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때부터 자퇴 속출…“고2 여름방학 지나면 수포자 70%”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내신 관리하느라 학교 축제 때를 빼고 1년 365일이 지옥 같다.”
서울 지역 고교 1학년 ㄱ양(16)은 “방학 때도 학원 특강을 들어서 내신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ㄱ양은 아직 1학년이지만 2학기가 시작한 뒤부터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ㄱ양은 “선생님들께서 그 성적 그대로 3학년 때까지 이어진다고 하니 더 걱정”이라고 했다. ㄱ양의 학교에서는 한 학기 만에 자퇴 학생이 속출했다. ㄱ양은 “대학 입시가 문·이과 통합 과정으로 바뀌기 전에 일찍 자퇴하고 수능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는 아이도 있다”고 전했다.
상대·절대 오간 내신 제도
고등학교 내신이 대학 입시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대입 때부터다. 처음에는 상대평가 방식으로 과목별이 아닌 전 과목 총점 석차에 따라 등급이 결정돼 15등급으로 나뉘는 종합등급제였다. 1988년에는 15개이던 등급을 10개로 줄였다. 학생을 서열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김영삼 정부는 1996년 절대평가 방식을 도입했다. 전 과목이 아닌 수·우·미·양·가 교과별 성취도를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자 다수의 학생이 ‘수’를 받는 ‘성적 부풀리기’ 문제가 불거졌다.
노무현 정부는 시험 점수가 아니라 비율에 따라 내신이 결정되는 상대평가 9등급 ‘과목별 석차 등급제’를 도입했다. 4%는 1등급, 11%는 2등급, 23%는 3등급, 40%는 4등급, 60%는 5등급, 77%는 6등급, 89%는 7등급, 96%는 8등급, 100%는 9등급을 받는 현재 방식이다. ‘성적 부풀리기’를 막아 학생부의 신뢰도를 높여, 사교육보다 학교 교육에 집중하게 하겠다는 의도였다.
변별력 위해 ‘수포자’ 양산
학교 교육의 집중도를 높이겠다는 내신 9등급제의 의도는 좋았으나 학교 시험은 점점 어려워졌다. 문제를 쉽게 내 만점자가 많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간 석차’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중간 석차는 ‘석차+{(같은 석차 명수 - 1) / 2}’로 계산한다. 학생 수가 100명일 때 수학 과목에서 만점이 7명 나오면 모두 1등급을 받지만, 만점자가 8명 나오면 모두 2등급을 받는다. 서울 목동의 학원 관계자는 “1등급 학생들이 나오게 하기 위해 시험 문제를 어렵게 내니 중하위권 학생들은 아우성칠 수밖에 없다”며 “2학년 여름방학이 지나면 70%가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된다”고 말했다.
어려운 학교 시험에 적응하기 위해 중하위권 학생들은 물론 상위권 학생들도 고액 과외를 받거나 학원을 찾는다. 학원에서는 학교 시험 기출문제와 난도가 높은 문제만 모아 수업을 진행한다. 중하위권 학생들은 유형별 문제에 숫자만 바꿔서 문제풀이를 연습한다. 학원 관계자들은 “문제 푸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현재 내신 평가의 70% 이상이 지필 평가다. 문제 대부분은 객관식이고, 주관식이라 해야 단답형이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2국장은 “채점 시비가 붙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논술·서술형 문제에서조차 국어 같은 경우 특정 문단 문장을 그대로 쓰는 수준으로 출제하고 있다”고 전했다.
적성·희망 아닌 내신이 우선
해를 거듭할수록 대입에서 수시모집 비중은 커지고 있다. 수시에서 내신 위주인 학생부교과전형뿐 아니라 학생부종합전형·논술전형 등에도 내신이 포함되기 때문에 이전보다 내신 비중도 커졌다.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소질이나 적성, 진로 희망에 따라 대학이나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신에 맞춰 학교나 학과를 선택한다.
김진우 좋은교사운동 대표는 “비교과 부분을 준비해야 하는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친구들과 3년 내내 내신 경쟁을 해야 한다는 압박도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고교 교육 정상화하려면…'절대평가'가 열쇠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학교 교육 정상화는 ‘내신제도 정상화’와 같은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행 내신제도는 객관식 문제풀이 위주의 시험으로 성적을 평가한다. 시험에서의 변별력이 교육의 최우선 과제가 되다 보니 창의적인 교육은 멀어진다. 상대평가로 학생들 등급을 나누고, 어려운 문제로 높은 등급의 학생들을 골라내고, 성적 시비를 피하기 위해 수백 명이 똑같은 객관식 문제들로 평가받는 체제다. 이런 상황에선 교사들이 창의적인 교수법을 개발해 아이들에게 맞는 수업을 할 수 없고, 수업은 획일화·하향평준화할 수밖에 없다.
‘교사별 평가’로 창의적인 수업을
교육계에서는 문제풀이식 수업을 벗어나 창의적으로 수업을 운영하려면 ‘교사별 평가’를 도입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늘 관찰하는 교사들은 가장 좋은 평가자다. 그러니 교사마다 평가방식을 만들어 수업과 평가를 모두 자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현재는 시·도교육청에 따라 ‘수행평가’에서 교사별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지필평가는 ‘교사 간 공동출제’를 하게 돼 있다. 교육부에서도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수차례 교사별 평가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나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교사별 평가에 대한 학생·학부모들의 불신 우려가 크고, 내신을 절대평가화하는 문제와도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부 혁신학교에서 시도한 적이 있지만 교사들에게 온전한 평가권을 주지 않아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왔다.
‘내신 절대평가’가 선행돼야
교사별 평가가 정착하려면 ‘내신 절대평가’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지금 같은 9등급제 상대평가를 그대로 두고 교사별 평가를 도입하면 평가 결과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 있다. 정부는 내년 8월까지 1년간 대입정책포럼(가칭)을 구성해 내신 절대평가와 고교 체제 개편, 대입정책 등을 검토한 뒤 종합적인 대입 개혁안을 발표한다. 문재인 정부가 공약한 정책 중에는 ‘고교학점제’도 들어 있다. 학생들이 소질이나 적성, 진로에 맞게 수업을 선택해 듣는 제도다.
고교학점제를 위해서도 내신 절대평가는 필요하다. 상대평가를 하면 어떤 과목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성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교 현장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이 듣는 물리나 경제는 중하위권 학생들의 기피 과목이 될 것이고, 수강생이 적은 과목에서는 1등급을 받기 어려워지거나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수강생이 많은 과목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절대평가를 하면 과거처럼 내신 부풀리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이를 보완하는 장치의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대학들과 비슷한 ‘5등급 상대평가’다. 김진우 좋은교사운동 대표는 “과목별 평가 집단이 크면 1등급 학생의 숫자도 늘어나지만 교사별 평가를 하면 평가집단 자체가 줄어드는 문제가 있다”며 “내신 절대평가로 간다는 전제 아래 과도기적으로 5등급 상대평가를 도입하면 고교학점제 체제에서도 교사별 평가를 시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대평가로 변별력을 유지하되 교사별 평가로 시험의 질은 높이자는 것이다.
변별력 높일 ‘성취 코드’ 등 제안도
변별력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과 내신 절대평가 문제의 핵심 이슈다. 일각에서는 과목별로 ‘성취 코드’를 세분화하면 절대평가로도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국어 과목 안에서 쓰기·말하기·협업·지필평가 등 7~8개 분야를 나눠 성취도를 평가하는 방식이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2국장은 “교육적으로는 점수나 석차가 아닌 성취도를 학생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맞지만 입시에서 변별력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다”며 “성취 코드를 두면 대학이 7~8과목을 반영하면서 50~60여개의 성취 코드를 다루는 셈이 되니 변별력이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내신 절대평가를 도입하면 국제고·외고 등 특수목적고(특목고), 자율형사립고(자사고)와 일반고 학생들 사이에 불균형이 더욱 커질 것이란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이범 교육평론가는 “특목고·자사고 학생들에게 다소 유리해지는 면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다수의 학생들을 위해 학교 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절대평가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목고·자사고는 내년부터 그간의 특권이었던 ‘학생 우선선발권’이 없어지고 일반고와 동시에 신입생을 선발하게 될 예정이다.
고교 3년 내내 내신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현재 체제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대학 입시에서 3학년 내신만 반영하자는 의견도 있다. 김진우 대표는 “한 학기에 여러번 객관식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학생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최대한 평가 시점을 뒤로 미뤄 3학년 때 논술이나 발표를 통해 평가하는 방안도 있다”며 “학생들이 1·2학년 때 기본기를 다지는 진짜 공부를 할 수 있고. 1·2학년 성적이 나쁘다고 자포자기하는 게 아니라 패자부활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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