강자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자리잡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도 갑질은 있다. 선배와 상사의 ‘꼰대질’이나 괴롭힘, 불합리한 업무지시같은 것들이 일터의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요소로 꼽힌다. ‘직장 갑질’의 유형과 실태를 조사한 결과가 나왔다. 노동건강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등으로 이뤄진 ‘직장갑질 119’는 여론조사기관 한국씨앤알에 의뢰해 전국 직장인 710명을 상대로 1주일간 온라인으로 조사한 결과를 1일 공개했다. 전문기관에 의뢰해 ‘직장 내 갑질’을 조사한 것은 처음이다. 

직장 내에서 경험한 불합리한 상황 - 임금 노동시간

직장 내에서 경험한 불합리한 상황 - 임금 노동시간

직장인들은 주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제값’을 받지 못할 때 회사의 ‘갑질’을 느꼈다. 근로시간과 휴가 등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계약시간보다 근무를 더 많이 시킨다’는 응답이 46.5%로 나타났다. ‘연월차, 생리휴가, 경조사 등 휴가를 제 때 쓰지 못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45.5%였으며 ‘정해진 점심시간이나 휴게시간을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29.2%였다. 인력이 모자라고(60.8%) 업무지시가 퇴근시간에 맞춰 내려오거나 기한이 촉박하게 전달되는 것(43.8%)이 주된 원인이었다. 특히 중소기업에서는 휴가를 제때 쓰지 못한다는 응답이 53.1%로 절반이 넘었다.

일한 대가도 제대로 산정되지 않았다. ‘임금을 정해진 날짜에 주지 않거나 적게 받은 적이 있다’는 응답이 21.1%였으며, ‘내가 하는 일보다 임금을 적게 준다’는 49.9%, ‘추가근무 수당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51.5%로 나타났다. 폭언과 폭행, 해고 위협도 많았다. ‘상사로부터 해고하겠다는 위협을 종종 받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12.1%로 나타났으며, ‘반말, 욕설 등 인격무시와 언어폭력을 받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21.7%였다. ‘때리거나 물건을 던지는 등의 신체 폭력을 받았다’ ‘성희롱이나 성폭력이 있다’는 응답도 각각 6.8%, 9.4%로 나타났다. 

직장내 불합리한 행태 수준

직장내 불합리한 행태 수준

법에 명시된 노동자의 권리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일하다 다쳐도 내 돈으로 치료한다’는 사람이 20.3%였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주지 않고, 계약서에 부당한 내용이 들어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17.5%로 나타났다. 비정규직인 탓에 ‘회사의 복리후생, 복지 제도 이용에서 차별 대우를 받은 적이 있다’는 비율도 20.3%에 달했다. 

직장 내의 불합리한 행태에 대해 응답자의 31.5%가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41.3%는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도 참거나 모르는 척 했다’고 답했다. ‘대응을 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65.5%), 혹은 ‘향후 인사 등에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서’(34.1%)였다. 노동조합 등 문제를 제기할 통로도 많지 않았다. 응답자 중 노조에 가입해 있는 사람은 13.8%에 그쳤다. 

변호사, 노무사, 노동전문가 등 241명으로 구성된 직장갑질 119는 직장인들이 업종별 온라인 모임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찾아나가는 운동을 하기 위해 결성됐다. 이날 공식 출범한 직장갑질 119는 “적은 인력에, 수당은 안 주고, 임금은 적게, 계약보다 더 많이 일시키는 임금·고용조건 전반이 직장인들이 느끼는 갑질이었다”라며 “갑질 사례를 제보받아 사회에 알리고 공정위, 노동부 등 국가기관에 제소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