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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화학물질, 안전망이 없다③]생리대 파문, 독일이라면?

ㆍ‘독성물질 119’ 만들자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추모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추모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일회용 생리대 파문이 독일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시민단체가 3000명 넘는 이들에게서 피해사례를 접수했다. 생산업체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4000명이 원고로 나섰다. 온갖 생리대 제품의 부작용 사례도 쏟아진다. 이럴 때 독일에서는 연방위해평가원(BfR)이 나선다. 생리대의 어떤 요소 때문에 생리주기가 짧아지고 생리량이 줄고 자궁질환이 일어났는지 이 기구가 포괄적으로 조사해 정부와 기업이 취해야 할 적절한 조치를 내놓는다.

독일 자를란트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유럽연구소의 김상헌 환경안전성사업단장이 전해준 독일의 ‘화학물질 안전망’이다. 그러나 김 단장은 독일에서는 한국과 같은 ‘생리대 파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낮다고 했다. 화학물질 원재료의 제조·유통 단계에서부터 위험관리를 철저히 하기 때문이다. 요리로 치면 식자재를 꼼꼼히 살피는 식이니, 위험한 음식이 밥상에 오를 가능성이 낮은 것이다. 반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의 화학물질 안전망을 원재료-완제품-피해 발생 이후의 3단계로 나눠 살펴봤다.

화학물질 등록 2030년에야 완료 

화학물질 안전망의 기본은 물건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원료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계기로 이런 관리체계가 늦게나마 만들어졌다. 2013년 입법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이다. 유럽 화학물질규제(REACH)를 모델로 만들었다. 화학물질을 제조·수입하는 기업에 제3의 기관이 평가한 위험 정보를 첨부해 정부에 등록하도록 한 것이 이 법의 뼈대다. 이전의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은 국내 유통 화학물질의 85%에 대해 기업에 유해성 파악 의무를 지우지 않았다.

화평법이 만들어질 때 산업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유해성 평가에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애초 환경부 초안에선 1991년 이전부터 국내에서 상업용으로 유통돼온 ‘기존 화학물질’의 경우 제조·수입량이 연간 0.5t 이상일 때 유해성 정보를 등록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기업들과 경제부처의 반발로 1t으로 수정됐다. 새로 만들어지는 ‘신규 화학물질’은 양에 관계없이 모두 등록해야 한다.

이렇듯 화평법에 의한 화학물질 관리는 이제 걸음마 단계다. 환경부가 추진 중인 화평법 개정안에 따르면 2030년이나 되어야 제조·수입량이 연간 1t 이상인 ‘기존 화학물질’ 7000여종의 유해성 정보가 모두 등록된다. 13년을 더 기다려야 화학물질 대부분의 위험을 데이터베이스화할 수 있는 것이다.

제품 별 소관 부처, 대응 제각각

원료 단계에서의 관리망을 완전히 갖추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온갖 화학물질이 혼합된 완제품, 시민들이 늘 쓰는 생활용품의 허가기준이라도 꼼꼼해야 하지만 이마저도 헐겁다. 식약처는 생리대 품질검사 때 9개 항목을 본다고 하지만 그중 화학물질과 관련된 것은 폼알데히드, 형광증백제 정도다. 20년 전에 만든 항목들이다. EH R&C 환경보건안전연구소 이종현 박사(독성학)는 “제품들은 계속 새로 나오는데 당국의 허가기준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서 “이를테면 이온발생 공기청정기의 경우 제균기능이 인체에 안전한지 사전에 짚어봐야 하지만 허가기준에 이런 항목이 없으면 안전성 검사 없이 그냥 유통된다”고 말했다.

생활용품의 소관부처는 제각각이고, 피해 대응도 따로따로다. 지난해 공기청정기와 차량용 에어컨 항균필터에서 옥틸이소티아졸론(OIT)이라는 유독물질이 나와 문제가 됐다. 환경부가 즉각 조사팀을 꾸려 위해성 평가에 착수했고 뒤에 제품명을 공개하고 회수했다. 가습기 살균제는 소관부처가 불명확해 우왕좌왕하다 2012년 말에야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에 나섰고 이후 환경부가 업무를 이어받았다. 생리대 파문에서 소관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휘발성유기화합물(VOC)에 대한 전수조사만 하겠다고 밝혔다. 생리대에 관한 104종의 화학물질 위해성 평가 연구용역 결과는 내년에야 나온다.

심지어 ‘생리혈 흡수용’으로 신고하지 않은 팬티라이너, 프린터 토너, 눈(雪) 스프레이, 오존발생기, 칫솔살균제는 소관부처도 없다가 지난해 말에야 식약처·환경부 등으로 정해졌다.

화학물질에도 ‘119’가 필요

전문가들은 한국의 화학물질 안전망이 이제 막 만들어지는 단계이기 때문에 피해가 있을 때 즉각 접수해 응급조치를 취하고 역학조사·위해성 조사를 두루 맡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미국의 경우 56개의 독성관리센터(AAPCC)가 전국에 포진해 있다.

임종한 인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시민들은 매일 여러 경로로 화학물질 혼합물에 노출되기 때문에 물질별 관리체계로는 잡아내지 못하는 피해를 여기서 모니터링한다”면서 “시민 피해를 접수해 조사하기도 하고, 신고가 없어도 알아서 감시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제품을 걸러낸다”고 전했다.

독일에는 이와 비슷한 물질중독센터 10곳과 연방위해평가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혹은 일터에서 화학물질에 노출돼 신체에 이상이 생기면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중독센터가 있기 때문에 사업장 책임자는 노동자가 중병에 걸릴 때까지 방치할 수 없다. 한국에선 삼성 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과 희귀병에 걸린 이들이 몇 년째 기업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독일에선 기업에서 쓰는 화학물질의 안전보건자료(MSDS)에 중독센터 응급전화번호가 적혀 있고,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에 전화해 응급조치를 받아야 한다.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약·식품·화장품 등 생활용품으로 인한 독성물질 피해신고를 받고 대응책을 만들고 관련 통계를 수집하는 물질중독센터가 한국에도 빨리 생겨야 한다”며 “이런 기구가 있으면 기업이 무분별하게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지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기고] 토막토막 관리에 곳곳 안전 사각지대...‘화학물질 위험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최경호 |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살충제 계란’과 ‘독성 생리대’가 연이어 한국 사회를 달궜다. 이걸 보며 가습기 살균제 사고를 떠올린 사람은 나뿐이 아니리라. 계란, 생리대, 가습기 살균제. 다른 듯 닮았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드러난 국가의 무능력은 살충제 계란과 독성 생리대에 대한 무책임한 대응과 맞닿아 있다. 모양과 이름은 달라도 문제는 한 가지다. 우리는 독성 화학물질의 도전을 받고 있다. 식탁에서,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독성화학물질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가온다. 그 포위망에서 벗어나기란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회적인 대처, 국가의 화학물질 안전관리 정책이 필요하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불거진 일들은 우리 사회가 가습기 살균제에서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했음을 아프게 드러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어야 한다. 

생리대와 계란의 경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첫째, 지나친 전문화와 분절적 관리를 고쳐야 한다. 30년 전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 사회에서 위험은 지나친 전문화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전문적인 담당부처로 나눠 관리할 때 그 사각지대에서 위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 ‘원인미상 폐질환’의 원인으로 가습기 살균제가 의심됐을 때도 그랬다.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살균제 원료와 제품을 나눠 관리했고 식약처는 손놓고 있었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할지, 누가 조사를 해야 할 지 불명확했다. 여러 전문가들이 이런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화학물질 관리의 사각지대를 없앨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살충제 계란’은 농식품부와 식약처가 생산과 유통 단계를 나눠 관리하는 사이에 우리 식탁에 올라왔다. ‘독성 생리대’는 기저귀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지만 관할부처는 식약처와 산자부로 나뉘어 있고 대응 속도와 수준도 달라 보인다. 최근 축산물의 DDT 오염이 드러났다. 사료 오염이나 축산물 전반의 점검이 뒤따라야 하는 문제인데 당국은 원인을 ‘토양 오염’으로 돌렸다. 농식품부가 환경부로 공을 떠넘긴 꼴이다. 분절적 관리는 반드시 사각지대를 만든다. 통합적인 관리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화학물질 위해성평가가 만능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독성학적 지식에만 의존한 ‘부분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위해성평가의 한계를 보완할 역학 조사같은 환경보건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위해성에 근거한 허용기준을 절대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다. 허용기준 이하라고 해서 ‘무해한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살충제 계란’에 대한 식약처의 최대 섭취량 발표에서는 위해성평가에 대한 맹신이 엿보인다. 다시 벡을 인용하자면, ‘허용기준을 설정하는 사람은 오염에도 협력하는 것이다’. 

셋째, 화학물질에 대한 막연한 공포 대신 일상에서 실천을 쌓아가야 한다. ‘케모포비아(화학물질 공포증)’나 직접 화학제품을 만들어 쓰는 ‘노케미족’의 문제의식은 출발점이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는 화학물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시민들로서는 사용을 줄이는 쪽으로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다. 모기약 대신 모기장을 쓰고, 발수코팅제를 뿌리지 말고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쓰자. 꼭 써야 한다면 필요한 양만 쓰는 것이 두 번째 방법이다. 샴푸나 치약을 적당량만 쓰고 플라스틱 용기나 제품을 덜 쓰는 것도 그런 예다. 불가피하게 사용했다면 깨끗이 닦아 내는 것이 좋다. 

생리대와 계란은 우리 사회에 화학물질 안전망이 없다는 걸 보여준 동시에, 국가와 개인 모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이후 두 번째 경고다. 세 번째 경고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