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봄이 왔나 싶으면서도 아직까지 믿지 못하겠습니다.”
노동절을 앞두고 지난 26일 만난 위영일 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 지회장(48)에게 2013년 경향신문에 실렸던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여주며 “얼굴이 상한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뺨을 훑으며 “그냥 힘들었어요”라고 짧게 말했다. 위씨는 2013년 7월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만든 ‘삼성노동조합’의 초대 위원장이었다.
5년이 흘렀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지난 17일 협력업체 직원들을 직접고용하고, 노조활동을 보장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이 80년간 유지해온 ‘무노조 경영’ 기조가 사실상 폐기된 것이다. 최근 검찰이 삼성의 ‘노조 와해’ 문건 수사에 들어가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혐의 소송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등 떠밀려 취한 조치들이다. 노동계에서는 비록 외부 압력에 의한 것일지라도 삼성의 변화가 노동환경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주시하고 있다.
5년 전 삼성전자서비스에 노조를 만들었던 위영일 초대 위원장은 지난달 2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측이 수리기사 등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고 노조활동도 보장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 “봄이 왔나 싶으면서도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김기남 기자
그런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싸우는 동안 위씨는 직장을 잃었고, 감옥에 갇혔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 시도까지 했다. 동지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성에서 노조 활동을 하려 했다는 이유로 벌어진 일이다.
2014년 6월 삼성 본관 앞에서 농성을 하다가 구속된 그는 석달 만에 출소했지만 노조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로 “먹고살기 바빠 아침 일찍 나와 일하다 저녁에는 쓰러져 자기 바빴”고, “뭘 해보고 싶어서 집회에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조합비조차 내지 못해” 평조합원이 됐다. 하지만 삼성과의 힘들었던 싸움은 결코 잊지 못한다.
- 노조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삼성전자서비스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한 것은 2003년부터였다. 사람이 일을 하면 자기 만족 있어야 하지 않나. 단순 노동은 지시에 따라 무언가 마치고 나면 그게 끝이었다. 전자수리 서비스업은 고객이 나를 필요로 해서 부르는 거고, ‘와 기술좋다’ 사람 대접을 받으면 기뻤다. 하지만 노동조건은 갈수록 나빠졌다. 2010년쯤 대법원에서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협력업체를 통해 실제로는 삼성 일을 시키고 있던 삼성전자서비스도 대응에 나섰다. 그 전에는 협력업체에 사장 몫, 직원 몫의 돈을 나눠서 줬는데 위장도급 문제가 불거지니까 돈을 통으로 주고 알아서 분배하라고 했다. 권한이 생기니까 협력업체들이 떼먹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면 임금이 1~2%라도 올라야 하는데 오히려 줄었다. 2012년부터 그렇게 바뀌면서 전국 엔지니어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위씨는 당시 삼성의 주도 아래 협력업체들에 만들어진 ‘노사협의회’가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노동자들의 권리가 아니라 회사 실적에만 관심을 쏟던 기구였고, ‘노동자’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부산동래센터 소속이었는데 협력사마다 노사협의회 위원장을 뽑았다. 정말 엉터리였다. 어떻게 실적을 올릴지만 논의했으니까. 삼성은 협의회의 이름에 노동의 ‘노’자도 못 넣게 했다. 그래서 공식 명칭이 GWP(Great Work Place)였다. 위원장에게 따졌다. ‘법에 보장된 최저임금을 달라, 전태일 열사 시절도 아니고 2013년에 월급 100만원이 말이 됩니까’라고. 위원장은 ‘원래 건당 수수료받는 거 몰랐냐’고 하더라. 노동청에 문의해 최저임금법 위반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프린트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러다 노사협의회 위원장에 출마해서 당선됐다.”
- 노조 결성으로 이어진 과정은.
“영남권 센터의 위원장들끼리 모여서 모임을 만들고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2013년 2월 고용노동부가 이마트에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충격을 받았다. 박근혜 정권에서도 이런 게 되는구나. 삼성과도 싸워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노동조합을 만들지, 노사협의회 테두리 안에서 목소리만 낼지 이견이 있었다. 노무사분들한테 물으니 가장 강력한 게 노동조합, 단체협약이라 해서 ‘그럼 노조 하자!’ 했다. 목소리를 낼 유일한 창구라고 생각했다.”
위씨가 삼성 계열사에 하청 노동자들의 노조를 만든다며 민주노총을 찾아가고 여기저기 알리자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삼성에서 대놓고 노조를 만들면 다 죽는다’고 모두가 손사래를 쳤다. “조직도 안된 상태에서 국회 정론관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하는 건 말이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전화로 ‘이미 조직화돼 있다, 기자회견 못하면 삼성과 싸우는 건 안된다는 생각에 직원들 사기 다 죽는다, 책임질 거냐’고 했다.” 결국 국회 정론관에서 발표를 했다. 그날 하루에만 노조가입서 수백통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회적 관심이 쏠리자 삼성은 ‘위장 폐업’으로 대응했다고 위씨는 말했다. 동래센터를 다른 곳과 합치면서 노조에 가담한 이들은 고용승계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 겁나지 않았나.
“우리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에 감동받았다. 삼성이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씨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찬란한 조명을 받는 삼성 뒤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울고, 자살하고, 거기다 월급은 적고.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지 않나”고 했다. “당시만 해도 법이 해결할 줄 알았는데 결국 아니었다. 불법파견 여부를 조사한 노동청은 ‘논란은 있으나 불법파견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술은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얘기와 무엇이 다른가. 나중에 국감에서 근로감독관 녹취가 공개됐다. ‘불법파견 맞습니다. 모든 자료 보냈어요. 그런데 풍선이 터진 것처럼 윗선이 개입되면서 무위가 돼버렸어요’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당시 서울고용노동청의 근로감독 과정은 ‘윗선 개입’에 따라 왜곡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고용노동부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는 이 사건을 대표적인 노동부의 ‘친기업 적폐’로 보고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판정한 경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 평범한 노동자였다가 그렇게 나서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재계 1위에 모두가 선망하는 기업. 당시 삼성의 ‘고객만족도 1위’라는 성과는 우리 같은 협력사 직원들이 욕설을 참아내며 이룬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똑같이 삼성마크를 달고 일하면서도 최저임금도 못 받고, 정규직들의 성과급 잔치에서도 배제됐다. 오죽하면 배고파서 못 살겠다고 유서를 남겼겠나. 당시 34살에 아이가 둘인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월급이 150만원 찍혔다고 했다. 단합대회를 하는데 밤에 술 마시고 구석에서 울고 있더라. ‘선배님, 월급이 너무 작아요. 못 살아요.’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의 노예로 산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2013년 10월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서 일하던 32살 최종범씨가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겠고, 다들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위씨와 동료들이 노조를 만든 뒤 석달 만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2014년 5월에는 양산분회장 염호석씨가 34살에 역시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노조가 승리할 때까지 시신을 안치해달라’는 유서를 남겼으나 유족이 화장을 해버렸다.
- 염호석씨 시신 탈취 사건은 최근 검찰 수사를 통해 삼성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염호석씨 아버지를 삼성 직원이 불러내는 것을 보고 회유를 하는구나 직감했다. 미행하는 밴이 있어서 잡아다 물어보니 경찰 정보관이더라. 경찰 수백명이 시신이 안치된 병원 뒤편에 대기하고 있었다. 국민을 지켜야 하는 경찰도 삼성이랑 공모한 게 아닌가.”
위씨에 따르면 섬으로 조합원을 납치하듯 끌고가 노조에서 탈퇴하라고 강요한 사건도 있었고, 노조에 들어온 새터민에게 ‘국정원에 알려 북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노동부와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묵살했던 이른바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이 새 정부 들어 재수사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1000명 넘는 조직이었으니 (삼성이) 일을 꾸밀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어둠에 가려졌던 진실이 밖으로 드러나 다행”이라고 말했다.
- 언론에선 무노조 삼성에 ‘봄이 왔다’고들 한다.
“하루아침에 변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기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부터 대비해야 필요할 때 다시 싸울 수 있다. 노조 활동이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됐으면 좋겠다. 노조 없이 경영하는 것을 ‘신화’라고 부르는 이상한 문화부터 사라져야 한다.”
삼성의 노조파괴 공작에 대해 아직 밝혀야 할 것들이 많다.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 위씨는 지난 23일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검찰에 고발장을 냈고, 법원에 해고무효 소송도 제기했다. “우리가 요구한 것들은 모두 법에 보장돼 있는 당연한 일들이었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돼 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없었으면 좋겠다.”
올봄 노동계 ‘최대 화두’ 삼성
“그들은 떨고 있었고, 우리는 담담했다.”
나두식 삼성전자서비스 지회장(47)은 30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삼성이 최근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구조조정 태풍에 휩싸인 한국지엠과 함께 ‘삼성’이 올봄 노동계의 최대 화두다. 삼성의 ‘노조파괴 공작’은 검찰 수사로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 정권과 유착해 ‘경영권 승계’를 시도했다는 의혹을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건까지 맞물려 삼성에 대한 여론은 어느 때보다 악화됐다. 삼성은 협력업체 소속 비정규직 8000~1만명을 직접고용하고 노조와 대화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이런 상황을 돌파하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돌리고, 최저임금을 올리고, 노사정 사회적 대화의 새 틀을 짜고 있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적 흐름 속에 ‘노사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삼성의 ‘노조 인정’ 선언이다.
2015년부터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는 나 지회장은 “130만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조합원들의 투쟁 덕분에 얻은 결과”라고 했다. 2013년 7월 노조가 결성된 뒤 노조 파괴공작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협력업체 ‘위장폐업’이 속출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많았고, 회사에 남은 조합원들도 일감 없이 한 달 고정급 130여 만원을 받으면서 주말에 세차장 알바를 하며 버텼다. 정권이 바뀌니 모든 게 달라졌다. 삼성의 노조 와해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경총을 압수수색한 데 이어, 다음 차례는 삼성 본사라는 전망도 나온다. 나 지회장은 “삼성으로선 돈으로 때우는 직접고용보다 노조를 인정하기가 훨씬 뼈아팠을 것”이라면서 “최고 수뇌부의 결정이 아니면 나올 수 없었을 변화”라고 덧붙였다.
민경민 민주노총 금속노조 미조직비정규사업국장은 “이번 협의는 노동자들이 이제까지 요구했던 것들이 실제 성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과거 현대차는 원청이 사용자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직접 교섭을 하지 않고 정규직 노조를 통해 대리 교섭을 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서비스와 비정규직 노조는 직접 교섭을 하고 있다. 민 국장은 “LG 등 다른 기업들이 삼성의 협의를 지켜보고, 그 결과를 기준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건당 수수료라는 기묘한 임금체계가 적용되던 서비스노동자들을 위한 기준을 마련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덧붙였다.
삼성의 선언 뒤 노조에는 450명가량이 새로 가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조원은 어느새 1000명을 넘어섰다. 지난달 26일 첫 노사교섭을 한 노조는 노동절 다음날인 2일부터 회사와 직접고용 절차, 경력 인정 범위와 임금·복지 등을 본격 협상하기로 했다. 삼성웰스토리 노조도 교섭을 진행중이다. 삼성이 진짜로 노조를 동반자로 인정하려 하는 것인지 확인하려면 앞으로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나 지회장은 “외부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크지만, 이미 검찰 수사로 삼성의 잘못들이 드러났기 때문에 법적 싸움으로 가도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이라면서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과거 정권에서 벌어진 정경유착을 청산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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