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노동조합은 항상 민주주의의 중요한 행위자였는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가, 노동자의 권리에 타격을 주는가.” “노동시장에서의 남녀 차별을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가.”
프랑스의 인문·실업계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시민·법률·사회교육’ 교과서에 이런 토의 주제가 등장한다. 교과서에는 노동권, 노동법, 노동운동, 노동조합과 같이 ‘노동’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나온다. 학생이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꼭 알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제도권 교육이 노동을 경시하는 것과는 다르다.
2016년 5월10일 프랑스 정부가 의회 표결 없이 노동법 개정안을 발효시키자 낭트 시민들이 반대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의 ‘시민교육’ 교과서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를 담은 이런 사진들과 함께 실업문제나 노동자들의 권리를 가르치고, 학생들이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AFP연합뉴스
유럽 국가들은 ‘시민교육’이라는 넓은 틀 안에서 노동을 다룬다. 또 현장실습을 통해 일하는 것의 의미와 일하는 이들의 권리를 깨닫게 한다. 학교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이 교육에 적극 참여한다. 지난해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고용노동연수원이 발표한 ‘청소년 고용노동교육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 연구’는 해외의 노동교육 현황을 분석한 뒤 “노동교육은 학교 교육의 문제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유지,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지었다.
‘시민교육’ 의무인 프랑스·영국
1980년대 프랑스는 실업률과 인종차별, 학교폭력 같은 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정부는 1985년 초·중학교에 시민교육을 의무화하고 1999년부터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프랑스의 시민교육에서는 공화주의의 가치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학생들은 평등, 정의, 인권, 시민권, 사회적 통합과 연대의 가치를 배운다.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 장면을 담은 사진이나 신문기사가 교과서에 실린다. 학생들이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고, 성인이 된 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실질적인 교육을 한다.
프랑스 초등학교 4·5학년이 배우는 한 시민교육 교과서는 “모든 사람에게는 노동, 자유로운 직업 선택, 적절하고 알맞은 노동 조건, 실업에 대한 보호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세계인권선언 23조를 소개했다. ‘실업’과 ‘노동조합’의 개념을 설명하고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사진을 실었다. 아동노동과 강제노동에 대해서도 다뤘다. 한국의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 중에도 해외 아동노동 사례에 대해 실린 것이 있지만 대여섯 줄 분량에 그친다. 한국의 교과서들 중에는 노동문제보다는 ‘성공한 사업가가 말하는 창업의 비결’ ‘창업계획서 직접 써보기’ 같은 것들이 오히려 더 눈에 띈다.
2002년부터 국가 교육과정에 도입된 영국의 시민교육은 초등학교에서는 학교 교장이 결정하는 선택사항이고, 중학교부터는 의무다. 시민교육은 법적·인간적 권리와 사회적 책임감, 다양성과 상호 존중의 필요성을 전반적으로 다룬다.
영국 교육·고용부장관실 평생교육진흥위원회가 2000년 펴낸 보고서는 시민을 ‘공동체 구성원이고, 소비자이며, 가족 구성원이고, 평생 학습자이면서, 납세자이고, 유권자이고, 그리고 노동자’라고 정의했다. 또 현장실습을 하는 학생을 위해 “고용주들이 시민성의 발전을 위한 교육과정에 노동조합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노동조합총연맹과 교원노조, 여러 산별노조연맹들이 함께 만든 ‘노동조합이 학교 안으로(Unions Into Schools)’라는 사이트는 교사들이 노동교육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와 동영상을 제공한다. 영국 최대의 산별노조 유나이트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노동조합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경제영역에서도 노동교육은 중요하다. 비즈니스·혁신·기능부는 2010년 ‘출발: 일할 권리와 책임’이라는 안내 책자를 내고 노동기본권을 침해당하거나 직장 내 따돌림을 당했을 때 매우 구체적인 대처법을 소개했다. 또 60분 동안 진행할 수 있는 6개 과정의 수업 자료를 제시했다. 노동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 20가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동영상도 제작했다. 노동을 경제를 구성하는 하위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독일·스웨덴은 ‘노동현장’ 중심
독일에는 시민교육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과목이 따로 없다. 노동교육은 크게 두 방면으로 실시된다. 실업과목에서는 주로 노동의 기술적인 측면을 가르친다. 인간과 기술·환경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돕고, 미래 직업선택과 노동생활을 대비한다. 사회과목에서는 노동문화, 노동인권, 노사관계 등 노동의 사회정치적 측면을 다룬다.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모든 교과서들이 서술식 구성을 피한다는 것이다. 교과서들은 모두 객관적인 자료를 나열해 학생 스스로 생각을 정립하는 데에 나침반 역할을 한다. 예컨대 모의 노사관계 놀이를 제안하면서 관련 법률, 행위자들, 사업장의 경영상태, 사회경제 및 노동환경의 변화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들을 제공한다. 학생들이 이 자료를 토대로 협상에 필요한 논거를 만들도록 한다. 노동현장에 직접 찾아가는 현장체험 학습도 활발하다. 노조가 직업학교에서 직접 교육을 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직업학교 투어’ 프로그램도 있다.
스웨덴의 교육 역시 현장실습을 강조한다. 노동교육은 기업과 노조가 합의해 정부가 수행하며, 교육부가 프로그램을 직접 관리한다. 스웨덴의 진로교육·직업체험 과정인 ‘프라오(PRAO)’는 최근 국내에서 자유학기제와 유사한 프로그램으로 자주 언급됐다. 프라오는 한국의 중학교 2~3학년에 해당하는 초등학교 8학년과 9학년 사이 2주간에 걸쳐 진행된다. 학생들이 일찍 일터를 경험하고 눈높이에 맞춰 진로를 탐색할 수 있다. 직업체험 때 학생들이 한국의 근로기준법 중 미성년 노동자에게 해당하는 기본적인 내용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진로지도 교사에게 근로조건에 대한 감독권을 주며 반드시 선임자가 승인해야만 학생들을 작업장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한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도 체계적인 현장실습 과정을 운영한다.
사회과목에서 가르치는 주제도 흥미롭다. 중학교 2학년들이 배우는 한 교과서는 ‘사회보장’을 다루면서 많은 아이들이 입양됐다는 점, 결혼하지 않고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또 실업문제와 열악한 노동환경을 서술하고 ‘실업자가 되었을 때 최악의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노동환경을 나쁘게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노동인권 가르쳐야 할 한국
“노동은 특별한 게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해당하는 중요한 사안인데, 한국은 노동을 비뚤게 보는 시각이 많다.” 송태수 한국기술교육대 고용노동연수원 교수는 “통계상으로도 한국의 고등학생 3분의 1은 노동현장을 경험한다. 졸업하고 바로 사회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동을 편견 없이 학생들에게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이 시험 압박감에서 벗어나 진로탐색 활동을 하는 자유학기제, 자유학년제가 도입되면서 노동교육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송 교수는 “스웨덴에서는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가기 전 모든 권리와 의무사항에 대해 미리 숙지하게 하고 현장에서도 멘토가 교육한다. 그러나 한국은 해당 분야 장인을 불러다가 강의하는 정도라서 노동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학교 현장에 있는 선생님부터 아이들이 노동의 가치와 권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돕고 점차 시민사회, 사업자로 교육 주체를 늘려가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공개한 제보 사례들을 보면 일터에서 맞닥뜨리는 부당한 행위 중에는 임원 집 김장이나 청소 도와주기는 물론이고 강제적인 장기자랑 같은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말할 것도 없이, 기본적인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장차 고용주가 되든 월급쟁이가 되든, 건물주가 되든 프리랜서가 되든 간에 누구나 기본적인 인권 의식을 갖고 있어야 부당한 행위들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정규 교육과정에 ‘시민교육’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교육부와 일부 교육청에 인성교육과 시민교육을 담당하는 ‘민주시민교육과’가 있지만 어린아이들부터 성인들까지 모두 받는 시민교육은 없다. 교사가 수업에 필요하다고 판단해 교육청에 신청하면 경기도교육청이 발간한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를 받을 수 있는 정도다. 초등, 중등, 고등 과정에 맞게 노동, 인권, 평등, 다양성, 평화, 연대, 환경 등 다양한 가치를 다루지만 선택사항이어서 활용도가 낮다.
김원태 서울시교육청 민주시민교육자문관은 ‘궁여지책’으로라도 시민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자문관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도덕과목이나 사회과목에서 분담해 교육하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어려울뿐더러 이미 헌법에 나와 있는 가치도 교육과정 전반에 녹아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을 포함한 실질적인 시민교육이 가능하도록 초·중등 필수교과로 신설하고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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