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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돈 벌기

고용 불안하면 우울증 위험 높아져…"정규직도 예외 아냐"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김영민 기자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김영민 기자

일자리가 불안정하면 우울증 발병 위험이 뚜렷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도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상당했고, 이는 우울증으로 이어져 건강을 해쳤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놓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굳어지는 가운데 훨씬 큰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에는 이런 환경이 더욱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추론이 나온다.

13일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와 김유균 연구원이 발표한 ‘차 판매직원들의 직업 불안정성과 우울증: 한국에서의 종적 연구’ 논문을 보면 이 같은 내용이 잘 드러난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판매직원 560명의 건강 상태를 7년의 시차를 두고 추적해 보니 일자리가 불안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우울증 발병 위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았다. 사회역학자인 김 교수 연구팀은 그간의 연구와 저작을 통해 증명했듯이, 이번에도 질병이 개인적 문제만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논문은 이번달 미국산업의학저널에 실렸다. 

연구진은 직업 불안정성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2007년과 2014년 현대차 판매직원을 대상으로 실시된 노동 조건 및 건강 실태 조사 결과를 비교분석했다. 우선 두 차례 조사에 모두 성실하게 응답한 560명을 추려내고 이들을 네 그룹으로 나눠 7년 뒤의 변화를 살폈다. 2007년에도 2014년에도 일자리가 안정됐다고 느끼는 사람, 전에 불안했지만 후에 안정됐다고 느끼는 사람, 전에 안정됐다고 느꼈지만 후에는 불안을 느끼는 사람(안정→불안정), 전에도 후에도 일자리가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사람(불안정→불안정)이다. 

그룹별 분석 결과를 비교하니 차이는 뚜렷했다. 2014년에 우울증을 앓는 경우는 일자리 불안이 높을수록 잦았다. 전에도 후에도 일자리가 안정됐다고 느끼는 사람이 우울증을 앓게 될 위험을 1이라고 볼 때, ‘안정→불안정’ 그룹은 이 위험이 2배 가까이(1.97) 높아졌고, ‘불안정→불안정’ 그룹은 3배 가까이(2.74) 높았다. 반면 일자리가 전에 불안정했다가 이제는 안정됐다고 느끼는 사람의 경우 우울증 위험이 1.39배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는 조사 대상자들이 원래 겪던 우울증이나 흡연, 음주여부 등은 모두 통제하고 비교한 수치다. 

연구팀은 “만성적인 일자리 불안이 한국의 차 판매직원들에게도 우울증 발병 요인이 돼 건강을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냈다. 김승섭 교수는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고용불안은 비정규직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라며 “흔히 고용불안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고임금·정규직 노동자들도 고용 불안을 느끼고 있고 또 그 불안이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고용이 더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이런 영향이 더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자리 불안이 장기적으로 정신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지만, 추적 관찰 연구 데이터를 분석하여 수치로 이를 뒷받침하는 결과가 나온 것은 국내에서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팀이 분석한 설문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연구소)가 현대차 판매직 노동조합의 의뢰를 받아 2007년과 2014년에 실시한 것이다. 연구소는 현대자동차가 1998년 판매직원을 절반 가까이 해고하고 대신 대리점을 양산한 이후, 직원들의 직무 스트레스와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자 2007년부터 관련 조사를 시행했다. 

모두 정규직인데도 첫해 조사에서 “나의 직업은 실직하거나 해고당할 염려가 없다”고 답한 사람은 21%에 불과했다. “앞으로 2년동안 현재의 내 직업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근무조건이나 상황에 구조조정 등 바람직하지 못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문항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도 많았다. 연구소는 경제위기 때 있었던 정리해고의 경험이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만성적 불안감을 주고 있으며, 판매직원들의 경쟁은 심해지고 업무는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백화점·마트 직원 16% “주 52시간 이상…대부분 서서 일해”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으나 백화점·면세점·마트 노동자는 여전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13일 국회에서 열린 ‘유통서비스 노동자 건강권·휴식권 보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 토론회’에서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올해 8~9월 전국의 유통매장 서비스 판매직원 220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이들 가운데 16.3%가 ‘주당 52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고 답변했다”고 밝혔다. 특히 백화점 등에 직접 고용되지 않고 입점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주 6일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긴 시간 서서 일하고 제때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통에 질병을 얻는 경우도 많다. 조사결과 전체 응답자 4명 중 1명(24.1%)은 디스크 질환을 갖고 있다고 답변했다. 또 22.2%가 족저근막염을, 18.2%가 방광염을, 17.2%가 하지정맥류를 앓았다. 응답자 절반(50.6%)은 아파도 나와서 일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정민정 민주노총 마트산업노조 사무처장은 “일부 마트 계산대에 의자가 설치돼 있지만 눈치가 보여 앉지 못한다고 한다”며 “의자가 있어도 계산대와 높이가 맞지 않아 현실적으로 모두 서서 일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한 백화점 노동자는 토론회에서 “가임기 판매사원들이 하루 10~12시간 서서 일하면서 난임과 불임을 겪고 심지어 유산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대형마트는 매달 2회 의무 휴업을 하지만 백화점은 1회 휴점을 선택적으로 한다. 면세점은 쉬는 날이 없고, 백화점은 명절과 크리스마스 등 성수기에 대부분 연장영업을 해 노동자들의 휴식이 보장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결과 유통업 노동자의 휴무일은 월 평균 8.4일이었지만, 주말 휴무일은 3일 정도에 그쳤다. 응답자의 74.7%는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토론에 참여한 양창영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대기업은 의무휴일제 등 규제를 풀라면서 소비자의 선택권을 강조하지만, 우리 사회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