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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시험사회’ 문제를 풉시다①] “차라리 시험으로 줄 세워 주세요”

“누구나 같은 교육을 받고 공평한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공정성을 잃은 수시 위주 입시정책은 바뀌어야 합니다.”

지난 1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 한복판 관악청소년회관 강당. ‘대입정시 확대, 사법시험 부활로 희망사다리를 세우자’라는 현수막이 나부꼈다. ‘정시확대, 사시부활’ 토크콘서트 행사장에서 객석 맨 앞에 앉은 고교 자퇴생 이모군(17)이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자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마지막 사법시험이 끝난 뒤 고시생들이 떠나 썰렁해진 신림동 고시촌은 “사법시험 존치하라” “서민을 위한 공정사회”같은 구호를 든 사람들로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는 사람들

이군은 인천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 서울의 한 명문고로 전학했다. 한동안 내신성적을 잘 받지 못하자 ‘이 성적을 가지고는 명문대에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고3을 앞두고 자퇴를 선택했다.

이군은 “한 번의 시험으로 앞으로의 인생이 전부 결정되는데, 한때 성적이 좋지 못했다고 해서 역전의 기회를 주지 않는 수시 위주 대학입시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수능이 ‘가장 공정한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학생과 3년 동안 지낸 교사들이 그 학생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게 가능할까요? 지금도 선생님들한테 밉보이거나 이견을 제시하면 ‘대학 포기한 아이’라는 말이 돌아요. 하지만 수능에는 주관적 평가가 개입될 여지가 없어요.”

이날 행사에는 최근 사법시험 부활과 정시 확대를 당론으로 정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와 류석춘 혁신위원장이 총출동했다. “좌파정부가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홍 대표의 말에 객석이 환호했지만 확연히 다른 분위기도 감지됐다. 류 위원장이 “공정사회 건설을 위해 한국당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하자 행사를 주최한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의 이종배 대표는 “일단 정시를 확대하고 사시를 부활시키면 지지율이 바로 30%를 넘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다른 정당과도 접촉을 시도했지만 자유한국당만이 우리 주장을 들어줬다”고 말했다. 특정 정당 지지자 모임은 아니라는 얘기다.

일반인들의 정서도 이날 고시촌에 모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하는 과정과 학교 생활을 중심으로 ‘상시평가’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학생부 위주의 대입 수시전형이다. 애당초 학생부 전형이 도입된 것은 교과서를 뒷전으로 하고 문제풀이에 몰두하도록 교육을 변질시킨 수능의 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생과 학부모들은 “수능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국민의당 송기석 의원이 지난 6월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42.1%가 수능성적을 위주로 한 정시를 ‘가장 공정한 대입전형’으로 꼽았다. 정시모집으로 선발하는 인원을 늘려달라는 청와대 청원에는 1만7000여명이 동참했다. ‘고시낭인’을 양산해 사회적 비용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사법시험을 폐지하기로 하고 로스쿨이 도입된 지 10년이 넘게 흘렀지만, 헌법재판소가 “사시 폐지는 합헌”이라고 판단한 지난해까지도 사시를 없앤 것이 잘못됐다는 사람이 절반에 달했다.

시험 안 본 사람에게 기회 주는 건 ‘역차별’?

시험을 통과한 이들과 통과하지 못한 이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은 역차별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강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시작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의가 대표적인 예다. “입사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에게 정규직 자리를 내주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정규직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지난달 인천공항공사 정규직 노조는 “공개채용 없는 정규직화는 청년 선호 일자리를 강제 선점하겠다는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힘든 입사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질 좋은 일자리’인 공기업 정규직이 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주장이다. “취업준비생 입장에서는 비정규직들에게 새치기당한 기분” “공기업 입사 날로 먹겠단 얘기냐”라는 원색적 댓글이 온라인을 점령했다.

▶[일자리 공정성 갈등] “취업전쟁 이겼는데”…‘정규직 전환’ 불편한 시험만능사회

지난 8월에는 중등임용시험 준비생들이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채용과정이 불투명하고 전문성이 검증되지 않은 기간제 교사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과정과 결과가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40대인 지인이 지방의 한 로스쿨에 진학하려 했는데 공식발표 하루 전에 탈락 소식을 접했대요. 마흔이 넘어서 뽑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100% 정량평가와 연수원 교육으로 결정되는 사법시험 체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셈이죠.” 사법시험을 준비한 경력이 있는 40대 남성 ㄱ씨의 말이다.

시험에 대한 ‘무한신뢰’는 평가의 공정성 자체를 믿지 못하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6년차 중학교 교사 ㄴ씨는 “기간제 교사를 비롯해 학교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들은 교장이나 이사장에게 로비해 일자리를 얻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는 “교장에게 몰래 선물을 주는 등 부정한 방법으로 계약을 연장했다는 소문이 현장에서 비일비재하다”며 “이런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사범대를 나와 열심히 공부해서 임용시험을 통과한 교사들에게 역차별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툭하면 드러나는 특권층의 일탈은 이런 인식을 갈수록 부채질한다. 학생부종합전형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에도 ‘금수저 전형’이 영향을 미쳤다. 국정농단 주역 최순실씨가 이화여대 총장과 공모해서 딸을 부정입학시킨 사건,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의 아들이 고등학교 시절 학교폭력을 저질렀다가 아버지의 탄원서로 퇴학처분을 무마받고도 서울대 수시에 합격한 사건 등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계속 커졌다. 지난해에는 몇몇 로스쿨 학생들이 대입 자기소개서에 ‘아버지가 법원장’이라는 등 부모나 친·인척이 법조계 고위 인사임을 내세웠다가 교육부 조사에서 적발됐다.

패자에게 배려 없는 또다른 ‘승자독식’

시험점수로만 줄세우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연공서열이나 성차별 같은 부당한 편견이 개입하기 어려울 거라는 믿음도 있다. 행정고시 폐지론이 나왔을 때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능력으로 평가해 5급 공무원으로 승진하는 제도가 듣기에 좋지만, 고위공무원 진입과정에도 민간기업 같은 성차별이 생길 우려가 크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시험을 거치면 얻는 보상은 지나치게 큰 반면, 이를 뒤집을 인생의 또 다른 기회는 없는 기형적인 구조가 본질적인 문제다. 한 번의 시험이 일생을 결정짓고 그것이 곧 퇴직할 때까지의 안정적인 일터와 돈을 보상해주기 때문에, 그리로 ‘몰빵’하는 것이 개개인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되고 사회적 투자가 쏠리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명문대에 진학하고 정규직에 안착하고 고시에 합격하는 것과 같은 성취에 실패했을 때 ‘잃어야 하는 대가’는 어마어마하다. 시험에서의 성취를 인생 최대의 노력의 대가로 여기는 ‘시험 합격자들’이 ‘패배자’들을 손가락질하고 차별하면서 ‘공정하다’고 우기는 것도, 이런 구조 속에서 나온 현상이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는 ‘시험만능주의 사회’다. 수능으로 줄을 세우는 대신 고교 3년을 입체적이고 다면적으로 평가하는 학종이 등장하자 돈 있는 학부모들은 한 달에 수백만원까지 드는 ‘컨설팅 학원’을 통해 아이의 학생부를 종합 관리하기 시작했다. 명문대에 가기 어려우면 아예 고등학교 생활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를 치르거나 재수를 선택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생활을 열심히 한 아이들에게 명문대에 갈 기회를 주는 것이 옳지 않다”면서 패자부활의 기회를 요구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 자체가 시험으로 결정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쓴 사회학자 오찬호씨는 “시험으로 사람들을 뽑고 구분하고 차별하는 현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시험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시험 결과에 따라 생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비롯한 차이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정책적인 보완이 필요하며, 근본적으로는 노동의 질과 보상을 늘려야 풀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