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한 사립대학은 지난해 수시모집 논술시험에서 국방비 지출액과 민주주의 성숙도, 물질주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국가 간 격차를 보여주고 “A국가와 B국가의 평화지수가 낮은 이유를 앞선 제시문에 근거해 설명하라”는 문제를 냈다. 또 다른 대학에서는 자연계열 구술면접 때 ‘인디오의 감자’라는 시, 정자와 난자의 수정 시 자손의 염색체 구성 유형의 개수, 탄소화합물에 대한 설명, 전자기파에 대한 설명, 효율성에 대한 설명 등 5개의 지문을 제시하고 “지문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단어를 말하라” “이와 연관된 자연 현상의 예를 들라”고 했다.
2015년부터 대학별 고사가 선행학습을 부추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선행학습 영향평가’가 의무화됐고, 대학들은 고등학교 교육과정 선에서만 문제를 낸다고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정말로 고교 수업만 받은 아이들이 이런 문제를 풀 수 있을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지난해까지 서울 강남의 학원에서 논술을 가르쳤던 이모씨(34)는 “사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아이들은 제시문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나도 가끔 이해가 안될 정도”라고 말했다. 대학들이 고교 교육과정 내에서 출제한다고 하지만, 학교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아이들이 사교육 없이 이런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학원에서 시험에 맞춰 대학 수준의 인문학과 사회학을 가르치는 일도 다반사”라고 이씨는 말했다.
“학교에선 준비하기 힘들어”
수능을 절대평가로 바꾸고, 고교학점제에 맞춰 내신도 성취평가제로 전환할 때 현장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대학들이 “변별력이 없다”며 대학별 고사를 대폭 확대하는 상황이다. 1년 미뤄졌지만 지난달 수능 절대평가화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일 때도 대학들 사이에서는 “수능이 절대평가가 되면 정시에 구술면접 등 다른 전형요소를 추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왔다. 교육부는 수시 논술전형을 없애도록 이끌고 대입전형을 학생부교과전형·학생부종합전형·정시로 단순화할 계획이다. 하지만 대학들이 구술면접 반영비율을 높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교사들 사이에선 당국이 논술전형을 줄이겠다는 기조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래야 내신이나 학종에서 다소 불리한 학생들에게 ‘다른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안연근 잠실여고 교사는 “수능을 절대평가하려면 상위권 학생을 변별할 수 있는 대학별 고사가 시행돼야 한다. 학생부 관리에 실패한 아이들에게 어떻게 재도전의 기회를 줄 것인지도 문제”라며 “선행학습이나 사교육에 대한 영향평가를 철저히 한다는 조건하에서 대학별 고사를 실시할 길을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객관식 문제풀이 수업 위주로 굴러가는 고교 교실에서, 문제 유형이 천차만별인 데다 논술·구술형인 대학별 시험을 대비하기는 현실적으로 무리다. 대학별 고사를 준비하는 아이들이 사교육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주현 논술강사는 “논술·구술을 학교에서 준비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교사에 따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 ”라고 말했다. 교사들 스스로가 대학별 고사에서 요구되는 ‘과학적 에세이’를 써본 경험이 없으니 대부분 학교에서는 가르칠 여건이 안된다. 50~60명이 쓴 글을 꼼꼼하게 고쳐가며 지도해주기도 어렵다.
학생 맞춤형 구술면접으로 가야
학교에서 수능에 맞춘 문제풀이 수업과 서술형 평가에 대비한 수업을 병행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몇몇 상위권 학생들을 빼면 여전히 대다수는 수능에 집중하는데, 교사가 대학별 고사를 염두에 두고 토론이나 글쓰기 수업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교사 출신인 이현 전교조 참교육연구소장은 “논술·구술 평가가 지금의 입시교육보다 나은 교육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수능을 서술형으로 바꿔 수업과 평가가 함께 바뀌도록 유도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정주현 강사는 “교사 연수를 비롯해 공교육 현장을 혁신하는 투자가 있어야 공교육에서 말이나 글로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는 교육을 할 수 있다”며 “대입경쟁이 심한 현실에서, 지금대로라면 학생들은 사교육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입시를 단순화해 학생들 부담을 줄이고 공정한 기회를 주겠다며 입시개혁을 추진하려 한다. 동시에 대학들의 선발 자율성을 살리고, 획일적 시험으로 나타나지 않는 학생의 잠재력과 성취를 평가할 방법도 찾아야 한다. 선택형 교육과정이 처음 도입된 2005년 7차 교육과정 이후로는 학생들마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같은 것을 묻는 기존 논술·구술 시험에서 탈피해 맞춤형 면접을 하되, 사교육이나 선행학습을 유발하지 않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입학본부 전문위원을 지낸 김경범 교수(서어서문학과)는 “학생 선택권을 늘린 교육과정의 취지를 살려 대학들은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구술면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학생부를 토대 삼아 응시생이 고등학교 때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디까지 성취했는지 학생 맞춤형으로 묻는 구술면접이 대학별 고사의 올바른 방향”이라며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잘 작동하게 하는 방향으로 대학별 고사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합교과형’ 대입 논술, 사실상 ‘본고사형’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ㆍ수학 문제풀이식 문항 여전
ㆍ대학별 고사가 본고사 역할
교사와 학부모들이 대학별 고사가 늘어날까 경계하는 것은 1990년대 후반까지 대학 입시를 좌우한 ‘본고사’의 기억 때문이다. 사교육이 전면 금지됐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을 빼면 대학들은 학교별로 주요 과목 시험을 실시해 신입생을 뽑았다. 1980년 이전까지는 예비고사를 치른 뒤 지원한 대학의 본고사에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고액 사교육 문제나 학교 수업의 파행,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몹시 심각했다.
본고사는 1980년 전두환 정권이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조치를 취하면서 금지됐다. 그러다 1994년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된 뒤 부활했다. 하지만 과거의 문제가 반복되자 정부가 대입제도 개선안에서 ‘본고사 금지’를 명문화해 1997년에는 국공립대 본고사가 폐지됐다. 2002년부터는 사립대에서도 교과 지식을 직접 묻는 본고사가 금지됐다. 그러자 대학들은 내신성적 반영 비율을 높이고, 논술이나 면접을 잇따라 도입했다. 이후 교육부가 세운 ‘3불(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정책’은 20여년간 지속됐다.
본고사가 없어졌다 해도, 논술·면접·적성검사 등 대학별 고사가 사실상의 본고사라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자연계의 경우 수리논술 같은 이름을 붙여놓고 실제로는 논리적 사고능력보다 수학 문제풀이 실력을 보는 대학들의 행태가 매년 논란이 됐다. 학생들의 논술 부담은 수능이 9등급제로 치러진 2008학년도에 결국 거센 사회적 논란을 불렀다. 주요 대학들은 여러 교과목의 구체적 지식을 알고 있어야 풀 수 있는 통합교과형 논술을 줄줄이 도입했고, 수시모집과 정시모집에서 논술 비중을 잇따라 늘렸다. 수능과 내신, 논술을 모두 어느 정도 이상 준비해놓지 않으면 대학에 가기 힘들다는 ‘죽음의 트라이앵글’ 논란이 벌어졌다. 2009학년도 입시에서는 대학교육협의회가 단답형이나 지식, 풀이과정, 외국어 제시문 등을 출제하지 못하게 한 ‘논술 가이드라인’을 없애버렸다. 일부 대학들은 영어 지문을 출제하는 등 국어·영어·수학 중심의 문제를 내놔 비판을 받았다.
학생부 중심으로 전형이 변화하면서 논술전형은 축소되는 추세다. 지금은 대학 대부분이 면접을 주로 활용한다. 2014년에는 선행교육을 금지하고 대학별 고사를 실시할 때 반드시 ‘선행학습 영향평가’를 하도록 규정한 공교육정상화법이 시행됐다. 고교 교육과정 안에서 대학별 고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한 것이다. 이를 위반할 경우 신입생 모집정원의 10% 범위에서 모집정지 처분까지 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공교육정상화법이 잘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나온다. 교육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지난 7월 14개 주요 대학 자연계 논·구술 시험을 분석한 결과 논술전형 전체 368개 문항 중 357개 문항이 정답이 정해져 있고 풀이과정을 나열하도록 한 ‘본고사형’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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