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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열전

청소, 김장, 마라톤, 장기자랑...한국의 직장은 ‘갑질 백화점’

2018.2.1 김상범 기자


14만5767건. 지난 100일동안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의 오픈카톡방에서 오간 대화 숫자다. 1만2287명(연인원)이 사장이 김장에 직원을 동원했다느니, 가족여행을 떠나면서 개 사료를 주게 시켰다느니 같은 상식을 뛰어넘는 갑질을 고발했다. ‘왜 직장이 지옥이 됐을까?’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단 두 가지는 뚜렷했다. 한국의 일터가 무법천지라는 것. 이를 고쳐야 한다는 것. 

1일 오후 직장갑질119는 서울시청 바스락홀에서 출범 100일을 기념하는 ‘함께하니 쫄지마!’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직장갑질119는 지난 석달 간 이메일과 오픈카톡방을 통해 받은 제보 및 분석결과를 공개했다. 총 5478개의 ‘갑질’ 제보가 들어왔다. 

1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열린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의 출범 100일기념 토론회에서 토론자들이 발언하고 있다.|김상범 기자


임금체불 문제가 주를 이뤘다. 포괄임금제로 수당을 제대로 못 받았다거나 시간외수당 등을 떼였다는 사건이 1314건(24%)으로 가장 많았다. 직장갑질119는 “특히 1월이 되면서 지난해 12월까지 20.6%를 차지하던 임금 제보는 30.9%로 급증했다”며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기업들의 ‘최저임금 꼼수’가 늘어나고, 직장갑질119도 지속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기타’로 분류된 제보가 두번째로 많은 점이 눈길을 끌었다. 총 830건으로 전체의 15.2%를 차지했다. 고용주가 청소, 김장, 결혼식, 마라톤, 장기자랑 등 개인적인 일을 시키거나 부당한 업무지시를 했다는 내용이 다수였다. 직장 상사나 동료가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직장 내 괴롭힘’이 825건(15.1%)으로 3번째로 많았고 ‘징계, 해고’(490건, 8.9%)와 ‘노동시간’(463건, 8.5%) 등이 뒤를 이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갑질’이라는 키워드로 묶였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었다. 직장갑질119의 설명이다.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 현행법을 위반해도 처벌받지 않고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갑질을 하는 회사, 스스로를 보호할 최소한의 조직인 노동조합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직장인들은 여전히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

직장갑질119에는 241명의 노동전문가, 노무사, 변호사들이 오픈카톡방과 이메일, 네이버 밴드, 직접 면담 등을 통해 갑질 피해자들을 상담하고 있다. 스태프들은 “출범 때만 해도 이렇게 많은 제보가 모일 줄 몰랐다”라고 입을 모았다. 오픈카톡방에는 석달 간 14만5767건의 대화가 오갔다. 노무사와 변호사들은 야간근무 순번을 짜 가면서 익명으로 입장한 직장인들의 하소연을 들었다. 스태프들이 상담을 끝내는 밤 10시 이후로는 오픈카톡방에 ‘상주’ 하는 제보자들이 서로에게 조언을 해줬다. 오진호 직장갑질119 스태프는 “직장인들이 서로의 상처에 공감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직장갑질 119는 “그동안 ‘존재하는 법’조차 여러 이유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즉시 개선 가능한 제도들조차 여러 핑계에 가로막혀 바뀌지 못했다”라며 ‘갑질 타파를 위한 최우선 과제’를 제시했다. 노동법 사각지대인 5인미만 사업장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 포괄임금제 전면 금지, ‘일터괴롭힘 방지법’ 제정 등을 제안했다. 근로감독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근로감독청을 신설하고 ‘익명 근로감독청원제도’를 활성화할 것을 주문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노동부 관계자는 “현 근로감독행정이 체불 사건에 매몰돼 내실있게 진행되지 못한 점을 반영해 감독 행정을 어떻게 바꿀지 검토 중이다”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