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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

[뉴스 깊이보기]'민주적 결정' 명분에 묻힌 '환경공약' 파기 책임...신고리 공론화위 '숙의민주주의 실험'에 가린 것

신고리5·6호기 공론화를 위한 시민참여단이 지난 13일 천안 계성원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열리는 공론화 종합토론회 개회식에 참석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신고리5·6호기 공론화를 위한 시민참여단이 지난 13일 천안 계성원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열리는 공론화 종합토론회 개회식에 참석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석 달 동안 이어진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활동은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정책을 결정하는 ‘숙의민주주의’ 실험이라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숙의를 통한 민주적 결정에서는 대표성을 지닌 시민들이 판단을 내기 전에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쌓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

작게는 원전 공사 재개부터, 크게는 에너지 정책의 전환이라는 주제를 놓고 진행된 이번 실험은 의미가 컸지만 적잖은 숙제를 남겼다.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 ‘시민들의 의견’이라는 이유로 폐기될 때 정책의 책임성이 사라지는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한다. 환경 문제처럼 ‘미래 세대를 위한 가치’가 공론화 과정에서 현재 세대의 이익에 밀리게 된다는 점은 더욱 근본적인 한계로 꼽힌다.

■‘공론’이 밀어낸 대통령 공약 

월성 1호기를 폐쇄하고 신고리 5·6호기의 공사를 중단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었다. 하지만 공론화위는 ‘공사 재개’로 결론을 내렸고, 지키지 못할 공약의 책임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염형철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22일 “공론화 과정에서 정부는 신고리 5·6호기 중단이 탈핵단체들만의 과제인 듯 ‘기계적 중립’을 고수했다”며 “정부 여당은 자신들이 내세운 공약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했어야 했고, 그러지 못한다면 정치권이 함께 중립을 지키도록 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여당이 공약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파기할 경우 진심 어린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론화위 결론이 즉각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정부도 공사 중단 혹은 재개 행정명령의 주체는 정부임을 강조했다. 이날 청와대 관계자는 “국가가 결정할 문제를 시민에게 넘기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 공론화위는 국가가 갈등 당사자인 사안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약이 무산된 데 대해 정부가 시민참여단에 책임을 미루는 모양새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대의민주주의 정치가 책임을 회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며 “의사결정 과정의 한 방식으로 숙의민주주의를 선택하는 것일 뿐, 대통령과 주요 정당이 책임 소재에서 비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미래 세대 목소리도 반영해야” 

“공론화위원회의 건설 재개 권고안은 미래 세대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아 불합리하다.” 이날 오후 ‘진짜 탈핵을 원하는 미래 세대와 미래 세대를 존중하는 어른들’은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주장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성주군(15)은 “원전사고가 나면 피해 보는 것은 지금의 청소년들”이라며 “청소년도 사회 참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결과로 건설 재개를 권고한 지난 20일 한수원 새울본부 직원이 울산시 울주군 신고리5,6호기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 울산/강윤중 기자

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결과로 건설 재개를 권고한 지난 20일 한수원 새울본부 직원이 울산시 울주군 신고리5,6호기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 울산/강윤중 기자

‘숙의’를 전제로 하더라도, 원전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서는 미래 세대의 불이익이 간과되기 쉽다. 환경단체들과 전문가들은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서 정작 환경이라는 어젠다는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이고, 이번에도 결국 그런 일이 반복됐다고 지적한다.

이번 공론화위 참가 자격은 19세 이상 성인들로 제한됐다. 염 사무총장은 “미래 세대나 생태계의 손해가 없을 수 없는 사안인데 공론화 과정은 현 세대 사람들 간 합의에 한정되게끔 설계됐다”고 지적했다.

에너지 정책처럼 큰 이슈를 다루기에는 3개월의 공론화 기간이 짧았다는 의견도 있다. 공론화위에 참여했던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원전 이슈는 너무 오랫동안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며 “오랜 기간 값싼 전력을 쓰는 것에 익숙해진 이들이 한순간에 ‘삶의 현주소’를 바꾸는 결정을 하기는 어렵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가능성’ 보여줬지만 세밀한 설계 필요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숙의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공사 재개’ 찬성 비율이 1~4차 조사를 거치면서 높아졌던 만큼이나 원전을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도 회차를 거듭할수록 높아졌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전문가들의 견해와 정보를 접하면서 원전 정책에 경제적·환경적인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강화된 것”이라며 “그동안 의사결정에서 배제돼 온 국민들의 정보와 이해가 깊어진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염 사무총장은 “결정이 어떠하든, 당위적으로 시민의 결정은 무조건 옳다”며 “다만 탈원전 논의는 기존 가치체계와는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치나 윤리적인 측면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논의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