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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

'정상정복형' 등산 때문에... 2000여개 공간으로 쪼개진 한국의 산

토양유실로 뿌리를 잘라버린 나무 (지리산) | 녹색연합 제공

토양유실로 뿌리를 잘라버린 나무 (지리산) | 녹색연합 제공

풀 한포기 없는 허허벌판 산꼭대기, 해발 1520m의 돈가스·소머리국밥 식당, 수백명의 등산객이 밟은 탓에 잘라내 버린 나무뿌리…. 

한국의 산악형 국립공원이 탐방객의 ‘정상정복형 등산’을 위한 탐방로를 마구 설치한 결과 생태훼손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녹색연합이 2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한라산을 제외한 한국의 산악형 국립공원 16곳이 도로와 탐방로 때문에 총 2124조각으로 잘게 쪼개져 있다. 2124개의 공간 가운데 면적이 5㎢ 미만인 경우가 94%에 달한다. 

실핏줄 같은 국립공원 도로·탐방로의 길이를 모두 더하면 서울에서 부산을 직선거리로 3번 왕복 가능한 수준(2327.46㎞)이다. 그나마 등산객들이 스스로 낸 샛길은 뺀 수치다.

북한산과 속리산의 서식지 파편화 상황. 실핏줄 같은 가는 선이 모두 탐방로나 도로다. | 녹색연합

북한산과 속리산의 서식지 파편화 상황. 실핏줄 같은 가는 선이 모두 탐방로나 도로다. | 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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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국립공원은 탐방로와 도로 때문에 산림이 152개 공간으로 쪼개져 있는데 그중 대형포유류가 살아가기에 적합한 50㎢ 이상인 한곳 뿐이다. 5㎢ 이하 공간은 130곳이나 된다. 112개 공간으로 쪼개진 설악산국립공원 역시 50㎢의 면적은 단 1곳 뿐이며 5㎢이하 공간이 100개다.

공간 파편화가 가장 심한 곳은 북한산 국립공원이다. 76.9㎢의 면적이 275개 조각으로 쪼개져 있다. 속리산국립공원의 경우 잘게 나뉘어진 공간 대부분(258개 중 239개)는 5㎢ 미만이다.

풀 한포기 없는 천왕봉 | 녹색연합

풀 한포기 없는 천왕봉 | 녹색연합

한국의 산 탐방로가 길고 복잡한 이유 중 하나는 ‘정상정복형 등산’ 문화 때문이다. 탐방로 대부분은 정상으로 이어져 있다. 

녹색연합은 “지난 50년 동안 국립공원은 탐방객의 이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정상부까지 시설물을 설치해 사람들을 끌어 올렸다”면서 “벽에 가까운 바위를 연결하는 데크와 철사다리, 시설물 등은 구두를 신고도 산 정상부를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녹색연합 측은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처럼 국립공원을 과도하게 이용하는 곳은 찾아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허허벌판인 비로봉 | 녹색연합

허허벌판인 비로봉 | 녹색연합

현재 한국의 산악형 국립공원 정상부는 토양이나 식생이 남아있는 곳이 거의 없다. 등산객들의 ‘답압’(발로 밟으면 가해지는 압력) 때문에 흙이 침식해 노출돼 버린 나무뿌리를 공단 측은 사람들이 더 잘 지나가라고 잘라버렸다. 곤돌라가 설치된 덕유산국립공원의 해발 1520m 설천봉에서는 돈가스, 소머리국밥, 생맥주를 파는 식당이 있다. 북한산국립공원을 오르는 이들은 지난해 기준으로 연간 609만명, 설악산과 무등산은 각각 연간 365만명, 357만명, 지리산은 연간 288만명 가량이다. 

문장대 정상부 속리산 | 녹색연합

문장대 정상부 속리산 | 녹색연합 

등산객들이 정상을 정복하는 산행을 선호하면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이용자 편의’에만 초점을 맞춰 탐방로 개설에 예산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16개 산악형 국립공원의 면적이 2124개 조각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인간은 탐방로가 공간을 가로지른다고 해서 ‘쪼개진다’는 표현이 과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녹색연합은 국내·외 논문을 인용해 “도로와 탐방로로 인한 서식지 파편화는 야생동물의 번식성공률 감소, 먹이섭취능력 감소, 외래종 유입, 로드킬 등을 야기한다”면서 “육식을 하는 야생동물의 국지적 절멸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최상위 포식자의 감소 혹은 절멸은 생태계 군집구조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해발1520m 설천봉에서 파는 돈까스,소머리국밥 등 (덕유산) | 녹색연합

해발1520m 설천봉에서 파는 돈까스,소머리국밥 등 (덕유산) | 녹색연합

실제로 연구결과를 보면, 멸종위기 2급인 담비가 서식하기 위해선 22.3~59.1㎢의 공간이 필요하다. 여우 암컷은 7.17㎢, 환경부가 복원 중인 반달가슴곰은 24~200㎢, 복원을 계획 중인 스라소니는 20~100㎢의 공간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녹색연합은 “아고산대의 고산 침엽수가 지금 눈앞에서 멸종을 맞고 있다”면서 “지난 50년간 이용 중심의 국립공원 정책이 오늘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이제 더이상 개발과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중요한 자연자원의 관점에서 관리돼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