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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돈 벌기

농성장 밖에서 기자회견 했다고…법원, “업무방해 ‘방조’, 20억 물어내야”

2014년 9월 서울중앙지법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정규직 노동자가 맞다”고 판결하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강윤중 기자


“손해배상 소송이 현장에 미치는 파급력은 정말 커요. 액수가 어마어마한 만큼 노조는 위축되는 거죠.”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였던 엄길정씨(45)의 말이다. 그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10년 11월15일부터 25일간 현대차 울산1공장에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일 때 연대 활동을 했다. 본인은 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부당하게 보였기 때문에 함께 했던 것이다. 지난달 24일, 부산고등법원 민사부는 엄씨에게 “2010년 점거에 대해 사측에 2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문제는 엄씨가 당시 점거를 주도한 비정규직 노조 지도부도 아니었고, 비정규직 당사자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엄씨는 정규직 노조 대의원이었다. 1공장이 그의 선거구였기 때문에 연대 차원에서 함께 있었다. 엄씨와 함께 20억을 물어내야 할 처지에 놓인 다른 3명도 마찬가지다. 그 중 한명인 김형기씨는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자였다. 2010년에는 플랜트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옛 동료들을 돕기 위해” 점거농성에 왔다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했다. 나머지 2명인 최병승씨와 박점규씨는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의 상급단체인 금속노조 간부들이었다. 농성을 직접 조직·실행한 당사자가 아닌, 이들 4명만 연대·지지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거액을 물어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특히 최병승씨는 점거 기간 대부분을 공장 바깥에 있으면서 농성에 참가하지 못한 다른 비정규직들과 집회를 열거나 기자회견을 했다. 실제로 공장에 들어간 것은 1~2차례 뿐이었다. 하지만 현대차는 공장 가동을 중단한 손해가 크다며 최씨까지 엮어 민·형사 고발을 했고, 2013년 형사부 1심은 최씨의 업무방해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자 검찰은 업무방해 ‘방조죄’라는 혐의를 끌고 와 다시 기소했다.

파업에 직접 참여한 당사자가 아닌, 기자회견과 집회 정도만 했다고 ‘방조죄’라는 죄목을 적용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전두환 정권 때 신설돼 노동·민주화 운동 탄압에 악용되다 2006년 사라진 ‘제 3자 개입금지’의 부활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정기호 민주노총 울산법률원 변호사는 “노동조합 활동을 할때 상급단체나 시민사회의 연대활동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데, 형법상의 방조죄를 기계적으로 적용해 이런 활동에까지 제약을 건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7월 부산고법 형사부는 이를 받아들여 최씨에게 벌금 400만원을 선고했고, 이 형사판결이 영향을 미쳐 이번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패소한 것이다.

현대차의 ‘표적 소송’ 논란도 있다. 현대차 비정규직 출신인 최병승씨는 2010년 7월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처음으로 이끌어낸 사람이다. 최씨 판결로 같은 처지에 있던 비정규직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공장 점거를 벌였고, 근로자지위 확인소송도 이어졌다. 현대차가 당시 농성에 대해 청구한 손해배상 액수은 총 220억원이 넘는다. 엄길정씨는 “사측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취하하거나 노조를 탈퇴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청구를 취하해주는 방식으로 조합원들을 압박했다”라며 “정규직이라도 회사에 ‘찍힌’ 사람들이나 눈엣가시로 박힌 노조 활동가들만 물고 늘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