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엠 사태가 흘러가는 모양이 숨가쁘다. 지난달 13일 군산공장 폐쇄 결정이 내려진 지 한달, 2500명이 희망퇴직원을 냈고 한 명이 생을 마감했다. 비정규직은 200명이 잘렸다. 정부와 지엠은 자금지원을 둘러싸고 팽팽한 힘겨루기 중이다. 구성원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한국지엠 공장에서 먹고사는 입은 1만개가 넘는다. 하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비장하고 건조한 어투로 적힌 노조의 공식 성명뿐이다.
이범연씨(56)는 공장문 안쪽과 세상을 잇는 가교가 될 수 있을까. 한국지엠 부평1공장 도장부 직원인 이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 출신이다. 이른바 ‘학출’로, 처음에는 마찌꼬바(작은 공장)를 다녔다. 1989년 받아든 대우자동차 합격통보서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서울대 나와서 왜 공장 다니냐’는 물음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 투쟁하다 구속되고, 해고당하고, 복직하면서 치열하게 살았다.
한국지엠 부평공장 도장부에서 일하고 있는 생산직 노동자 이범연씨가 13일 공장 인근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범연씨는 지난해 12월 노동운동을 다룬 <위장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30년>이란 책을 냈다. 이준헌 기자
30년이 흘러 오십줄에 접어든 동료들은 슬슬 정년퇴직 이야기를 꺼낸다. “요즘 살기도 힘든데 대기업 정규직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야”라는 말도 오간다. 어느덧 ‘귀족노조에 계시네요’라는 비난이 새삼스럽지 않다. 비정규직 이야기를 꺼내면 큰딸은 “아빠, 그게 얼마 뒤 내 모습일지도 몰라”라고 한다. 그가 지난해 12월 펴낸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에 담긴 회고다. 책에는 ‘내부자’가 바라본 대공장 정규직 노조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담겨있다. 13일 부평공장 인근의 한 카페에서 이씨를 만났다.
-공장 분위기는 어떤가.
“공장에 따라 다르다. 군산은 당연히 고용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다. 외주화 계획 중인 정비 분야도 마찬가지다. 희망퇴직은 이 두 곳에서 많이 나왔다. 가동률이 아직 높은 1공장은 신차도 예정돼 있어 불안은 덜하다. 하지만 ‘이거 몇년 못 가는 거 아니냐’는 심리는 모두 똑같다.”
한국지엠 구성원들은 “왜 저들(경영진) 잘못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분노,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는 체념이 뒤섞여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터놓고 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묵묵히 라인을 탈 뿐 부정적인 생각은 속으로 삭힌다. 세대 차이도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정년까지 버티면 되지’라고 생각하지만, 젊은 친구들은 이곳에서 정년을 맞을 거라는 기대를 별로 안 한다”라고 했다.
-입사 후 겪는 두번째 구조조정이다. 뭐가 같고 뭐가 다른가.
“기업 실책을 노동자들이 고통으로 떠안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른 게 있다면 정리해고에 대한 태도다. 대우차 도산 때는 기업도 정리해고의 방침을 밀고 나갔고 정부도 막으려는 별다른 노력을 안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엠이나 정부나 부담을 느낀다. 회사가 상당히 (노동자들에게) 투자를 했다고 본다. 희망퇴직으로만 5000억 가까이 썼다고 한다. 2001년에 비하면 ‘부드러운 방식의 구조조정’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태를 넘긴다고 해고의 칼집이 닫힌다는 보장은 없다. 이씨는 “정리해고는 언제든 회사의 ‘협박 카드’로 쓰일 수 있다. 당장은 아니지만 2~3년 사이에 단계적 철수 등 ‘느린 정리해고’의 가능성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두 번 해고당했다가 복직했다. 위장취업이 들통나 한 번, 2000년 대우차 해외매각 반대투쟁을 하다가 또 한 번이다. 18년 뒤 또 닥쳐온 위기는 ‘올 것이 왔구나’였다. “반복적으로 이런 일들을 겪다 보니 불안한 마음은 크게 없다”라고 했다. 그는 책에서 ‘한국지엠의 위기는 숙명적으로 반복된다’라고 썼다. 지엠의 하청공장이라는 지위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한국지엠 공장이 쉼없이 돌아가던 ‘꿈의 공장’ 시절에도 불안감은 늘상 함께했다. 30년 기름밥을 먹은 그는 어느정도 불안감에 면역이 돼 있는 셈이었다.
-누구의 잘못이고 어떻게 풀어야 하나
“닉 라일리 전 사장도 인터뷰에서 말했듯 한국지엠의 잘못이 아니다. 두 가지가 있다. 지엠의 글로벌 전략 변화와 잘못된 경영 행태다.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지엠은 지엠 경소형차의 전략적 수출기지였다. 그러다 판매지 생산원칙을 내세운 거다. 결정적인 건 오펠 매각이었다. 유럽에서 아예 발을 빼는 것이지 않나. 한국지엠은 항상 위기의 요인을 안고 있다. 경쟁력 있는 신차를 확보하는게 중요하다. 신차를 주겠다는 약속도 계획 단계에서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어 믿기 어렵다. 정부가 자금 지원을 하더라도 철저히 신차개발에만 쓴다는 옵션을 건다든지, 라이센스를 가져온다든지 등 안전장치를 확보해야 한다.”
대우차 시절부터 이어져 온 한국지엠노조 역사에서 이씨의 기여도는 적지않다. 정책실장과 지도고문으로 네 차례 전임자를 맡았다. 노조는 한국지엠 운명을 둘러싼 협상에서 주요 플레이어 중 하나다. 다만 ‘귀족노조’라는 꼬리표가 운신을 무겁게 만든다. 노조 간부의 채용비리 사건처럼 부끄러운 얼룩도 있다. 이씨는 “내부에서도 ‘노조 때문에 회사 망했다’는 책임론이 쏟아질까 봐 부담감이 크다. 지엠이 노조의 양보를 전제로 사업을 유지하겠다고 던진 상태지 않나”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노조의) 양보는 절대 안돼’라는 입장은 아니다. 다만 ‘왜 양보해야 되는지’를 얘기해 달라는 거다. 인건비 삭감이 지엠의 단계적 철수를 위한 비용절감 때문이라면, 양보할 필요가 없다. 한국지엠을 제대로 유지,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이 분명하다면 노조도 비용 면에서 협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는 노조 집행부의 입장과는 결이 다르다. 이씨는 “안에서도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보수 언론에 악용된다’는 걱정이 있다. 그렇게 보지 않는다. 구성원들도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여론과 노조 사이) 벽을 깨야 한다. 그래야 노조의 말도 설득력을 갖지 않겠나.”
그는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불신)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정규직에게 정리해고는 어쩌다 한번 있는 공포지만, 비정규직은 군산뿐만 아니라 부평, 창원에서 항상 겪는 일이다. 이씨는 “노조가 사회문제나 비정규직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떨어졌다. 기업 복지 안에 갖혀서 사회 이슈에 둔해진 거다. 격차가 심해지다 보니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상처’ 이야기를 했다. 대우차 시절의 정리해고 트라우마가 노조를 이익집단으로 변질시켰다고 짚었다. “노동이 ‘꿈’을 잃어버린 거다. 정리해고 이후 내 고용과 임금을 어떻게 지킬거냐, 이 두 가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눈앞의 이익에는 밝아졌는데, 닥쳐올 위기에는 둔감해졌다. “대공장 노조가 단기적인 경제적 이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데는 상당히 최적의 구조다. 1년마다 임금협상으로 조합원 요구를 만족시키고, 2년에 한번 집행부 선거로 인증받고. 단기적 성과에 갇히면서 장기적인 전략을 만드는 데는 무능한 거라고 본다. ‘올 것이 왔다’는 신호는 지난해 카젬 사장이 오면서부터였다. 대응은 해야 되는데, 여전히 관성처럼 임금협상에 매달린 거다.”
이씨는 “그동안 ‘인소싱’처럼 정규직 고용 유지를 위해 비정규직을 대해왔던 방식을 (노조가)공개적으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자리 나누기 등 여러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정규직과 달리 비정규직의 노동강도는 너무 강하다. 연차도 제대로 못 간다. 비정규직 근무시간도 정상적으로 운영하면 고용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면 해고는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머리가 깨지는’ 경험이다. 한국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느끼는 공포다. “불안감과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고 살아갈 방도를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저 ‘늙은 노동자’ ‘평조합원’으로 정년을 맞을 수 있었지만 그는 다시 목소리를 냈다.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의 대답은 ‘하겠다’가 아닌 “해야죠” 였다. 직함을 달고 있지 않은 인터뷰이가 의무감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정년은 두려움처럼 다가오는데 빨리 해방되고 싶기도 하다”라며 웃었다. “그래도 지금같은 시기에는 뭐라도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모아 이야기도 나누고 대안도 제시하고, 대외적으로 알리는 역할은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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