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에게도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는 시대인데, 한 가정의 가장이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업무를 하는 게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제 제안을 계기로 사람이 우선이 되는 나라가 됐으면 합니다.”
강원도 춘천시에 사는 김지은씨(48)의 남편 최모씨(54)는 군인으로 33년간 복무하다 전역한 뒤 얼마 전 시내 한 아파트에 경비원으로 취업했다. 다세대주택 경비원은 은퇴 후 마땅한 직업을 구하기 힘든 퇴직자들이 주로 찾는 일자리다. “정년 제한도 없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다고 해서 그때는 정말 반가웠어요.”
하지만 남편의 모습은 출근을 거듭할수록 눈에 띄게 나빠졌다. 기침이 잦아졌고 퇴근을 할 때마다 진이 빠진 모습이었다.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 김씨가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걱정이 된 김씨는 급기야 남편 근무지를 몰래 찾았다. 남편은 경비 업무 말고도 쓰레기장 청소와 재활용품 정리 등 생각 외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휴식공간은 아파트 지하에 마련된 4평 남짓한 휴게실이 전부였다. “환기도 잘 되지 않아 악취가 났고 습기 때문에 곰팡이 냄새도 진동을 했어요. 가슴이 답답하고 뭐라 말을 할 수 없었어요.”
김씨는 탈북민이다. 춘천시 통일예술단을 운영하면서 북한에서 해왔던 무용·예술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1년 탈북한 뒤 남편을 만났다. “한국보다 더 힘든 곳에서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남편이 남한에서 이런 일을 겪으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죠” 김씨는 남편 직장에서 본 것을 토대로 지난 9월 노동부가 남춘천역에 마련한 현장노동청에 제안서를 냈다. “조금 망설였지만 용기를 냈습니다. 정부가 구석구석에 있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봐 달라는 마음이었어요.”
김씨 제안은 노동부가 지난 9월 2주간 전국에서 ‘현장노동청’을 운영하며 접수받은 3233개의 노동정책 진정·제안 중 ‘우수’ 제안으로 꼽혔다. 노동부는 경비원 휴게시간을 보장하고 위생적인 근무환경을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현장에 배포할 계획이다. 경비원 같은 감시·단속적 노동자의 휴게시간 보장, 수면·휴게실 확보 등 실태를 감독하기 위해 근로감독관 집무규정도 바꾸기로 했다. 김씨는 “정부가 목소리를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라며 “남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즐겁고 좋은 일자리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21일 고용노동부는 서울 역삼동 GS타워에서 ‘현장노동청 결과 보고대회’를 열었다. 노동부는 지난 9월12일부터 28일까지 서울을 비롯한 9개 도시에 10개의 현장노동청을 설치·운영해 임금체불, 부당노동행위 등 노동사건 상담을 하고 일반 국민들의 정책 제안도 받았다.
이날 보고대회에서는 노동부가 현장의 절박한 목소리에 좀더 귀기울여 달라는 ‘쓴소리’도 나왔다. 현장노동청의 ‘1호 민원’은 기아차 화성공장의 식당 외주업체 ‘현대그린푸드’가 일방적으로 근무시간 변경한 것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노동부는 민원을 받고 근로감독을 벌여 13일 만에 시정지시를 내렸다. 화성공장 비정규직들을 대표해 이날 발표자로 참석한 김수억 금속노조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장은 “노동부의 적극적인 근로감독과 시정명령만으로도 고통받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확인했다”라고 했다. 김 지회장은 이어 “하지만 대법원에서 ‘정규직이 맞다’는 판결까지 받아낸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불법파견은 아무런 해결이 안 되고 있다”라며 “노동부는 파리바게뜨나 만도헬라일렉트로닉스처럼 현대·기아차에도 직접고용 시정명령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김 지회장은 하청노동자들이 해고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지엠의 상황도 언급했다. 그는 “연말이면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만 100명, 부평공장에서만 50명의 비정규직이 해고된다”라며 “김영주 장관은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달부터 ‘총고용 보장’과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부분파업을 벌이고 있다. 노동부에 특별근로감독도 요구한 상태다. 이날 보고대회를 마친 김 장관은 서울로 올라온 한국지엠 창원공장 하청노동자들을 만난 뒤, “내일이라도 창원공장에 근로감독관을 보내 비정규직 노조를 만난 뒤 이번 주 내로 보고하라”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동부는 현장노동청을 운영한 17일 동안 총 6271건의 상담과 민원을 접수했다고 밝혔다. 최우수 정책제안으로는 노동자 생계보장을 위해 체불임금을 국가가 선지급해주는 ‘소액체당금 제도 개선방안’이 선정됐다. 노동부는 체불사실 확인만으로도 체당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법제도 개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김영주 장관은 이날 “현장 중심 노동행정의 중요성과 고용노동부는 ‘사람이 중심에 있는 부처’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라며 “앞으로 매년 1회 정기적으로 현장노동청 운영을 추진하는 등 국민의 목소리를 노동행정에 계속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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