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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삶

“칼 안 들게 만들기보다…” 몰카 피해 방지 토론회 열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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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ㄱ씨는 어느 날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ㄱ씨가 전 남자친구 ㄴ씨와 성관계를 하는 영상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ㄱ씨는 보름 동안 퇴근한 뒤 집에 와 P2P 사이트 등을 검색한 결과 자신이 나오는 영상을 찾아냈다. ㄱ씨는 동영상 삭제 업체에 영상 삭제를 문의했다. 한 달에 수백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한 달 계약은 안 되고 최소 3개월은 계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ㄱ씨는 직접 발로 뛰기로 했다. P2P 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를 찾아 삭제 요청을 했다. 그 결과 삭제는 됐지만, 얼마되지 않아 또 다시 자신의 영상이 업로드됐다. 제목도 여러차례 바뀌었다.

일단 영상을 빨리 지우고 더 이상 유포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중요했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알게 될까봐 경찰에 신고하기도 쉽지 않았다. ㄱ씨는 밤새 P2P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영상을 찾고 지웠다.

그 결과 ㄱ씨의 생활은 엉망이 됐다. ㄱ씨는 동창들과 연락을 끊고, 누가 내 동영상을 보고 알아볼까 집 밖에 나가는 것도 꺼려졌다. 특히 회사 동료들 중에서 누가 자신의 영상 얘기를 꺼낼지 매일 불안에 시달렸다. ㄱ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도 했다”고 전했다. 

최근 전자상가 등에서 팔리고 있는 이동식저장장치(USB)·만년필형 몰카 제품. 자료사진

최근 전자상가 등에서 팔리고 있는 이동식저장장치(USB)·만년필형 몰카 제품. 자료사진

ㄱ씨는 정확히 말하면 몰래카메라, 일명 ‘몰카’ 범죄 피해자는 아니다. 전 남자친구와 동의 아래 영상이 촬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이 불법적으로 유통돼 ㄱ씨가 겪고 있는 피해는 여느 몰카보다 심각하다. 몰카 피해와 ㄱ씨의 사례 등을 모두 포함한 개념을 ‘불법촬영물에 의해 피해’라고 한다. 이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것이 있는지 토론회가 열렸다.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조달청 PPS홀에서 여성가족부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공동으로 연 토론회의 부제는 ‘신기술 등을 활용한 피해방지 방안 중심’이었다. 스마트폰 무음 촬영 앱은 물론 단추·안경·볼펜·라이터·USB·보조배터리 등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위장되고, 소형화되는 카메라가 불법촬영물에 의한 피해를 늘린다는 취지였다. 

발제를 맡은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권익·안전연구 실장은 몇가지 정책 제안을 했다. 사진이나 동영상 등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특정 앱이나 기기 등으로 식별 가능한 ‘디지털 지문’을 남겨 촬영자를 추적하는 방안, 촬영할 때 불빛·소리 등으로 촬영 사실을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방안, 단추 카메라 등 변형카메라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 등이었다. 

그러나 토론회에 참석한 휴대전화 제조사 측은 난색을 표했다. 김병철 삼성전자 수석은 “제조사에서 소리가 나도록 강제하자 프리뷰(사진 촬영 전 보이는) 화면에서 캡처하는 방식으로 우회하는 형태의 앱들이 계속 나오는 등 제조사가 아무리 제한을 가하더라도 실효를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촬영자의 흔적을 남기는 ‘디지털 지문(워터마크)’과 관련해서 최근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서 한번 클릭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촬영하는 연사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현실화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김 수석은 “해외 휴대전화의 경우 초당 100장을 촬영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며 “디지털 워터마크는 (성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고 말했다. 이병빈 LG전자 부장은 “휴대전화 앱은 ‘오픈 소스’(누구나 앱 개발을 할 수 있는 형태)라 무음 앱을 막을 수 없다”며 “일본과 한국에서만 촬영음을 의무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외국에 가서 조용히 촬영하기 힘들다는 불만이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하경주 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신기술 등 촬영기기를 통해 단속하는 것은 한계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정하 소장은 “기술 발전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기기를 논의의 중심에 두면 근본적인 논의를 할 수 없다”며 “칼이 흉기로 쓰인다고 해서 칼이 잘 안 들게 만드는 것보다 흉기로 쓰는 것이 범죄라는 인식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남성들은 ‘내가 몰카 대상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다고 하는데 사실 범죄”라며 “안타깝다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행 법은 촬영으로 성적수치심을 줄 때 처벌하는데, 직장에서 옆 상사가 자신의 일상 사진을 몰래 찍어도 사생활 침해로 규정해야 한다”며 “다른 사람 신체를 몰래 촬영하는 것은 인격권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촬영기기 업체 관계자로 토론에 참석한 신상진 다모아캠 대표는 기기 규제 강화보다 영상이 유통되는 P2P사이트를 모두 차단해야 한다고 했다. 신 대표는 “기술 쪽에 제재를 갖다대면 시장이 음성화되는 등 역효과가 일어날 것”이라며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몰래 찍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서로 동의해서 찍은 영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결국 동영상을 사고 팔아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피해가 커지는 것”이라며 “사이트를 차단하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상임대표는 불법촬영물을 보는 사람들도 처벌해야 실효성 있는 방안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대표는 “결국 수요 차단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며 “몰래카메라인 것을 알면서도 봤다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보는 사람들도 잘못이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날 토론회에서 논의된 의견을 바탕으로 이달 중 ‘디지털 성범죄 피해방지 종합대책’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