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이는 어릴 적 어떤 아이였나요?”
“글쎄요. 딱히 특이하진 않았는데…. 한 배에서 태어난 둘 중에 형이었는데 그냥 활발한 정도였어요. 그렇게 사고뭉치가 될 줄은 몰랐죠.”
새 학기 학부모 면담 같은 대화가 이뤄진 곳은 지난 12일 경남 거창군 가조면의 한 카페였다. 반달가슴곰 KM-53의 파란만장한 ‘웅생(熊生)’을 지켜본 김정진 종복원기술원 남부복원센터 팀장(37)과 만남은 경북 김천의 수도산 자연휴양림에서 시작됐는데, KM-53의 신호를 좇다보니 경상남북도의 경계를 넘었다. 지난달 27일 수도산에 방사된 이 곰 한 마리를 담당하는 종복원기술원 직원만 10명. 이들은 수도산을 무대로 KM-53과 ‘거대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 띠-띠-띠 신호음 멈추면 ‘비상’
12일 오전 수도산자연휴양림에서 거창군의 가북저수지를 네비게이션에 찍었다. 곰의 귀에 발신기가 달려 있어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직선거리로 12㎞ 정도 떨어진 지점인데 막상 차량으로 이동하려니 43㎞가 떴다. 곰은 능선 하나를 넘었을 뿐이지만 사람은 수십㎞를 돌아가야 한다. 정오가 다 돼서 전화벨이 울렸다. “신호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도착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은데요.”
김정진 팀장의 차꽁무니를 좇아 도착한 곳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거창군 중촌리 고비마을. 마을 어귀부터 ‘반달가슴곰 출현주의’라고 쓰인 작은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정작 차에서 내리자 곰의 터럭조차 보이지 않는다. 맞은편 임도로 SUV 차량 한 대가 내려왔다. 이날 KM-53의 주간 모니터링 당번인 소민석 팀장과 강경훈 연구원이었다.
“곰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아니예요. 곰이 사람이랑 만나면 안돼요. 야생동물이니까.” 종복원기술원 자연적응훈련장부터 곰들은 사람과 철저히 차단된다. 자연에 적응해 살아가려면 사람의 손을 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모니터링도 곰이 제대로 활동하는지를 확인하는 것뿐이지, 가까이 다가가 직접 관찰하는 작업이 아니다.
강경훈 연구원이 무전기처럼 보이는 수신기를 한 쪽 귀에 대더니 빨래건조대처럼 생긴 안테나를 들고 허공을 가로저었다. 곰에 부착된 발신기 신호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수신기를 귀에 대니 띠-띠-띠 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평소에는 분당 45회씩 수신음이 나는데 한 곳에서 신호가 오래 잡히면 속도가 90회로 빨라진다. 안테나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기자 신호음이 점차 강해졌다. 신호가 강해지는 방향이 곰과 가까운 곳이다. 지도로 주변 지형을 확인하면서 다른 장소로 옮겨 신호를 확인한다. 세 곳에서 위치를 확인하면 각 지점이 교차하는 중점을 잡아서 곰의 위치를 추정한다.
GPS 신호를 받아 태블릿PC에 자동으로 지도가 입력되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아직 그러기는 힘들다. 산지에서는 수신율이 20% 이하로까지 떨어지기 때문이다. 전파수신기도 2~3㎞ 안에서나 신호를 잡을 수 있다. 곰이 장애물 뒤에 있거나 산 능선을 넘어가면 신호가 끊긴다. 그때부턴 모니터링팀이 부지런히 곰의 신호를 찾아 옮겨 다녀야 한다. 금방 확인되면 다행이지만, 신호음이 끊어지는 시간이 길어지면 ‘난리’가 난다. 당번 조에 더해 대기조가 투입되고, 그래도 못 찾으면 주변 권역에서도 투입돼 10개 조가 산을 누비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곰 KM-53은 2015년 1월 전남 구례군에 있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에서 태어나 그해 10월 지리산에 방사됐다. 별 탈 없이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지난해 6월 지리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90km를 이동해 수도산에서 포착됐다. 환경부는 곰과 주민들의 안전을 우려해 두 차례나 잡아다 지리산에 풀어놨지만, 자꾸만 수도산으로 향했다. 지난 5월 세 번째 이동에선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에서 버스에 부딪쳐 복합골절상을 당했다. 12시간에 걸친 대수술과 재활과정을 거쳐 아예 수도산에 풀어주기로 결정났다. 현재는 수도산에서 가야산 일대를 하루 3~5㎞ 오가며 서식지를 탐색하고 있다.
지리산은 어디에 꿀통이 있고 어디에 열매가 많은지 연구원들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지만, 수도산은 낮선 영역이다. 그래서 매일 곰을 추적하며 서식 지도를 만들고 있다. 소민석 팀장은 “근무자들은 곰의 실마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간다”면서 “반달가슴곰이 수도산으로 활동권을 늘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대응하는 사람에겐 일일이 점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라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 봄에는 나물, 여름에는 과일
“곰? 뭐가 무섭나? 아휴, 무슨 곰이 내려온다꼬. 보름 전인가 풀어준다고는 들었는데 별로 신경 안 쓴다.” 고비마을에서 만난 서명자 할머니(73)의 말이다. 기본적으로 야생동물은 사람을 꺼린다. 드물게 마주친 경우 사람만큼이나 곰도 놀라기 때문에 자극하지 않으면 알아서 사라진다. KM-53은 현재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곰은 야행성이라고들 하는데 실제로는 낮에도 제 맘대로 다닌다.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쉬고, 졸리면 자는 것이다.
KM은 ‘한국의 수컷 곰(Korea Male)’, 53은 관리번호를 뜻한다. 방사 전 체구를 잴 때 길이 161㎝, 체중 110㎏였다. 나이는 4살, 사람으로 치면 갓 스무 살을 넘긴 셈이다. 한창 호기심이 많고, 성에 눈을 뜨는 시기다. 지리산 탈주 시도 때문에 ‘모험왕’ ‘탈출왕’ ‘콜럼버스’ 따위의 별명이 있다. 형제인 KM-54도 호기심이 많았는지 사람들 눈에 자꾸 띄고, 민가에서 피해 신고가 들어와 현재는 거둬들인 상태다. 민가의 창고에서 매실이나 오미자 효소 항아리를 뒤지는 경우가 많다.
곤충이나 물고기도 먹는 잡식성이지만 먹이의 대부분은 식물이다. 봄에는 산나물, 여름에는 산딸기·머루·다래·오디 같은 열매,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로 먹는다. 울창한 수도산은 참나무가 많아 반달가슴곰이 살기 좋다. 요즘 좋아하는 먹이는 달콤한 다래. 곰에게는 여름철이 ‘보릿고개’다. 과실을 못 찾으면 묵은 도토리나 밤을 주워먹고 고지대를 돌면서 조릿대의 늦게 나온 순을 먹는다. 지난해 수도산에서 시민들이 둔 초코파이와 팩음료를 먹는 모습이 포착돼 화제가 됐지만 똥을 분석해보니 99%가 오디였다. 초코파이는 호기심에 한번 씹어봤을 뿐이다. 하지만 자칫 인간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있어 포획된 후 음식물 기피 훈련을 받아야 했다.
왜 자꾸만 수도산으로 갔을까. 김정진 팀장은 몇 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3~4살이면 혈기왕성하고 제일 호기심이 많을 때입니다. 야생의 냄새를 따라 이동했을 수 있죠. 지리산에는 어른 곰들이 자리잡고 있으니 밀려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생태계에서는 한 가지 원인만으로 나오는 결과는 없으니 복합적으로 봐야죠.”
사실 비슷한 시기에 지리산을 벗어난 곰은 또 있었다. 지난 6월 불법으로 설치된 올무에 걸려 숨진 채 발견된 KM-55다. 이 곰도 홀로 섬진강을 건너 광양 백운산에서 활동했다. KM-53도 황천길 문턱까지 다녀왔다. 5월 사고 때 시속 100㎞로 달리던 고속버스에 부딪쳤다. 하지만 사고 뒤에도 걸어다녔고 왼쪽 앞다리만 부러졌다. 곰이 워낙 튼튼해서가 아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온 몸으로 차량에 부딪쳐 충격이 분산된 덕분이었다. ‘똥’ 때문에 살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차에 부딪쳤을 때 곰이 똥을 쏟으면서 충격을 바깥으로 배출했다는 것이다. 김정진 팀장은 “놀라서 계속 움직이다가 픽 쓰러진 것을 구조했는데,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 이제는 ‘마주치지 말자’
곰은 곡절 끝에 ‘거주 이전의 자유’를 얻었지만, 사람들에게는 큰 고민거리를 던졌다. 반달가슴곰 복원 정책의 방향 자체가 바뀌게 된 것이다. 2004년 첫 방사를 시작하면서 환경부는 2020년까지 개체군을 50마리까지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2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했고, 현재 55마리가 지리산 야생에서 살고 있다. 반달가슴곰의 평균수명 20~25년과 앞으로의 출산을 고려하면 2027년에는 100마리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지리산이 수용가능한 개체수 78마리를 훌쩍 넘는 것이다.
KM-53의 모험은 ‘개체중심 관리’에서 ‘서식지 관리’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기점이 됐다. 곰과 인간의 안전한 공존을 위해 지역사회와 협력도 강화한다. 종복원기술원 직원들은 곰만 쫓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홍보와 교육도 해줘야 한다. 문광선 종복원기술원 남부센터장은 단순히 곰 한 종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 전체 생태계를 복원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한다.
“반달가슴곰은 지리산 생태계를 대표하는 ‘깃대종’입니다. 사라졌던 곰이 정착해서 살 수 있면 생태계도 과거처럼 건강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어떤 분은 곰 때문에 지리산을 못가겠다고 하시는데, 사람들이 그 산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 때문이잖아요. 그 자연에 곰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 멸종위기를 맞은 것이고요. 지리산에 누가 더 오래 살았는지, 진정한 지리산은 어떤 모습인지 한 번 생각해 봐도 좋지 않을까요.”
겨울을 앞둔 곰들은 가을철 매일 2만㎉를 먹어치우며 몸무게를 20~30% 늘린다. 이제 KM-53은 수도산에서 첫 겨울나기를 준비해야 한다. 아마도 다른 곰들처럼 본능적으로 나무 꼭대기에 ‘상사리’를 만들어 뒹굴고, 겨울잠을 자기 위해 아늑한 ‘탱이’도 만들게 될 것이다. 상사리는 나무꼭대기에 가지를 꺾어 만든 둥지를, 탱이는 으슥한 곳에 풀과 나무줄기를 모아 만든 둥지를 가리킨다. 해가 바뀌면 암컷을 찾아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백두대간을 따라 다른 산으로 향할 수도 있다. 환경부는 이 곰의 갈길을 막지 않을 계획이다. 이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고 말하려면 올 겨울을 보내고 사계절은 지켜봐야 한다.
김정진 팀장은 이 곰을 ‘케이엠오십삼’ 혹은 ‘오십삼번’으로만 불렀다. 반려동물이 아닌 야생동물으로 대해야 하기 때문에, 애정을 감추고 일부러 거리를 둔다. 김 팀장이 KM-53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인사는 노래 제목처럼 ‘마주치지 말자’였다.
“수도산에서 발견됐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우리 곰이 아닌 줄 알았어요. 어떻게 지리산 곰이 거기까지 가나 한 거죠. 다시 지리산에 풀어주면서도 반신반의했죠. 또 가는 거 아니야? 진짜 가더라구요. 두 번째 잡을 때는 솔직히 현장 직원들은 ‘이걸 왜 잡아야하나’ 했습니다. 이번에 수도산에 풀어주면서 든 생각은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마주쳐도 일 년에 한 번만 만나자’(웃음). 사고 쳐서 돌아오지 말고, 1년에 한 번 발신기 교체할 때만 보자는 거죠. KM-53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반달가슴곰 KM-53은 18일 현재 수도산 자락을 오가며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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