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아직 가리지 못한 큰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빛만 공간을 메웠다. 적막한 사무실을 채우는건 체념한듯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의 낮은 말소리와 한숨이었다. 사무실 안쪽 회의실에는 접이식 의자와 회의용 탁자가 급한대로 놓였다. 회의실에 들어서니 탁자 오른편에 앉은 외국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여남은 방청객들이 비명처럼 외쳤다. “살인 기업 옥시 물러나라!” “우리 가족 살려내!!” “눈만 껌뻑이지 말고 뭐라고 좀 해봐!!!” 모두 가습기살균제로 건강과 가족을 잃은 ‘사회적참사’의 피해자들이었다.
지난 11일 서울 명동 포스트타워에서는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전원위원회와 제1차 가습기살균제사건 진상규명 소위원회가 열렸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하는 사회적참사 특조위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달 29일 공식출범했다. 하지만 아직 사무실 집기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다. 실제 조사관을 뽑고, 운영 준비를 하는데만 두 세달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벌써 관계자를 소환해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에 나서고 있다. 남은 피해자들의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참사의 문제점은 촌각을 다투며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현안점검이라는 이름으로 첫 회의를 시작하게 됐다”면서 “수많은 피해자들과 국민들의 염원을 모아서 만든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다시는 이런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안전사회를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는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이날 회의에선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살균제로 폐손상을 입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관련 사실 확인 및 의견 청취, 공정거래위원회가 고발한 SK케미칼과 애경의 가습기살균제 ‘표시광고’ 위반사건을 검찰이 불기소 처분에 대해 논의됐다.
옥시레킷밴키저에선 배상지원대표 푸자리 셰카르와 곽창헌 대외협력 전무가 참석했다. 방청객에선 위원들과 옥시 측의 질의가 오갈 때마다 한숨과 분노의 고성이 이어졌다. 피해자 박모씨는 “옥시 관계자들을 보면 감정조절이 되지 않아 말을 이을 수가 없다”며 서면으로 적어온 글을 읽었다. “너무 긴 시간이 흘러버렸고, 저희 피해자들은 힘든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오랜 항의 끝에 마침내 가해기업을 조사한다고 하니까 뒤늦게 사과에 나섰지만, 여전히 자기들에게 유리한 배상규정을 마련하고 일방통행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 저희가 배상을 더 해달라며 합의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법을 통해 응징하고 싶고, 비극적 사건 되풀이되지 않도록 법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일부 국민들은 이미 배상을 받고 끝난 줄 압니다. 그때마다 저희들 마음은 힘듭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내가 운이 없었다고 할텐데 … 특조위에서 마지막으로 진상규명 매진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드립니다.”
현재 폐손상 1·2차 피해자 184명 중 95% 정도가 배상이 마무리된 상태다. 남은 피해자 가족들이 아직까지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테면, 자식을 제대로 떠나보내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다. 옥시에선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얻었을 수입을 보상액으로 계산하면서 ‘최저임금’ 기준을 내세우고 있지만, 남은 피해자들은 ‘통상임금’을 요구하고 있다. “내 아이를 ‘최저임금’ 수준으로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정기준과 배상기준 등 옥시가 제시한 ‘규정’을 둘러싼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남은 가족들은 시간에도 떠밀리고 있다.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사과한 이후, 어느새 ‘마무리’된 이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옥시는 피해자들에게 배상기한을 오는 16일로 통보하며 옥시 측의 제안에 답을 줄 것을 요구했다. 이날 회의가 열린 이유도 옥시 측의 일방적 기한 통보 때문이었다.
안종주 전문위원은 “회사마다 내부적인 목표가 있긴 하겠지만, 현재 피해자들이 무한정 협상을 연장하자는 것도 아닌데 원만한 합의가 바람직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곽창헌 옥시 전무는 “배상 발표를 하고 21개월 지난 상황이며, 피해자들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일일이 고려하기) 어렵다”면서 말끝을 흐렸다. 답변을 듣던 피해자 박씨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마지막 피해자들이 왜 합의 못하는지 아세요? 저희가 합의하면 100% 되죠? 1,2차 피해자 합의 100% 됐다고 알릴거죠? 3,4차 피해자들에게도 ‘이 규정 가지고 합의했다, 따라와야 한다’고 언론플레이 할 거 아닌가요? 그게 저희는 너무 마음이 아프고, 계속 이의 제기하는게 추해보이고 돈 더달라는 거 밖에 안돼서 비참하다구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증언에 이어 최근 검찰이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로 넘겨진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업체들을 불기소 처분한 데 대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입장을 들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2월 공정위가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을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사건을 지난달 29일자로 ‘공소권 없음’ 판단을 내렸다. 공정위는 이들 업체가 ‘독성물질이 들어간 가습기살균제를 정보를 숨긴 채 허위광고를 했다’며 고발했지만, 검찰은 2016년 9월 부로 공소시효 5년이 만료됐다고 판단했다. 공정위는 2013년 4월2일 판매 기록을 확보해 공소시효 연장이 가능하다고 봤으나, 검찰은 업체들이 제품을 수거하고 제조·판매를 중단한 2011년 9월을 기준으로 법리적 판단을 한 것이다. 공정위는 2011년 조사에 착수하고도 잇따라 업체들에 ‘면죄부’를 줬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책임론이 불거졌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인민호 소비자안전과장은 “현실적으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 항고하는 방법은 없다”면서 결정을 수용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최예용 소위원장은 “공정위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기 위해 고발을 한 것인데 피해자 입장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검찰 판단을 수용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면서 “진상규명을 하라는 특조위가 만들어진 취지를 감안하면 기존 관례에 갇힐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해결방안을 찾아야 맞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는 예정된 시간을 한 시간 가까이 넘겨 오후 6시40분쯤 종료됐다. 특조위를 통해 마지막 진상규명의 기회를 얻었지만, 현실적 한계도 다시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최 소위원장은 “사건은 계속 흘러가고 있는데 하나둘 놓치면서 제대로 밝혀지는게 아니라 덮혀지는 것 같아서 어깨가 굉장히 무겁다”면서 “국민들의 관심 속에서 진상조사를 위해 관계자분들이 역할을 제대로 해주셔야 한다”고 회의를 마쳤다.
사회적참사 특조위는 지난해 11월24일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활동하게 됐다. 사회적 참사법은 박근혜 정부 때 활동한 1기 세월호 참사 특조위와 가습기 살균제 사건 국정조사 특위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제대로 완료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시작됐지만, 자유한국당의 반대에 부딪혀 겨우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특조위는 ‘2기 특조위’로 불리는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소위와 가습기 살균제 사건 진상규명 소위, 안전사회 소위, 지원 소위를 뒀다. 활동 기간은 1년이며, 1년 연장이 가능하다. 피해자의 신청을 받아 조사를 개시하고 조사를 마치면 3개월 내에 종합보고서를 작성해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지난달 29일 전원위원회에서 장완익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날 회의를 마치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방문과 안산 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 방문으로 첫 일정을 시작했다. 장완익 위원장은 “진실이 드러나지 않으면 생명 경시로 인한 참사가 또다시 발생할 것이고, 평범한 우리 중 누군가가 또 다른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가 될 것”이라면서 “기업과 국가가 재해 발생의 원인이자 더 큰 사회적 참사로 악화시킨 주체였던 사건들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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