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 최근 세계 최초로 ‘선크림 금지법’이 생겼다. 지난 3일 하와이 주지사는 산호초와 해양생물을 보호하기 위해 유해 화학성분이 들어간 자외선차단제 판매와 유통을 금지한 법안에 서명했다. 법은 2021년부터 발효한다. 그 때부터는 의사의 처방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하와이 해변에서 ‘옥시벤존(Oxybenzone)’과 ‘옥티노세이트(Octinoxate)’ 성분이 포함된 자외선차단제를 쓸 수 없다.
자외선차단제 사용을 금지한 법을 만든 것은 미국에서 하와이주가 처음이지만 플로리다 남부와 멕시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에서도 지방정부들이 비슷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아름답게 펼쳐진 해변을 누비는 사람들이 바른 선크림 때문에 산호초가 죽어가기 때문이다.
산호를 하얗게 죽이는 선크림
선크림으로 불리는 자외선차단제는 유기자외선차단제(유기자차)와 무기자외선차단제(무기자차)로 크게 나뉜다. 그 중 유기자차에 옥시벤존과 옥티노세이트가 쓰인다. 화학적으로 합성된 유기자차는 자외선을 흡수해 무해한 열로 변환해 소멸시킨다. 이와 달리 광물에서 추출한 무기물질을 이용해 만든 선크림은 자외선을 튕겨내고 산란시켜서 차단한다. 무기자차는 화학성분이 적기 때문에 피부가 민감한 사람도 안심하고 쓸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반면 유기자차는 피부가 예민한 사람에겐 잘 맞지 않지만, 크림이 얼굴에 하얗게 뜨는 백탁현상이 없어서 일반적으로 선호된다.
미국에서 한 조사에서는 시판 선크림의 70%에 옥시벤존과 옥티노세이트가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립스틱이나 마스카라, 샴푸 등에도 들어 있다. 배합비율만 잘 지키면 인체에는 해롭지 않다. 그러나 동물에게는 얘기가 다르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바다 생물들은 더 그렇다. 새하얀 선크림이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의 피부 손상을 막아주지만, 몸에서 씻겨나가면 바닷속 산호의 색을 사라지게 한다.
산호는 촉수를 가진 산호충이 모인 군체다. 산호충은 입 부분에 폴립이라는 수많은 촉수가 있어, 그걸로 동물성 플랑크톤을 잡아먹는다. 전 세계 2500여 종에 달하는 산호들은 폴립에 따라 모양과 색이 달라지고, 폴립의 색깔은 그 속에 든 조류(藻類)에 의해 결정된다. 폴립 속에 사는 조류인 주산텔라(Zooxanthellae)는 산호와 공생 관계다. 주산텔라는 광합성으로 얻은 산소와 영양분을 산호충에게 공급하고, 산호충은 서식 장소를 내주는 것이다. 산호가 얕고 따뜻하며 맑은 바다에서 사는 이유도 공생 조류가 광합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이 나빠져 생존에 위협을 받으면 산호충이 폴립 속의 조류를 쫓아내는 현상이 발생한다. 산호는 색을 잃고 하얗게 변한다. 산호충은 죽고, 딱딱한 골격만 남는다.
백화현상의 대표적 원인은 수온 상승이다. 엘니뇨 등 이상 기온으로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면 백화현상이 심화된다. 선크림에 들어있는 옥시벤존은 산호의 내분비계를 교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산호에 기형을 초래하고, 성장과 번식에 악영향을 가져와 산호를 하얗게 죽이는 ‘백화현상’을 가속시킨다.
제주 해안에도 연산호와 돌산호
옥티노세이트는 산호 체내의 바이러스를 활성화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하와이대 등 국제연구진이 분석해보니 옥시벤존은 62ppt(1조분의 1)의 농도만으로도 산호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림픽경기장 규격의 수영장 6.5개를 채운 물에 단 한 방울의 옥시벤존을 떨어트리는 것과 같은 농도다. 옥시노세이트의 독성은 105ppt부터 나타났다. 2017년 하와이 마우이 해변에선 옥시벤존이 최대 4252ppt, 옥시노세이트는 최대 1516ppt까지 확인됐다. 연구팀은 해마다 선크림 1만4000톤이 산호초에 닿는 것으로 추정했다.
하와이 주섬의 산호초 56%가 백화현상을 나타내는 등 파괴가 심각한 상황이다. 산호초는 세계의 바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1%에 불과하지만, 해양 동물의 25% 정도가 산호 주변에서 서식한다. 이 때문에 산호초는 바다의 열대우림으로 불린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은 “산호초는 해양 생태계와 인간의 삶에 결정적이다. 해양 생물들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음식, 약물, 관광업 일자리까지 다양한 혜택을 준다”면서 경제적 가치를 연간 300억달러에서 1720억달러로 추산했다.
데이비드 이게 하와이주지사는 “선크림 금지법은 산호초를 보호하고 복원력을 높이는 첫발을 내딛은 것”이라면서 “기후변화, 육지에서 배출되는 유해물질로 인한 오염, 외래종의 침입 등에서 산호초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산호초는 열대나 아열대의 얕은 바다에 산호의 분비물과 골격이 쌓여 형성된 단단한 암초 지대를 말한다. 딱딱한 탄산칼슘성 뼈대를 가진 돌산호가 군집을 이뤄 생기는데 한국 연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표면이 부드럽고 줄기구조가 유연한 연산호가 제주 바다 등 한국 근해에 다양하게 살고 있다. 게다가 필리핀, 대만, 호주 등의 산호초 지대에 사는 그물코돌산호가 2008년 서귀포 해역에서 일부 발견되더니 최근에는 제주 전 연안으로 확대됐다. 기후변화로 제주도 부근이 아열대화하면서 산호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바다에 갈 때 선크림을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날이 멀지 않았다.
한국선 ‘인체안전성’만 따져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선크림의 옥시벤존 함량을 5% 이내로 정해뒀다. 선크림 위해성 심사를 할 때에는 성분별 인체 영향을 확인하고 함량 비율을 정한다. 자외선 차단지수(SPF)의 효능을 검토하고, 임상실험으로 피부발진 등 부작용이 있는지도 살펴본다. 김달환 식약처 연구관은 “위해성 평가를 할 때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평생 써도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비율을 정한다”고 했다. 근래 한국에서 선크림과 관련해 벌어진 논란은 스프레이형 제품의 안전성 문제였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여파로 스프레이 선크림 위해성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환경부가 경고 문구 등 안전 기준을 강화했다.
호주 헤론 섬 부근, 그레이트배리어리프(대산호초)의 일부가 백화현상으로 하얗게 바래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옥시벤존은 스프레이형에 많이 쓰이는데, 해변에서 뿌릴 때 많은 양이 바닥에 떨어져 더 해로울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국내에선 산호초보다는 ‘인체영향’만을 기준으로 심사를 한다. 식약처 김달환 연구관은 “수출시장인 미국의 규제 동향은 계속 파악하고 있지만, 선크림의 경우 아직 인체 위협 외에 다른 부분까지는 살펴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미세플라스틱’에 대해서는 2017년 사용을 금지한 전례가 있다. 각질제거제, 치약, 치아미백제 등에 쓰이는 미세플라스틱은 해양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꼽히며 ‘죽음의 알갱이’로 불린다.
산호의 생명까지 고려한다면 어떤 선크림을 발라야 할까. 무기자차가 상대적으로 낫다. 산화아연이나 이산화티타늄 같은 성분이 들어있는 제품이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논나노(Non-Nano)’ 제품을 골라야 한다. 논나노 제품은 입자가 피부 틈새보다 커서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백탁이 심하지만 산호 걱정 없이 안심하고 쓸 수 있다. 100nm(10억분의 1미터)보다 작은 물질은 산호가 흡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크림의 주성분으로 허가받은 성분이 미국은 17개인데 한국은 30개다. 국내에는 선크림의 종류가 많고 자외선 차단물질의 종류도 다양해 대체재가 많은 편이다. 화장품정보 앱만 봐도 전체 화장품 10만여개 제품 중에 옥시벤존을 포함한 제품은 573종이고 그중 선케어 제품이 70종이다. 옥티노세이트가 들어있는 것은 1만2735종이고, 이 중 선케어 제품은 2184종이다. 외국에선 친환경을 표방하는 선크림에 ‘옥시벤존 프리(Oxybenzone-Free)’나 ‘옥티노세이트 프리(Octinoxate-Free)’라 표기를 한다. 논나노(Non-Nano Titanium Dioxide & Zinc Oxide) 표시도 강조돼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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