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한 생수 제조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압착기기에 눌리는 사고를 당한 이민호군이 열흘 만인 지난 19일 사망했다. 고등학교 3학년, 이제 겨우 열 여덟이었다. 업체 측은 ‘이군이 정지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작업을 하다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계는 전에도 여러번 고장난 적 있고, 사고 뒤에도 경고음 없이 계속 움직였다. 사고 원인과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직접 조사에 나선 학생들이 있다. 이군처럼 기업체에 현장실습을 나가야 하는 특성화고등학교 학생들이다.
22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이민호군 사건 진상조사 기자회견을 연 것은 ‘특성화고등학생 권리연합회’였다. 특성화고 학생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계기는 지난해 5월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숨진 김모군(당시 19세) 사건이었다. 분명히 학생이지만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기업체에 나가 얼마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착취당하기 쉬운 학생들은 올 7월 구의역에 다시 모여 “제2의 김군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11일에는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평화시장에서 ‘특성화고 학생 권리연합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절반은 학생, 절반은 노동자’인 10대의 희생은 또다시 일어났다.
권리연합회는 이군 사건이 일어나자 제주도에 가서 유족들과 친구들을 만나, 숨진 이군이 어떻게 일해왔고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조사했다. 기자회견에 나선 이상현 권리연합회 추진위원장에 따르면 이민호군은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데다 부모님 건강이 좋지 않아 특성화고인 서귀포산업과학고에 지원한 학생이었다. 부모님도 모르게,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지원했다고 했다.
자연생명과에서 공부하던 이군은 취업에 유리한 지게차 자격증을 땄고, 지난 7월부터 구좌읍에 있는 생수 제조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했다. 공장 기숙사의 시설은 열악했다. 사무실을 개조한 공간에 2층 침대와 탁자가 전부였다. 권리연합회는 “이불도 없고,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식당 아주머니조차 해고되는 바람에 아침은 주로 컵라면을 먹어야 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야근을 해가며 받은 첫월급은 250만원. 고교생에겐 적지않은 돈이다. 100만원을 부모님께 드리고, 매달 100만원은 적금을 들었다. 지난 추석 때도 100만원을 부모님께 드리고, 적금 들고 남은 돈은 주로 친구들을 위해 썼다고 한다. 사정이 어려운 자신을 도와 교통비와 간식비를 내준 중학교 동창들에게 “이제 내가 돈을 버니, 내가 사겠다”고 했던 친구였다.
처음엔 포장된 생수를 지게차로 옮기는 일을 하다가 압착기로 생수 포장하는 법을 배웠다. 일을 배우기 위한 현장실습이라는 것은 명목이었을 뿐, 일을 가르쳐주던 직원은 닷새 만에 그만뒀고 압착기 포장 업무는 이군이 맡았다.
특성화고 학생이 현장실습을 나갈 때에는 학교장과 실습생, 사업주 3자가 ‘표준협약서’를 쓴다. 협약서엔 하루 7시간 이내로 일하고, 실습생이 동의할 때에만 1시간 더 일할 수 있게 돼 있다. 실습생은 야간·휴일 근무를 해선 안 된다. 하지만 협약서는 현장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사업주가 현장실습을 지도할 능력을 갖춘 담당자를 배치해 실습을 성실하게 지도한다’고 규정된 협약서 문구도 지켜지지 않았고, 이군은 압착기로 혼자 일했다. 지난 9월 기계를 고치다가 한 차례 갈비뼈를 다쳐 응급실에 실려가기까지 했던 이군은 아물지 못한 채로 다시 나가 일을 했고, 지난 9일 사고를 당했다.
또래 친구의 죽음이 남일 같지 않은 권리연합회 학생들이 조사한 내용을 보면 업체는 사고 엿새 뒤에 유족을 찾아갔다. 업체는 “이군이 압착기 운전조작반의 정지스위치를 작동하지 않고 설비 내부로 이동했다가 목이 끼이는 협착사고가 일어났다”고 했다. 유족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일하던 이군이, 벨트가 갑자기 역주행해 넘어졌으며 그 때 멈춰있던 압착기가 작동했다는 것이다.
권리연합회는 “사고 때 경고음이 나지 않은 것은 기계가 노후화했기 때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업체 측이 사고 책임을 고인에게만 묻는 것은 모순”이라고 했다. 이들은 “이에 대해 엄격히 조사하고, 산업재해보상보험(산재) 신청서도 정확한 내용으로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교육당국에도 책임을 물었다. 이들은 “지난 3월 교육부가 발표한 ‘현장실습 지도·점검 모니터링 시스템’에 따르면 학교가 현장실습 기업을 방문하도록 돼 있다”며 “갈비뼈까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을 때 학교가 취업 후 지도·점검을 어떻게 했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당시 제대로 지도·점검이 이뤄졌다면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밝혔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일하는 고교생’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권리연합회는 서울지역 특성화고 학생들 중심으로 추모 촛불을 들었다. 이상현군은 “더 많은 시민분들이 참여해줬으면 좋겠다”며 관심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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