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70년이 지나도록 명예회복을 못 했다. 장관께서 저희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
지난 23일 91세로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군자 할머니가 지난 10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을 만나 한 말이다. 김 할머니는 2007년 2월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미국 의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서서 일본군 위안부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을 증언했다. 그 해 7월 30일 미 하원은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그 후 10년, 국제사회는 위안부 문제를 반인도적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움직였다.
미 하원 결의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은 특정 국가,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닌 ‘전쟁시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보편적 인권문제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은 위안부가 아닌 ‘성노예’라 명시했고, 유엔 인권기구들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반인도범죄들의 맥락 속에서 이 이슈를 다뤘다. 정작 이 사안을 ‘일본과 한국의 양자 관계 이슈’로 만들어버린 것은 한국 정부였다. 2015년 말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면서 한국 정부가 더 이상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하자는 일본의 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인 것은 반인도 범죄에 대한 역사적 논의와 평가마저 정치적 협상물로 만들어버린 실책이었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상임대표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윤 대표는 30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위안부나 독도와 관련된 ‘망언’을 하듯, 한국 정부도 국내 정치에서 궁지에 몰리면 독도나 과거사 문제로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정면에 내세웠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서유럽 순방을 앞두고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가 하나도 해결 안 된 상태에서, 일본이 거기에 대해 하나도 변경할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 정상회담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한일 간 갈등을 악화하고, 두 동맹국의 거리를 가깝게 하려는 미국의 압박을 부르고, 결국 일본 입장에 치우친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귀결됐다. 위안부를 ‘강요된 성노예’라 표현하며 일본에 우회적인 압박을 가하던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가, 한일 관계가 악화되자 ‘성적인 목적으로 여성을 인신매매한 문제’로 보는 일본의 입장으로 기울어버렸다고 윤 대표는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한일 합의는 진상 규명과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역사교과서 기록 등 할머니들의 요구를 도외시한 채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임을 못박았다. 윤 대표는 “위안부를 보편적 여성 인권 문제로 인식해야 함에도 한일 간 정치적 거래로, 돈과 정치의 문제로 매듭지으려 했다”며 “미 의회의 노력과 국제사회의 노력을 위협하는 합의였다”고 지적했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도 “인권 문제에서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박근혜 정부가 얼마나 개념이 없었는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대표와 안 소장은 할머니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면 일본 돈 10억엔으로 세운 ‘화해·치유재단’부터 해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이사진이 줄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이 재단은 존폐 기로에 놓여 있다. 또 일본 정부를 움직이려면 미국 등 해외에 평화의 소녀상을 적극적으로 세울 것을 제안했다.
안 소장은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한국 대통령이 얘기해도 움직이지 않는 일본 정부가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 외국에 소녀상이나 기림비가 세워지는 것”이라며 “정부는 국제법을 검토하고 자료를 모으겠다고 하지만 해결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07년 이후 세상을 뜬 피해 할머니들이 90명에 달한다. 지난 23일 기준으로 정부에 등록된 생존 피해자는 37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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