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X에서 일하다 성희롱을 당한 ㄱ씨는 2016년부터 3년째 법정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상사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당했다고 문제를 제기하자 사측은 그에게 사실상 사직을 종용했고 결국 그는 퇴사했다. 노동청이 성희롱 사실을 인정하고 사측에 징계를 요구하자, 가해자는 징계를 피한 채 다른 회사로 옮긴 뒤 ㄱ씨를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고소했다. ㄱ씨가 겪어온 일들은 성희롱이나 추행 등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도리어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역고소를 당하는 현실,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2차 피해를 당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2015년 STX 법무감사팀에 들어간 ㄱ씨는 그해 7월부터 직속상사 ㄴ씨와 둘이 해외소송 업무를 담당했다. ㄴ씨는 “나 말고 다른 남자들은 모두 위험하니 멀리하라”고 했고, ㄱ씨와 다른 직원이 성적으로 친밀한 관계인 양 몰아가며 ‘행실’을 나무라곤 했다. 여성의 가슴 사진이 담긴 휴대전화를 들이밀면서 ㄱ씨를 좋아하는 동료 직원이 자신에게 보내온 사진이라며 추궁한 적도 있었다. ㄱ씨는 상사의 이런 행동이 성희롱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ㄴ씨는 “문제의 동료가 여자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보내오길래 걱정이 되어 조심하라는 뜻에서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ㄴ씨가 ㄱ씨에게 한 말들 중 상당수는 직장상사의 조언이라 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ㄱ씨가 베트남에 출장을 다녀오자 ㄴ씨는 “출장을 보냈더니 현지 법인장과 술 마시고 놀아났냐” “소문이 퍼져 회사에 난리가 났다”고 했다. “다른 나라 법인장들이 (ㄱ씨를) 출장 보내달라고 난리도 아니다”, “인사팀장이 너를 좋아해서 술자리마다 부른다”, “얼굴이 예쁘고 남자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면 본인이 알아서 조심을 해야지”와 같은 발언을 했고 그 때마다 ㄱ씨는 모욕감을 느꼈다.
ㄱ씨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진정을 했고, 노동청은 직장 내 성희롱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가해자는 오히려 법원에 명예훼손과 무고로 ㄱ씨를 고소했다. 이 때부터 힘겨운 법정 싸움이 시작됐다. ㄱ씨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7개월간 수사기관 조사를 받은 끝에 혐의를 벗었지만 계속해서 2차 피해를 당해야 했다. 가해자는 직장 동료들의 진술서까지 모아 ㄱ씨의 업무 능력이 부족했고 정신질환이 있으며 행실이 바르지 못했다고 비방했다. 검찰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ㄱ씨는 혐의를 벗은 뒤 “가해자의 부당한 고소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민사소송을 냈다.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법은 ㄴ씨가 ㄱ씨를 무고한 점을 일부 인정해 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ㄱ씨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문제를 제기한 것들 중 여러 건에 대해 법원이 “성희롱이 아니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출장 뒤의 발언들에 대해선 “ㄴ씨가 제3자로부터 들은 말을 전달한 것이니 명예훼손이나 성희롱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고, 술자리 운운한 것에 대해서도 “인사팀장이 실제로 술자리를 요구하는 등 근거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희롱이 아니다”라고 했다. 옷차림이나 행실을 지적한 것도 “조심하라는 의미였다”며 성희롱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체 접촉이 없는 성희롱은 형사 처벌이 쉽지 않다. 때문에 ㄱ씨처럼 민사소송으로 이어질 때가 적지 않지만 재판에서 성희롱 발언들은 가해자들 주장처럼 ‘사회 생활에 대한 조언’ 정도로 판단되곤 한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성희롱은 가해자가 ‘조언’이라고 주장하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ㄱ씨는 경향신문에 “노동청에서도 인정 받은 내용을 법원이 성희롱이 아니라고 하니 오히려 내 명예가 더 훼손된 것 같다”며 항소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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