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8 조형국 기자
다르르르륵. 장경하씨(50)가 발목을 까닥이자 23년 된 선스타 재봉기 모터가 경쾌하게 돌았다. 검은 천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바늘을 지나자 따로 놀던 옷감이 하나가 되면서 코트 모양을 갖췄다. 6평 남짓한 작업실은 한가운데 큰 작업대가 놓여 한 사람이 움직이기에도 비좁았다. 장씨는 재봉기 앞에 앉을 때마다 배꼽 높이 작업대를 넘어다녔다. “너는 언제나 나에게 휴식이 되어준 친구였고….” 먼지를 막으려 랩으로 싸맨 라디오에서 김민우의 ‘휴식 같은 친구’가 흘러 나왔다. 형형색색 실패가 꽂힌 받침대에는 검은 실 먼지가 소복했다.
대낮에도 창밖은 캄캄했다. 옆집 담벼락과 바로 맞붙은 창에는 한기를 막는 문풍지와 자투리 옷감이 틈마다 끼여 있었다. 업소용 스팀 다리미를 쓰면 금세 방 안이 눅눅해진다. 작업대 위에 일렬로 늘어선 형광등 조명마다 ‘물먹는하마’가 습기를 빨아들였다. 보증금 4000만원에 월세 30만원, 지금 장씨가 사는 집은 신당동의 좁은 골목에 있다. “이 일 하려면 이런 집만 찾아다닐 수밖에 없어요.” 늦은 밤까지 울리는 재봉기 모터 소리 탓이다.
모처럼의 일감이었다. 장씨는 지난해 12월 한 달을 일 없이 지냈다. 중국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든 동대문 의류시장은 혹독한 겨울을 맞았다. ‘평창 롱패딩’ 인기에 힘입어 패딩 판매량이 반짝 늘었지만 갑작스러운 호재를 내다본 상인은 많지 않았다. 미리 재료를 마련하지 못한 공장에 롱패딩 인기는 남의 잔치였다. 그렇게 손을 놓고 지낸 지 한 달, 그해의 마지막 날 일감이 도착했다. 벌당 공임 8500원짜리 검정 봄 코트 60장이었다. 일주일 물량 50만원어치는 그리 큰 일감이 아니지만 급한 대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돈이 된다.
미싱사 장경하씨가 서울 신당동 집에서 봄 코트를 만들고 있다. 장씨는 35년 동안 미싱사로 일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장씨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한때 400만원을 기록하기도 했던 그의 수입은 봉제산업이 쇠퇴하면서 점점 줄고 있다. 강윤중 기자
2018년 대한민국에서는 15세 이상 인구 4384만8000명 중 2684만5000명이 일한다. 1980년 1368만명이던 취업자 수는 국가 주도 개발과 제조업·수출 중심의 경제성장이 결실을 보면서 1985년 1497만명, 1995년 2041만명으로 늘었다. 일하는 이들의 소득도 많아졌다. 나이와 가족 수, 지역과 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낸 전국 노동자의 평균 월급도 극적으로 증가했다. 1980년 한 달 평균 23만4086원을 벌던 근로자가구는 1995년 191만원, 2005년 325만3000원을 벌었다. 2010년 396만5000원, 2015년 478만5000원에 이어 지난해 3분기에는 전체 평균 500만원을 넘겼다.
늘 그렇듯 ‘평균’과 ‘현실’ 사이엔 거리가 있다. 가구 소득 월 500만원이 평균이라는데, 노동자 1명이 평균 잡아 버는 돈은 그에 훨씬 못 미친다. 도시 2인 이상 근로자가구를 기준으로 하위 20% 가구의 월평균 소득이 1990년 20만6000원에서 2016년 71만1000원으로 3.44배 오르는 사이, 상위 20% 가구의 소득은 81만2000원에서 446만원으로 5.5배 늘었다.
불평등도를 측정하는 지니계수는 0.266에서 0.317이 됐다.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에 다가갈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뜻이다. 전체 인구 중 빈곤 위험에 처한 이들의 비율인 상대적 빈곤율은 7.8%에서 15.4%로 뛰어올랐다.
통계로는 알기 힘든 월급의 진실은 개개인의 삶에서 드러난다. 경향신문은 1980년대 이후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임금의 역사를 지켜봐온 이들의 삶을 들었다. 일은 이들의 인생이자 생활이었고 밥이자 꿈이었다.
15살 시다가 베테랑 되기까지
35년. 장경하씨가 전북 정읍에서 올라와 서울 하월곡동의 봉제공장에서 미싱 시다로 일을 시작한 뒤 재봉기 앞에서 보낸 시간이다. 실수하고 꾸지람 듣던 열다섯 살 시다는 이제 재단된 원단만 봐도 척척 제품을 만드는 쉰 살의 숙련공이 됐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하고 한 달에 7만1200원을 받았다. 매일 아침 사장은 확성기를 들고 “오늘 물량 맞추기 촉박하니 잔업해서라도 일을 끝내라”라고 했다. 장씨가 있던 라인에서는 수출용 패딩을 하루 200장 넘게 만들었다. 여공들은 베니어합판으로 칸을 나눈 창고에서 네댓명이 전기장판을 깔고 함께 살았다.
18살 되던 해에 “평화시장 가면 더 받을 수 있다”는 친구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미싱을 시작했다. 시다 8만~9만원, 미싱보조 10만~15만원을 거쳐 ‘오야’가 되니 25만원이 떨어졌다. ‘조르개(시보리)’가 있는 야구 점퍼는 최고 4500원, 허리에 끈이 들어가는 사파리 재킷은 6000~7000원씩 받았지만 그런 비싼 옷은 수량이 많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는 수출 호황으로 일감이 넘쳐 오후 11시 넘게까지 일할 때가 많았다. 장씨의 수입도 빠르게 늘었다. 1988년 장씨는 한 달 평균 35만원을 벌었다. “시다·보조를 두고 많이 버는 사람은 100만원도 벌었다”고 기억했다. 장씨가 처음 월 100만원을 손에 쥔 것은 1991년이었다. 1995년 아이가 유치원에 간 후 장씨는 공장생활을 마치고 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벌었을 때의 월 소득은 250만원이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120만원을 주고 산 재봉기와 비슷한 기종이 지금은 180만원대다.
장씨는 “기술만 있으면 결혼해서도 얼마든 할 수 있는 게 이 일의 장점”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 배우자를 잃고 재봉틀로 딸을 키웠다. 일이 몰린 달 400만원까지 벌었을 때 “이리 벌면 떼부자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400만원은 “시간을 죽여 번 돈”이었다.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장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1시30분까지 하루 14시간 넘게 일한다. 하지만 물량이 없으면 놀아야 한다. 인건비가 싼 중국·베트남으로 봉제산업이 대거 빠진 뒤로는 정기적인 일감이 없다.
얼마 남지 않은 공장들 중 일부는 서울 창신동과 신당동 등 동대문 인근에 남았는데 그나마도 폐업 행렬을 잇고 있다. 장씨는 “있는 달, 없는 달 평균 내면 월 200만원 정도 번다”고 했다. 지난해 3분기 도시 근로자가구 소득 10분위 중 2분위 월평균 소득이 236만7387원이니, 35년 재봉틀을 돌리고도 하위 20%에 머문 셈이다. 그가 35만원 벌던 1988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970억달러였는데, 장씨가 그때보다 5배 많은 200만원을 버는 지금 GDP는 1조5297억달러로 17배 늘었다.
요즘 봉제시장에서는 젊은 일꾼을 찾아볼 수 없다. 2015년 의류산업협회 분석을 보면 봉제사의 94%가 40대 이상이었다. 장씨는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하는 특성 때문에 나가떨어지는 언니·동생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일감이 넘쳤던 1980년대는 지금 와서 보면 행복했다”며 “내일 당장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더 싫다”고 말했다. 그는 딸과 둘이 살면서 식비·교통비·통신비와 각종 공과금 등 생활비로 약 100만원, 저축과 보험 등에 70만원을 쓰고 나머지 30만원을 월세로 낸다.
공장→식당→공장→식당→텔레마케터
2017년 기준으로 한국에서는 남성 10명 중 7명이, 여성 10명 중 5명이 일한다. 1980년에도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이미 42.8%였다. 1993년 임금구조 기본통계 조사보고서를 보면 당시 여성 노동자 144만4600명이 받은 월평균 49만500원의 임금은 남성 평균 임금의 절반이 겨우 넘었다. 장씨 같은 여공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군 동력이었다. 고령화사회에 한국 노동자들의 가장 일반적인 미래 또한 ‘여성’ ‘저임금’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저임금 노동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이들의 과거는 그간 한국의 저임금 노동시장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다.
서울 구로구에 사는 김명희씨(58)는 전남 목포에서 살던 1990년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배우자와 헤어져 혼자 초등학교 1학년과 5살 두 아들을 키우기 시작했을 때 통장 잔액은 0원이었다. “풀을 뜯어먹든, 흙을 파먹든 너희 둘은 내가 끝까지 책임질게.” 김씨가 남몰래 어린 아들들에게 한 약속이었다.
요양보호사 김명희씨가 서울 구로동의 한 아파트에서 치매 노인을 돌보고 있다. 아래 사진은 5년 전의 김씨다. 그는 공장과 식당, 다시 공장과 식당을 오가며 일하다가 텔레마케터를 거쳐 요양보호사가 됐다. 강윤중 기자
31살 때 김씨는 행남자기 공장에서 오전 9시부터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움직이는 컵과 접시, 밥공기, 찻잔과 간장 종지에 라벨을 붙였다. 도자기 수백개에 특수 풀을 바른 뒤 라벨을 누르며 10시간을 보내면 저녁상에서 수저가 떨렸다. 우유·빵 하나씩 받고 매일 2시간씩 잔업을 하고, 한 달에 두 번은 일요일에도 나가야 월급 50만원이 됐다. 두 아들 키우기엔 모자라 친정에서 쌀이나 고춧가루, 양념장과 반찬을 얻어먹었다. 1995년 상경 후 다닌 지퍼 공장에서는 75만원을 받았다. 양쪽 기계에서 내려온 지퍼 손잡이와 슬라이더(지퍼를 오르내리며 양쪽 이빨을 맞추는 부속품)가 제대로 결합돼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김씨 몫이었다.
쇠줄과 부속품이 쏟아지는 커다란 기계에선 종일 쇳가루가 날렸다. 두 겹 목장갑에 토시와 마스크, 앞치마를 해도 퇴근 후 온몸에서 쇳내가 났다. 물량이 적을 때 ‘윗분’들이 쏟아내는 짜증과 타박을 견디는 몫은 월급으로 쳐주지 않았다. 돈을 아끼려 회사 근처 반지하 전세방에서 점심을 먹었다. 1995년 2분위 가구 월평균 소득이 99만1700원, 1분위 소득이 63만2543원이었으니 김씨는 하위 20%에 속한 노동자였다. 돈의 가치로는 어떨까.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으로 환산해보면 1990년의 50만원, 1995년의 75만원은 각각 지금 화폐 가치로 124만원, 138만원이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생활은 큰아들이 중학교 갈 때 끝났다. 1996년 김씨는 서울 종로의 한 중국집으로 옮겼다. 홀서빙과 주방보조,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120만원을 받았다. 중국집에서 그의 소득 분위는 한 계단 올랐다. 김씨가 느끼기에도 살림살이는 뚜렷하게 나아졌다. 그는 “살면서 가장 많이 받던 때”라고 기억했다. 처음으로 월 3만원 정기적금을 들고 세탁기를 샀다. 당시 젊은 부부 사장은 시쳇말로 ‘츤데레’(겉으로는 퉁명스럽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였다. ‘아이들 갖다주라’며 종종 옷을 사주거나 직접 만든 요리를 챙겨줬다. 월급도 해마다 10만원씩 올렸다. 1996년 임금구조 기본통계 조사보고서를 보면 35~39세 여성 숙박·음식점업 종사자가 월급여액과 상여금을 합쳐 한 달에 94만원을 받았으니, 김씨는 급여 면에서 상대적으로 넉넉한 편이었다. 1996년의 120만원은 지금 가치로 210만원이다.
돌고돌아 결국 제자리
중국집에서 정점을 찍은 김씨의 급여는 이후 내리막길을 탔다. 3년 일한 중국집을 관둔 건 집 가까운 직장에서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1998년 첫째는 사춘기를 맞았고, 둘째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김씨는 비디오테이프 케이스를 찍어내는 구로구의 공장에 월 80만원 받는 경리 겸 작업 인력으로 채용됐다. 지금 가치로는 125만원이다. 하지만 석 달을 못 버텼다. 프레스에 찍힌 물건을 빼다 손가락을 물렸다. 오른손 검지 뼈가 으스러졌다.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석 달 새 세 번 수술을 하고 손가락 모양은 되찾았지만 완전히 굽혀지지도, 펴지지도 않는다. 김씨는 약간의 생활비와 치료비만 받았고 산재 신청은 하지 않았다. “공장 사정 힘든 거 뻔히 아는데 받기가 좀 그렇더라”는 게 이유였다.
1999년 SH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지은 공공임대주택에 보증금 850만원에 월세 13만원을 내고 들어갔다. 잠시 오리고깃집에서 불판을 나르며 120만원을 받았지만 역시 오래 버티지 못했다. 2000년대 초 부동산 텔레마케터를 시작했다. 책상에서 전화만 걸면 100만원을 주니 처음에는 흥이 났다. 고객에게 알릴 부동산은 김씨가 가본 적 없는 전국구였다. 아침마다 ‘부장’이 기사가 실린 종이를 들고와 “원주에 혁신도시가 생긴다” “제주가 국제자유도시가 된다” “여기는 SOC 사업이 시작되고 국책사업이 논의 중이다”라고 일러줬다. 텔레마케터로 몇 군데 직장을 옮겼지만 매번 오래 일하지는 못했다. 한번은 출근하니 사무실이 휑했다. 얼마 뒤 사장이 사기죄로 잡혀들어가고 기획부동산 투자 사기가 대규모로 적발됐다는 방송을 봤다. 김씨는 석 달치 월급을 못 받았다. 2000년 소득 2분위 가구 월평균 소득은 111만4800원, 김씨는 다시 하위 20%로 내려갔다.
최금옥씨가 인천대 송도캠퍼스에서 공과대학 강의실을 청소하고 있다. “소파 하나 들일 수 있는” 조금 넓은 집에서 살아보는 것이 최씨의 꿈이다. 아래 사진은 2002년 최씨가 어린이집 동료들과 야유회를 갔을 때의 모습이다. 강윤중 기자
최금옥씨(58)는 ‘국민학교’ 3학년부터 아버지와 동생 둘의 살림을 맡았다. 1979년 결혼 후 부업을 시작했는데, 면장갑을 코바늘로 꿰고 하루 30원을 벌었다. 최씨는 “당시 두부 한 모가 15원, 라면 한 개가 20원이라 애들 계란 하나 사먹인다는 생각으로 했다”고 기억했다. 배우자는 석공으로 일하며 한 달 5만원을 벌었는데 방세 3000원과 식비, 전기료, 연탄값 등을 치르면 1만원 저축하기도 빠듯했다. 옆집 살던 교사가 매달 17만원씩 받는 걸 본 최씨는 ‘저리 벌면 금방 집 사겠다’ 싶어 서울 신촌 막국숫집, 춘천 봉제공장, 인천 제조업 공장 등에서 생업에 뛰어들었다. 지하철·버스 자동문 부속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콘비아(컨베이어벨트)를 타기도” 했고 가정용 인터폰 렌즈 초점을 사람 눈에 가장 잘 보이게 조정하는 일도 했다.
지금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인천대학교에 오기 전까지 구립 어린이집에서 10년간 일했다. 밥을 하려면 LPG통을 이어 불을 붙여야 했는데 겁이 많은 최씨는 “나 이거 무서워서 못하겠다. 한두 달만 일할 테니 다른 사람 구해달라”고 원장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그러다 10년이 지나갔고, 월급은 8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올랐다. 2005년 소득 3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이 105만원, 2분위 가구 소득은 85만원이었으니 최씨는 하위 30%에 속했다. 2005년의 100만원은 지금의 128만원이었다.
지하철 환승로를 달리는 이들
아이들이 줄어들면서 최씨가 다니던 어린이집은 다른 곳과 통폐합됐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2005년, 최씨는 46살에 인천대에서 용역노동자로 청소를 시작했다. 월급은 70만원(지금의 90만900원)으로 떨어졌다. 그때까지 대학이 직접고용한 미화원이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최씨와 함께 일하며 3배의 월급과 각종 수당을 받았다. 정년이 다 된 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떠나는 동안 학교는 새 직원을 뽑지 않았고 그 빈자리는 용역이 채웠다. 최씨도 직장을 옮기며 소득 분위가 3분위에서 2분위로 한 계단 내려갔다.
12년차 고참인 최씨는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집을 나선다. 63번 버스를 타고 인천 주안역까지 나와 버스를 갈아타고 인천대 송도캠퍼스에 도착하면 오전 6시20분.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누룽지를 끓여먹고 오전 7시에 강의실로 올라간다. 학생들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미화원 2명이 5층 공과대 건물을 깨끗이 치워야 한다.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아침에 마주하는 일터는 반갑지 않다. 강의실 문을 열면 강단 바닥에 붙은 분필 부스러기와 황사처럼 뿌연 칠판이 최씨를 맞는다. 책상 곳곳에 남은 커피잔과 음료수 캔, 버려진 종이와 휴지를 쓸어담을 때마다 “쏟은 음료는 없었으면”이라고 되뇐다.
강의실은 낫다. 화장실 청소는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피로를 동시에 준다. ‘똥지’를 치우고 변기와 바닥, 세면대를 락스 묻힌 수세미와 마른걸레로 세 번씩 닦아야 멀쩡한 모습이 된다. 강의실 8개와 화장실 10곳을 치우면 오전 10시50분. 잠깐 쉬었다 점심을 먹은 뒤 낮 12시30분에 다시 화장실을 돌면서 중노동이 시작된다. 수업이 한창일 땐 강의실 대신 계단 청소가 기다리고 있다. 5층 건물을 오르내리다 보면 하루가 저문다.
지난해 12월 최씨는 근로소득세와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을 떼고 152만5380원을 받았다. 2014년에는 10만원 삭감됐고 2015년에는 동결됐었다. 한 번은 월급이 안 나와 학교 본부를 찾아갔더니 “당신네 회사 가서 받으라”고 했다. 학교는 인천에 있는데 용역회사는 대구에 있었다. 용역회사는 지금도 제주·광주·부산·전주 등 전국을 돌며 1년에 한 번씩 바뀐다. “교섭하다 보면 1년이 다 간다. 딱 2년만 협상 없이 제대로 된 월급 좀 받아봤으면 좋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최씨의 월급이 2005년 83만원에서 2017년 152만원으로 12년 만에 69만원(83%) 오를 때, 통계청이 조사하는 김치찌개백반의 소비자 물가지수는 74.51에서 103.73이 됐다. 2015년을 100으로 치고 환산한 것이다.
“이제는 용역회사 직원입니다”
김치찌개백반이 1.4배 오르는 동안 최씨의 월급은 1.8배 올랐다. 하지만 최씨는 여전히 교통비를 아끼려 뛰어서 지하철·버스를 갈아타거나 환승비 300원을 아끼려고 바둥댄다. 지난해 3분기 근로자가구 하위 10%는 141만3000원을 벌었다. 어린이집 다닐 때와 비교하면 최씨의 소득은 하위 30%에서 하위 10%에 가까워졌다. 같은 기간 초임 사무관이 연금·각종 수당을 제외하고 받는 월급은 109만3800원에서 240만3500원으로 2.19배 올랐다.
일하는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생활 수준이 후퇴하는 것, 오래 일하고 적게 받는 것만이 아니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이 되는 일, 멋대로 임금이 깎이는 일, 차별과 편견을 견디는 일 모두 동의 없이 진행됐다.
강옥자씨가 서울 김포공항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90년 강씨가 동료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 한국공항관리공단(지금의 한국공항공사) 정규직이던 그는 IMF 경제위기가 닥친 뒤 용역회사로 소속이 바뀌었다. 강윤중 기자
강옥자씨(60)는 1987년 처음 김포공항에서 청소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정규직이었고 호봉을 인정받으며 월급 100만원가량을 받았다. 월급만큼 좋았던 것은 800% 상여금과 연말 보너스, 학자금 지원과 정규직 직원들이 가입할 수 있었던 주택조합 등이었다.
이 모든 혜택은 근무 10년차인 1997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당신들은 이제 용역회사의 직원입니다”라는 통보와 함께, 첫 달 명세서에 찍힌 급여는 60만원으로 떨어졌다. 20년 전 월급 액수를 그는 또렷이 기억했다. 월급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는 충격도 컸지만 네 식구가 도저히 생계를 이을 수 없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168만원이던 월급이 100만원으로 떨어진 것과 같다. 강씨는 퇴근 후 식당에서 5시간 서빙과 설거지를 하는 ‘알바’를 하면서 일당 3만원씩을 받아 수입을 메웠다.
“소파 하나 있는 집”이 꿈
텔레마케터를 그만둔 김명희씨는 2006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했다. 2016년까지 하루 두 케이스(가사간병 4시간+장기요양 4시간)를 맡아 110만~120만원을 벌었으나 2017년 3월 정부 정책이 바뀐 뒤 근무시간이 한 케이스당 3시간으로 줄었다. 급여는 90만원으로 감소했는데, 실제로 김씨가 일하는 시간은 줄지 않았다.
최근까지 ㄴ씨(88)의 요양보호사로 일해온 김씨의 공식 출퇴근 시간은 오후 1시30분에서 오후 4시30분이다. ㄴ씨는 하루 두 번 치매·우울증·피부·당뇨·혈압 등 7가지 약을 먹는데 혼자 챙겨먹지 못하는 데다, 때로는 약을 싱크대나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한다. 김씨가 출근하자마자 약을 먹여도 퇴근시간인 오후 4시30분은 저녁 약을 먹이기에 이르다. 그래서 김씨는 늘 30분 정도 더 있다 퇴근한다. 목욕물을 받아둬도 ㄴ씨가 “조금만 있다 하자”고 졸라 시간이 늘어지는 경우가 잦다.
90만원 중 매달 들어가는 적금과 보험료 50만원을 빼면 김씨가 쓸 수 있는 돈은 40만원이다. 자식들이 보태주는 돈을 생활비로 썼는데 자식들까지 병가와 이직을 하면서 용돈이 끊겼다. 김씨는 “수입이 한 달 끊기면 여파가 3개월 간다”고 했다. 일이 끊겨 못낸 11월 공과금은 12월에 번 돈으로 납부하고, 1월에 정산이 된다. 텔레마케터를 하며 하위 20%로 내려갔던 그의 소득은 지금 하위 10%다.
‘모멸’은 월급이 되지 않는다. 김씨가 중국집과 오리고깃집에서 일할 때 진상 손님도 적지 않았다. 50~60대가 둘러앉은 단골 테이블에 음식을 날랐던 날, 술이 취한 그들은 “돈을 줄 테니 노래를 하라”고 시켰다. 취객들은 김씨에게 술을 따르라고 시키거나 억지로 술을 마시게 했다. 김씨는 “저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치는 걸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봉제사 장경하씨도 마찬가지였다. 궁핍한 집안에 돈을 보태려고 평화시장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어렸고 충분히 배울 기회도 없었다. 관리자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말이 많아” “엄마아빠가 그렇게 가르치디” “어디 싸가지 없게 눈을 똑바로 봐”라는 거친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최저임금이 오르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지만, 이들이 바라는 월급은 그리 많지 않다. 김명희씨는 “일하는 시간을 더 늘려도 되니 한 달에 150만원은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몸이 허락하는 한 요양보호사로 계속 일을 할 생각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해봤지만 지금 하는 일이 나에게는 천직”이라고 했다.
청소노동자 최금옥씨는 지금보다 40만원을 더한 190만원을 원한다. 배우자와 함께 ‘소파 하나 들일 수 있는 좀 더 넓은 집’으로 가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30년 가까이 산 19평 전세 아파트도 내외가 살기에 크게 불편하진 않지만 거실에 소파를 들일 정도로 넓지는 않다. 최씨는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65세인 남편도 공공기관 청소 일을 한다. 정부가 내년부터 공공부문 비정규직들을 정규직으로 해준다 했지만 나이가 많아 적용 대상이 아니다. 최씨는 “자식 뒷바라지 끝에 노후 대책은 이제 시작인데, 몸은 멀쩡하지만 나이가 다 돼 일을 관둬야 한다”며 걱정했다.
“인정받으며 살아보고 싶다”
김포공항에서 일하는 강옥자씨는 지금보다 30만원 늘어난 200만원을 희망했다. “열심히 공부해 들어온 정규직만큼 많이 받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일한 만큼, 나라에서 주라는 만큼, 용역회사가 떼가는 만큼은 받고 싶다는 것”이라고 했다. 월급이 늘어나면 퇴직한 뒤에는 학교에 가려고 한다. “국민학교부터 다니고 싶어요. 평생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은 멍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장경하씨도 학교에 다시 가서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인정받는 아이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할 때 대학생들이 꾸린 야학에 다녀본 것이 전부인 그는 요즘 시를 쓴다. “평생 나를 위해 쓴 시간이 없어서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는데, 글을 쓰면서는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요.” 시를 쓰는 소소한 즐거움과 딸의 행복, 바라는 것이 많지 않은 장씨는 “많은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일이 안정적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한민국이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를 늘리면 GDP를 10%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9월 한국을 찾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노동인구에서 여성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30년 만에 ‘10명 중 4명’에서 ‘10명 중 5명’으로 늘어난 이들이 ‘10명 중 6명’으로 오르면 저임금과 불안정고용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경제가 성장할 때 일하는 이들의 월급은 함께 올랐고, 경제가 휘청일 때 나란히 저임금의 질곡에 빠졌다. 이들의 삶을 통해 본 월급의 역사에서는, 꾸준히 시장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늘어남에도 ‘전체 파이가 커지는 것’과 ‘개인의 삶이 나아지는 것’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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