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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법 20년] “소모품 인생 20년… 내 진짜 사장은 누구일까요”

ㄱ씨는 국내 한 보험사 연수원의 보안요원으로 일한다. 입사할 때는 ‘인력제공 및 시설물 관리 용역업’을 하는 협력업체와 근로계약서를 썼다. 그런데 그의 면접을 본 사람은 원청인 보험사 소속 본부장이었다. 입사 후 업무를 지시하고 감독하는 사람도 연수원에서 근무하는 원청 직원들이었다.

ㄱ씨와 동료들은 보안요원 업무와 상관없는 연수원의 온갖 궂은 일까지 떠맡아 했다. 정규직 간부들은 보안요원들에게 원청 임직원을 호위하라든지 간부들의 운전기사를 맡으라든지 하는 지시를 하곤 했다. 연못에 금붕어를 키우거나 잔디와 꽃에 물을 주는 것 같은 일도 했다. 심지어 직원들의 술자리 뒤처리를 하고 토사물을 치우기까지 했다. 연수원 행사가 있는 날에는 휴무일에도 근무했고, 초과근무수당은 받지 못했다. ㄱ씨와 동료들은 “보안요원과 시설관리 직원들은 원청이 참여해 채용했고 원청 소속 팀장이 작업배치 결정권을 가졌으며 징계나 평가, 교육도 원청이 했다”며 파견법에 따라 원청회사가 자신들을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불법파견 진정서’를 고용노동부에 냈다.

파견법 시행 20주년을 맞은 2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파견노동자들이 불법파견을 엄벌하고 파견법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직장갑질119 제공


파견노동자의 고용 안정을 보장하고 인력 수급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목적으로 ‘파견법’이 제정된 지 지난 1일로 꼭 20년이 됐다. 파견이란 인력파견업체가 노동자를 고용한 뒤 사용사업주와 ‘파견계약’을 맺고 노동자를 보내 사용사업주의 업무지시를 받으며 일을 하도록 하는 고용형태다. 파견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비정규직 가운데서도 가장 불안정한 축에 속한다. 서류상으로 고용된 사용자와 업무지시를 하는 실제 사용자가 다르기 때문에 업체 간 계약해지만으로 해고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파견법에서는 파견노동자를 쓸 수 있는 업종을 제한했고, 2년이 지나면 직접고용 의무가 생기도록 했다.

파견법이 시행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이런 조항은 사실상 무력해졌다. 파견이 허용되지 않은 업종에서도 ‘하도급’으로 위장하면 파견노동자를 2년 이상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도급은 수급을 받은 용역회사가 특정 업무를 맡고 그에 대해 원청업체가 보수를 지급하는 계약이다. 노동자들은 직접 근로계약을 맺고 있는 용역로부터만 업무지시를 받을 수 있지만, 원청업체가 채용부터 업무지시에까지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노동사회단체 직장갑질119는 지난 8개월 동안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제보 179건을 분석한 결과 상당수 간접고용노동자들이 하도급으로 위장한 불법파견 형태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2일 밝혔다. 파견허용업종이 아니거나 파견기간을 넘겨가며 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정부의 무관심 때문에 파견법의 직접고용 조항도 적용받지 못했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신분이 불안정해 업주의 ‘갑질’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전체 제보 중 45건(25.1%)이 임금 관련 제보였다. 노동자들의 동의 없이 상여금을 삭감하거나 휴게시간을 늘리는 ‘최저임금 꼼수’ 제보가 20건으로 가장 많았다. 파견업체 소속으로 방송국 FD로 일하는 ㄴ씨는 “최저시급이 오르자 회사가 연장수당 30만원을 없애고 시급제로 계산한다며 명목상으로만 휴게시간을 만드는 바람에 노동시간은 줄지 않고 급여만 줄어들었다”고 제보했다. 파견업체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됐다는 제보도 40건(22.3%)이나 됐다. 공공기관에 파견직으로 입사한 ㄷ씨는 “파견직은 2년 이상 근무시 정규직으로 전환해줘야 한다고 있어서 이야기했더니 회사가 ‘도급계약이라 직접고용은 할 수 없고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에 내년 계약은 안 될 수도 있다’고 답해 그제야 불법파견임을 알았다”고 호소했다.

재계약을 무기로 폭언이나 괴롭힘을 당했다는 제보도 37건(20.7%)이나 됐다. 백화점 하청업체 소속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ㄹ씨는 “백화점 주임이 화물차가 물건 내리는 곳을 청소하라는 등 부당한 작업지시를 해 거부했더니 욕설을 하며 ‘이 참에 정리해버려야겠다’고 말했다”고 제보했다. 방송국 자회사 파견직 ㅁ씨는 업무 외 지시를 받은 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어렵다’고 거부하자 선배로부터 “너는 파견직이니 하라면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직장갑질119는 “정부가 소모품으로 취급받는 파견노동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불법파견이 너무 만연하다 보니 이를 단속해야 할 고용노동부가 적극적으로 근로감독을 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직접고용되거나 사용자가 처벌받는 일도 잘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장갑질119는 “사업장 내에서 파견·용역직원을 사용하는 모든 회사를 대상으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해 파견법 위반 여부를 가려내야 한다”며 “불법파견을 저지른 회사에 직접고용 명령을 내리고 상습적으로 파견법을 위반한 회사는 엄벌하라”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