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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장애와 함께 크는 사회](2)엄마의 고군분투···우리 아이가 ‘섬’ 이 되지 않게

“아이들을 데리고 현장학습 나가면 어르신들이 ‘쯧쯧’으로 시작해서 ‘아기 엄마야?’ ‘애를 몇 살에 낳았기에?’ 그런 걸 자꾸 물어봐요. 엄마가 아니라 교사라고 하면 ‘젊은 사람이 좋은 일 한다’고 해요. 이래서 엄마들이 애들 데리고 밖에 안 나가려고 하는구나, 싶죠. 독한 맘 먹지 않으면.”

서울 마포 한국우진학교의 공진하 교사(45)는 1994년 특수교육과를 졸업했다. 그해인 1994년 특수교육진흥법이 개정돼 특수교육 대상 학생들의 의무교육이 법으로 보장됐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통과된 2007년, 공 교사는 한 기고에서 “앞으로 십년 뒤, 올해 태어난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현장이, 세상이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기대가 된다”고 썼다. 2017년 11월 말 만난 공 교사는 대답에 앞서 긴 한숨부터 몰아쉬었다.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적어도 약자를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된다는 예의 정도는 지키는 시대가 올 줄 알았다”는 토로에는 날이 서 있었다.

일러스트 이아름

전에 비해 특수학교 수는 늘었지만, 여전히 장애아들이 공부하는 학교는 우리 사회의 섬이다. 밖에서는 뭐 하는 곳인지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고, 아이들은 24시간을 오롯이 바치는 엄마들의 에너지를 동력 삼아 학교와 집과 치료센터를 오가는 일상을 반복한다.

2000년 개교했을 때부터 공 교사가 일하고 있는 우진학교는 ‘우수 특수학교’로 자주 언급된다. 학교혁신 우수실천 사례 등 표창도 여러 번 받았다. 지난 9월 강서구 특수학교 논란이 벌어진 뒤에는 지역 사회와의 상생에 성공한 학교로 알려지며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방문하기도 했다. 우진학교는 시작부터 순조로웠을까. 공 교사는 우진학교 역시 문을 열 당시에는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표면적인 구실은 고등학교 부지에 특수학교를 지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스포츠센터는 알아도 학교는 몰라요

교육부는 1995년 지체부자유와 정신지체·정서장애 등 중도·중복장애아를 위한 우진학교 설립 계획을 세웠다. 1999년에는 서울에 서울맹학교(시각장애아), 서울선희학교(청각장애아), 한국선진학교(정신박약아), 정서장애학교(정서장애아)와 함께 5개의 장애유형별 특수학교 체제를 완성하는 청사진을 그렸다.

가장 큰 장애물은 주민들의 반대였다. 1990년대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밀알학교가 지어질 무렵 벌어진 반대시위는 강서 특수학교 반대 움직임의 전례 격이다. 1995년 11월 일원동 수서 3단지 주민들은 서울시교육청 앞 도로를 점거하고 정서장애 아동들이 다니게 될 밀알학교 설립 계획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교육청은 삼성동 경기고 터에 특수학교를 세우려다가 동창회의 반발로 이미 한 차례 포기한 바 있었다.

서울 마포 한국우진학교는 특수교육 우수 사례로 꼽히는 곳이지만, 이곳도 17년 전인 2000년 개교할 당시에는 주민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장회정 기자

서울 마포 한국우진학교는 특수교육 우수 사례로 꼽히는 곳이지만, 이곳도 17년 전인 2000년 개교할 당시에는 주민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장회정 기자

당시 밀알학교 건립에 반대한 주민들은 학교 관계자들에게 “초등학교 부지에 왜 특수학교를 짓느냐”고 항의했다. 하지만 속내는 조금 달랐다. 주민들은 공무원과 만난 자리에서는 “집값이 떨어지면 재산상 불이익인데 보상해 줄 거냐”고 했다. 학교 설립 승인은 끝난 상태였다. 교육청에서는 주민들 의견을 반영해 설계를 변경할 것을 학교 측에 요구했다. 학교 측은 주민들을 의식해 학교 건물을 아파트 쪽으로 붙여 지어서 운동장이 보이지 않게 하려고 했으나, 주민들은 학교 건물이 아파트와 가까워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 건물을 북쪽으로 들여서 짓고, 정문도 아파트 쪽으로 내려던 계획을 틀어 4차선 도로 쪽으로 냈다. 역설적이게도 주민들의 민원 때문에 학교 건물은 남향이 됐고, 탁 트인 운동장으로 넉넉한 햇볕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사례들을 바탕으로 우진학교가 찾은 상생의 해법은 교내에 수영장을 갖춘 스포츠센터를 짓는 것이었다. 당시 주변에는 마땅한 수영장이 없었다. 몇 차례 설계변경 끝에 본관 건물 뒤에 스포츠센터를 지었다. 우진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면 이용요금을 할인해주는 묘책도 세웠다. 지금은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수영장에 비해 낡은 시설이 됐지만, 우진스포츠센터는 여전히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주변 초등학교 생존수영 수업도 여기서 이뤄진다.

2004년까지 근무한 최향섭 초대 교장은 자연을 접하기 힘든 학생들을 위해 조경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교내 정원의 매화, 산수유, 살구, 포도나무는 철마다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도 인기다. 우진학교는 구립어린이집, 신북초, 중암중 등 이웃 학교와 연계해 교내 행사나 토요돌봄교실 같은 통합 교육 활동도 하고 있다. 비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이해교육이나 체험교육도 실시한다. 공연을 같이 보는 등 비록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사이지만, 어릴 적부터 낯익은 사이가 된 아이들은 신북초나 중암중으로 진학해 우진학교 출신 친구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인사를 한다. 공 교사는 “어린이집에서 만났을 때 친했든 친하지 않았든, ‘한번 봤던 아이’라는 차이가 크다”고 말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학교

개교 17년째를 맞은 우진학교는 안온하게 마을로 녹아들었을까. 현실은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다. 12월 초 우진학교 주변에서 만난 주민들은 우진스포츠센터는 잘 알아도 학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한 남성은 “동네에 우진학교 다니는 아이를 둔 집이 두어 집 있을지는 몰라도 학교에 다니는 애는 통 못 봤다”고 말했다. 

이웃 아파트 단지의 공인중개사는 “우진학교 때문에 이사 오는 주민이 있긴 하지만, 집을 구할 때 그 얘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길에서 만난 신북초 4학년 아이 역시 ‘우진학교 학생들을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학교 앞 노점상은 “간혹 날씨 좋을 때 선생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기도 하는데 다른 학교 학생들은 수업할 시간이라 애들끼리 만날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서울 마포 한국우진학교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중암중학교. 우진학교는 주변 학교들과 연계한 통합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발달장애 아동들이 사회에 익숙해지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다.  장회정 기자

서울 마포 한국우진학교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중암중학교. 우진학교는 주변 학교들과 연계한 통합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발달장애 아동들이 사회에 익숙해지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다. 장회정 기자

하교 시간인 오후 2시 무렵, 노란 장애인 콜택시가 간간이 오갈 뿐 우진학교 교문 앞은 조용했다. 학부모와 아이들이 분주히 오가는 맞은편 신북초나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담장을 넘어오는 바로 옆 중암중과는 다른 묵직한 고요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우진학교 교직원들이 자주 찾는 학교 옆 편의점은 턱 높은 계단 위에 출입구가 있었다. 편의점 직원은 휠체어를 타고 오는 손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우진학교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학교였다.

마을에서 함께 어울리기 위한 통합프로그램도 쉽지만은 않다. 한번은 우진학교에 통합수업을 오던 주변 어린이집의 한 아이가 무심결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할머니가 ‘너 오늘 ○○학교 간다며’라고 했어.” 우진학교 재학생의 어머니가 그 얘길 들었다. 아이가 상처받을 것을 걱정한 이 어머니는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통합교육을 할 수 있겠느냐”며 학교에 격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주변 학교 학생들은 친구들을 놀릴 때 “너 우진이니?”라며 비하발언을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이의 장애가 심할수록, 부모들은 밖에 나가 상처를 받을까 걱정해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하루 종일 안전하게 보내다가 집으로 가는 식이 되어버려요. 사회가 ‘이만큼 준비했으니 한 발 더 나오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지금은 장애인들이 ‘저희끼리 준비했으니 한 발 더 들어가면 안 될까요’라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진학교가 성공한 학교로 불리는 데에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마을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이유도 클 것”이라고 공 교사는 말했다. 대학가가 가까워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를 나오기 쉬운 것도, 엄마들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은행 업무를 보거나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도 모두 ‘은혜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수학교들 중에는 도심이나 주택가와 멀리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곳들이 많다. 특수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외딴 산 속에 지으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눈에 띄지 말라는 얘기다.

숨은그림찾기가 된 장애아 교육

공진하 교사는 중증장애를 가진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도토리 사용설명서>를 비롯해 동화책을 여러 권 냈다. 교사 초년병 시절,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싶어도 장애아가 주인공인 책을 찾을 수 없어서 직접 쓰기로 결심한 게 시작이었다. 장애인 전문 여행사 두리함께의 이보교 대표는 장애인을 ‘숨은그림찾기’에 비유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가 그들을 숨겨두었다”는 것이다.

공 교사는 “저희가 잘 숨어있는 겁니다”라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우리 학교에는 뇌병변 장애아가 많습니다. 장애가 심한 편이라 집에서 꽁꽁 싸매고 나와서 스쿨버스나 승용차, 또는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등교합니다. 오후에는 각자 치료실에 갑니다. 밖에서 또래들을 만날 기회가 없죠.”

장애아동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책들을 펴낸 한국우진학교 공진하 교사가 특수교육의 현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장회정 기자

장애아동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책들을 펴낸 한국우진학교 공진하 교사가 특수교육의 현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장회정 기자

서울의 특수학교 재학생 40%는 30분 이상 걸리는 원거리 통학을 하고 있다. 몸이 불편한 아이들이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보다 더 불편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017년 말 현재 서울의 8개 자치구에는 특수학교가 없다. 경기도에 사는 아이들도 장애유형에 맞는 학교가 없으면 서울의 학교에 다니기 위해 하루 2시간 이상을 길 위에서 허비한다. 어쩔 수 없이 위장전입을 해야 하는 가족들도 많다.

마포장애인부모회(전국장애인부모연대 마포지회) 장현아 회장(50)의 지난 17년은 투쟁의 역사다. 2000년 태어난 이종민군(17)은 생후 6개월에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겪었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목격한 엄마에게 아이의 회복은 기적과도 같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느린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이름조차 생소한 프래더윌리증후군이라는 장애 판정을 받으면서 엄마 앞에는 또 다른 차원의 숙제가 던져졌다. 프래더윌리증후군은 유전자 이상으로 인해 생긴다. 이 병이 있는 아이들은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 음식을 자주 찾고, 성장호르몬이 모자라 성장 지체와 지능장애가 나타난다.

“두돌배기인 내 아이가 그런 존재가 된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장애 진단은 주홍글씨 같은 낙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죠.” 한국에서 제일가는 병원 의사는 “더하기 빼기도 할 수 있고,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다”며 “엄마가 눈높이만 낮추면 된다”고 위로했다. 장 회장은 아이가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고 했다. “사회의 첫 문턱은 교육기관이었어요. 사회적 약자이면 더 배려해줄 줄 알았는데, 독립보행이 안된다고 어린이집 입소를 거부당했어요.”

버팀목이 돼준 특수교육지원법

종로에 있는 지체장애 영유아특수학교에 종민이를 보내면서 양천구에서 마포구로 집을 옮겼다. 수도사랑의학교에서는 치료사와 담임교사가 아이를 하나하나 도와줬고, 물리치료 외에도 음악과 심리치료 등이 잘 연계돼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그럼에도 3년이 지나자 언어능력이나 사회성을 기르기에는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위축되는 느낌을 받는다는 건 사회 시스템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부모의 힘으로 변화시켜보자, 그런 깊은 공감대를 바탕으로 부모회 운동에 나섰죠.”

아이를 보낼 수 있는 동네 어린이집을 물색했다. 좋다고 소문난 어린이집의 장벽은 더 높았다. 때마침 영유아보육법이 개정되면서 장애아를 보육하는 어린이집에는 장애아 3명당 1명의 전담 보육교사를 두도록 했다. 그 조항을 근거로 구청에 요구해 교사 채용은 물론, 구립어린이집에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비용까지 받아냈다. 그렇게 종민이를 비롯한 장애아 친구들이 당당히 동네 어린이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특수학교를 벗어난 통합교육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종민아, 안녕’ 해주는 친구가 생기고, 나를 ‘종민 어머니’라고 부르는 동네 사람이 생겼어요. 그 전에는 특수교육기관에 아이를 보내면서 매일 남의 동네를 다니다 보니 우리 동네에 누가 사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거든요. 걸어서 어린이집에 가고 집 근처 분식집이나 약국, 슈퍼마켓에 가면서 동네 사람들도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 치료센터보다 중요한 것이 이런 환경이구나, 싶었어요.”

서울 마포 한국우진학교에 딸린 스포츠센터. 주민들과 ‘상생’하기 위해 우진학교는 교내에 수영장을 갖춘 스포츠센터를 지었다.  장회정 기자

서울 마포 한국우진학교에 딸린 스포츠센터. 주민들과 ‘상생’하기 위해 우진학교는 교내에 수영장을 갖춘 스포츠센터를 지었다. 장회정 기자

하지만 지역 사회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장 회장은 아이가 힘들어하면 특수학교에 보내더라도, 우선은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에서 통합교육을 받게 하기로 했다. 법과 제도는 문턱에서부터 거부당하기 일쑤인 장애인들에겐 최후의 보루이자 버팀목이다. 장애아 입학을 거부하는 학교는 벌금을 내거나 시정명령을 받도록 한 특수교육지원법이 종민이가 의지할 언덕이 됐다. 종민이의 눈높이에서 마음을 헤아려주는 친구들은 대변인이 돼줬다.

장애가 있는 학생이 지역사회 복지서비스에 참여함으로써 자아존중과 자신감이 커진다는 연구는 여럿 있다. 서비스 담당자와 장애 가족에게도 긍정적이다. 장애아와 한 교실에서 공부한 비장애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순화된다는 몇몇 연구결과는 장 회장 같은 엄마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매번 상급학교에 올라갈 때마다 같은 고민이 반복됐다.

한 엄마의 말이 분위기를 바꿨다

종민이가 중암중에 진학하고 열린 첫 학부모 총회 때였다. “(장애아의 통합수업이) 초등학교까지는 괜찮은데, 중학교는 힘들지 않을까”라는 얘기가 나왔다. 순간 모두가 긴장했다. “그때 한 엄마가 손을 들더니 ‘저도 우리 아이를 통해서 종민이를 알고 있어요. 왜 어른들 시각으로만 보고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사회에서 장애인을 안 볼 것도 아닌데’라고 했어요. 바로 분위기가 반전됐어요. 속으로 ‘앞으로 3년은 잘 다닐 수 있겠다’를 외쳤죠.”

장 회장은 “아이가 일반학교에 다니다 보니 세상을 보는 관점도 커지고, 치료 중심의 양육을 벗어나 관계망 위주로 키우게 됐다”고 말한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웃들이 내미는 손에서 힘을 얻는다고도 했다. 동네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모자의 활동반경은 차츰 넓어졌다. 단골이 된 집 앞 카페는 엄마와 종민이에겐 특히 남다른 공간이다.

“한번은 종민이 아빠가 ‘영업하는 카페인데, 우리 애가 과잉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라고 한 적 있어요.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카페 사장님이 ‘여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에요. 여기가 불편한 사람은 오지 않으면 됩니다’라고 했어요. 우리 종민이와는 같이 얼음도 사러 다닐 정도로 친구가 됐죠.”

한 정거장 거리인데 굳이 마을버스를 타고 싶어 하는 종민이와 실랑이를 벌일 때였다. 카페 주인은 “아이가 좋아하는데, 좀 태워주면 안 됩니까?”라고 반문했다. 장 회장은 아이가 버스를 타고 싶어 하는 게 장애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달았다. 여느 아이들도 그럴 수 있는 거였다. 그렇다면 그게 뭐 대수일까. 마을에서 맺은 관계 속에서 장애아 엄마가 스스로 품고 있던 편견도 하나둘 깨뜨릴 수 있었다.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욱여넣듯, 그동안 아이를 공중도덕 규범에 끼워 맞추려고 했다. 사람들 눈 밖에 날까 두려워서였다. 안 되는 걸 왜 억지로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아이들은 고통받고, 엄마들은 숨죽여 울었다. 장 회장은 마을을 만나 스스로도 성장할 수 있었다.

미국 대통령들의 휴가지로 유명한 보스턴 남쪽의 마서스비니어드섬은 청각장애인이 많은 지역이다. 예일대 인류학과 교수인 노라 엘렌 그로스는 이 섬에 대해 소개한 책에서 ‘수화로 소통이 이뤄지는 특별한 곳’이라고 전한다. 청각장애인이 많다 보니 장애가 없는 주민들도 이웃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수화를 익혔다. 이곳에는 ‘입으로 말하는 사람’과 ‘손으로 말하는 사람’, ‘귀로 듣는 사람’과 ‘눈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웃과 소통할 때 장애는 더 이상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인 무언가로 변한다.

선을 지우면 공동체가 보인다

경기 화성시의 유리마을에는 꿈고래놀이터 부모협동조합이 있다. 장애아동 부모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최초의 소비자협동조합으로 2015년 초 문을 열었다. 지금은 조합원이 150명에 이른다. 이 중 장애아 부모는 100명, 비장애아 부모가 30명, 나머지 20명은 치료사다. 장애아 치료비 부담을 줄여보자는 데에서 의기투합했다. 사설치료실의 경우 40분 남짓 하는 수업당 5만~10만원을 내는데 이 중 60%는 치료사인 교사에게, 나머지는 센터장에게 돌아간다. 협동조합에서는 40%를 아이들의 미래에 투자하기로 했다. 치료비가 저렴할 뿐 아니라 장애아와 비장애아 통합교육이 이뤄지는 곳으로서 꿈고래놀이터는 하나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화성시의 지원을 받아 동탄에 2호점을 냈다.

일러스트 이아름

일러스트 이아름

“40분 수업으로 아이를 바꿀 순 없어요. 필요한 건 인식개선이에요. 비장애아동과 함께하는 무료 문화통합 수업을 만든 것도 동네 친구를 만들어주고 아이들을 사회에 노출시키기 위해서였어요. 지역 병원이나 가게들과 양해각서를 맺어서 현장 수업도 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더디더라도 이해해 달라’는 뜻이지요.”

임신화 이사장(43)은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임 이사장은 자폐성 장애아 둘을 키우는 엄마다. 꿈고래놀이터에서 문화통합 수업을 시작한 지 3년. 이제 아이들은 장애, 비장애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처음에는 말 못하는 친구, 걷지 못하는 친구였다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 그냥 ‘친구’가 된다. 비장애 아이를 데려오는 부모와도 “아이들은 똑같네요”라고 입을 모으며 육아 고민과 경험을 나눈다. 임 이사장은 장애뿐 아니라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 가족을 위한 치료와 수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선을 지우면, 삶의 숱한 어려움을 공유하고 함께하는 마을 공동체가 보이는 것이다.

‘섬’에 다리를 놓아달라

중증 뇌병변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를 대상으로 심층면담을 한 서강대 강선경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중증장애자녀를 교육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며 교육을 당장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엄마의 무모한 욕심으로 치부하거나 투사로 오인”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중증 뇌병변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오랜 과정에서 차별과 배제와 소외를 경험한 엄마들의 경우 낙담, 비관, 포기를 하기보다는 저항”을 택하기도 한다. 엄마 스스로 교사가 되려 노력하는 것이 저항의 일반적인 형태다. 하지만 엄마 혼자 교육에 에너지를 쏟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지속성도 떨어진다.

그런데도 장애아의 양육은 오롯이 엄마의 몫으로 남겨지곤 한다. 2013년의 장애아동 및 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아동의 주양육자는 평일 하루 평균 12.34시간,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18.43시간을 자녀를 돌보는 데 쓴다. 개인 활동에 제한을 받는 것은 물론 취업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적 고립감이나 경제적인 스트레스로 우울감이 높아진다. 2013년 서울 관악구에서 한 남성이 “발달장애인 가족으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는 유서를 남기고 17살 아들을 살해한 뒤 목숨을 끊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국가 차원의 사회안전망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42일 동안 26명의 장애아 어머니가 삭발했다. 그 현장에는 장현아 회장도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온전히 가족이 책임져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발달장애인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우니 더더욱 사각지대에 있는 거죠. 엄마들이 요구하는 건 ‘좋은 시설’이 아닙니다. 그 예산으로, 성인이 되었을 때 시설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취재 중 만난 이들이 몇 번이나 언급한 단어는 ‘섬’이었다. 특수학교와 치료센터를 오가다가 성인이 되면 시설로 들어가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을 ‘장애인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섬에 다리를 놓거나 안전한 배를 띄워달라는 것. 무릎을 꿇고 소리 죽여 울면서도 엄마들이 고군분투를 멈추지 않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