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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생태계가 바뀐다](1)제주 바나나·담양 커피·곡성 파파야···‘현실 아열대’ 풍경

갑자기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기후도, 식생도 전혀 다른 동남아 여행지에 온 것 같았다. 야자수를 조금 작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파파야 나무들이 비닐하우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세미 열매 같기도 하고, 커다란 애호박처럼 보이기도 하는 초록색 파파야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지난 21일, 파파야를 보기 위해 서울서 차로 4시간 반 정도를 달려서 전남 곡성군 입면 송전리에 도착했다. 푸성귀가 심어져 있는 밭, 비닐하우스와 경운기가 주변에 보이는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이런 곳에 파파야가 있을까? 파파야 농장 ‘임마누엘 아트팜’ 대표 정재균씨(53)를 따라서 커다란 비닐하우스에 들어가니 갑자기 풍경이 바뀌었다. 이파리 밑에 매달린 열매들을 찍어 친구에게 스마트폰으로 보내니 “외국에 휴가 갔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 21일 전남 곡성군에 있는 파파야 농장 ‘임마누엘 아트팜’에서 농장주 정재균씨와 부인 박경은씨가 잘 자란 그린파파야를 둘러보고 있다. 아열대 과일인 파파야는 20~25도의 온도만 일정하게 맞춰주면 한국땅에서도 잘 자란다. 강윤중 기자


“2018년 8월의 어느 아침. 제주산 올리브를 넣어 만든 치아바타빵과 담양산 커피 원두를 갈아서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식사를 마친 ㄱ씨는 곡성에서 자란 파파야를 디저트로 먹으며 아침을 시작한다.” 공들여 한국산 아열대 작물을 구하는 수고만 감내한다면 지금도 얼마든 가능한 일이다. 올리브, 커피, 파파야. 머나먼 지중해나 동남아, 열대 아프리카에서나 나는 것으로 알았던 이 작물들이 한국에서도 재배되고 있다. 대구사과, 나주배처럼 우리 귀에 익숙한 토착 과일들은 전통적인 생산지들을 벗어나 다른 곳들로 이동하고, 귀에 설은 이국적인 과일과 채소가 농촌 풍경을 조금씩 바꿔간다.

농사만 그럴까. 지리산 개구리와 구상나무는 생애주기가 바뀌고, 제주 해안에는 산호초와 더운 바다 동식물들이 늘어난다. 오로지 기후변화 탓만은 아니겠지만, 분명 점점 높아지는 기온, 달라지는 기후패턴이 큰 요인인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 사람들의 식생활과 라이프스타일, 이주자들의 유입 같은 것들이 영향을 미친다. 온전히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자연은 없다. 나무도 풀도 산도 바다도, 사람들과 ‘교류’하며 모습이 바뀐다. 곡성의 파파야 농장에서 백두대간과 제주 바다까지, 달라지는 한국의 식생을 찾아가봤다.

폼나는 작물? 어려운 작물!

“우리 농장에서는 주로 채소용으로 먹는 그린파파야를 길러요.”

6000평 정도 되는 농장의 4000평가량에는 파파야 나무가, 나머지 2000평에는 애플망고 나무가 자란다. 농장주 정재균씨는 “다른 열대과일도 잘 자랄 수 있는지 보려고 때때로 한두 그루씩 심어서 길러본다”고 했다. 하우스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생김새가 좀 다른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1m 정도 자란 두리안, 수확철이면 열매가 주렁주렁 맺힌다는 바나나가 파파야 나무들 사이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한 꽃무늬 ‘몸뻬바지’를 입은 일꾼들이 수레를 들고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며 파파야를 수확했다.

지난 21일 전남 곡성군에 있는 파파야 농장 창고에서 일꾼들이 이달 수확한 그린파파야를 포장하고 있다. 아삭아삭한 식감의 그린파파야는 이주 노동자들이 채소 요리를 하기 위해서 주로 구매하며 서울의 태국 음식점들로도 공급돼 샐러드 등에 쓰인다.  강윤중 기자

지난 21일 전남 곡성군에 있는 파파야 농장 창고에서 일꾼들이 이달 수확한 그린파파야를 포장하고 있다. 아삭아삭한 식감의 그린파파야는 이주 노동자들이 채소 요리를 하기 위해서 주로 구매하며 서울의 태국 음식점들로도 공급돼 샐러드 등에 쓰인다. 강윤중 기자

“처음엔 재미 삼아 시작했는데, 같이 시작한 사람들은 다 떨어져나가고 어쩌다 보니 저만 남았습니다.” 정씨는 제주도를 제외하면 아열대 작물을 기르는 농가가 한두 곳에 불과하던 2008년부터 농사를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곡성에서 개인사업을 했고, 농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8년 어느 날 그는 흥미로운 공고를 봤다. 주변 금호타이어 공장에서 나오는 산업폐열을 이용해서 하우스 난방을 하는 시설을 지원해준다며, 시범온실을 짓고 농사를 지을 사람을 구한다는 농업기술센터의 공고였다.

이미 이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이들은 굳이 시범온실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어서 시도를 꺼렸지만, 정씨는 “기름값이 안 들면 한 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주변 농민 두 명과 함께 투자를 해서 3000평짜리 온실을 지었다.

“하던 사람들도 때려치우는 농사를 왜 시작하느냐고 주변에서 많이 말렸죠. 저는 원래 하던 사업이 있으니 농사를 ‘재미 삼아서’ 해볼 만한 조건이 됐어요. 뭘 심을까 하다가 이왕 하는 거 특이한 것, 재밌는 것을 심어보자 했죠. 당시에도 기후변화로 한반도 기온이 올라간다는 얘기가 있었고, 제주도에서는 몇몇 선도 농가들이 이미 아열대 과일을 키우고 있었거든요. 용과, 아떼모야, 바나나, 애플망고 같은 것들을요. ‘그럼 나는 파파야를 해봐야겠다’ 생각했죠.”

하다 보니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커져서 정씨는 하던 사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파파야 재배에 뛰어들었다. 근처에 시범온실을 지은 사람들이 손을 떼면 모두 인수해서, 지금은 농장이 초기의 2배 규모로 커졌다. “귀농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눈에는 폼나고 그럴 듯한 작물”이지만, 농사를 계속 지어온 사람들도 손을 뗄 만큼 아열대 과일을 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산업폐열로 겨울에도 난방

파파야는 1년 정도 기르면 꽃이 피고 그 후에 열매를 맺는다. 보통 1~2년 동안 수확은 하지 않고 나무를 계속 길러 덩치를 키운 후에 열매 수확을 한다. 사계절 동안 25도 정도 되는 온도와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면서 햇볕이 잘 들도록 해줘야 잘 자란다. 아열대 과일을 기르는 사람들은 “사람이 좋아하는 환경을 과일들도 가장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이론은 그렇지만, 실전은 또 다르다. 처음 3~4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생육조건을 맞춰줬음에도 파파야가 자꾸 죽어나갔다. 정씨는 “자고 일어나서 세어보면 몇 그루 죽어 있고, 또 다음날 몇 그루가 죽어 있는데 원인을 모르니 속이 새까맣게 탔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뒤적거려도 자료가 없고, 한국에서 파파야를 길러본 사람이 없으니 어디 물어볼 곳도 없었다.

농장 직원들이 파파야를 따서 옮기고 있다. 강윤중 기자

농장 직원들이 파파야를 따서 옮기고 있다. 강윤중 기자

파파야를 많이 기르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필리핀에 나가 있는 지인에게 부탁해 겨우겨우 농가 몇 곳을 찾아가볼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재배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여긴 우리 가족도 못 들어오는 곳”이라며 농장 바로 앞에서 가로막고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한 번은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에서 동남아시아 농장주들을 데리고 정씨의 농장에 견학을 왔다. 이때다 싶어 이것저것 궁금했던 것들을 캐물었다. 돌아온 답은 “한국에서 파파야를 길러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 농부들에게 물어보니 ‘햇볕이 잘 들어오게 온실을 치우고, 잡초가 나지 않게 눌러주는 바닥의 대들도 제거하라’는 거예요. 왜? 자기네 나라에서는 그냥 노지에서 길러도 잘 자라거든요. 추운 겨울이 없으니까. 수확된 상품을 얼마 정도에 팔면 좋겠나 싶어서 필리핀에서 온 노동자한테 ‘그 나라에서는 얼마나 하느냐’고 물어보니 웃어요. ‘산에 가면 널려 있으니 돈 주고는 안 사먹는다’고 해요. 그만큼 동남아시아에서 재배하는 환경이 한국과 천지차이인 거예요. 그나마 우리와 기후 조건이 비슷한 편인 일본 오키나와의 아열대 작물 재배를 공부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그렇게 10년, 아직도 고민이 많지만 수확량을 매주 일정하게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됐다. 일주일에 1~2t 정도, 연간 40~50t 정도를 수확한다. 안정적인 수확량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온도와 습도를 맞추는 일이다. 여름철 하우스 내부 온도가 30도가 되면 그때부터 구멍이 송송 뚫린 공급로로 시원한 바람을 보내 온도를 낮춰준다. 겨울에는 난방을 해서 20도 정도를 유지한다. 다행히 산업폐열을 이용한 난방시설 덕에 겨울철 연료비는 다른 아열대 작물 농장의 30% 수준이다.

“한국에서 아열대 작물을 키우는 데에 가장 큰 애로사항이 난방비거든요. 난방비가 많이 들면 생산단가가 높아져버리니 수입 과일들보다 몇 배는 비싸져서 팔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난방비가 많이 들지 않는 백향과를 사람들이 많이 기릅니다.” 남미가 원산인 백향과는 흔히들 ‘패션프루트’라고 부르는데, 국내에서도 일부 노지 재배를 하고 있다.

아시안 마트로 가는 채소들

‘한국산 파파야’는 누가 먹을까. 정씨는 “농장에서 생산되는 파파야의 80% 정도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먹는다”고 했다. 수확을 하기 전에 미리 출고 물량을 협의한 도매상들이 정씨 농장에서 파파야를 사간다. 이 파파야는 경기 안산을 비롯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시장과 외국인 마트에 들어간다. 정씨는 “가락시장에서 경매로 팔아보려고 몇 번이나 파파야를 싸들고 서울에 올라갔지만 너무 안 팔려서 포기했다”고 했다.

“파파야 효능에 혹한 백화점 같은 데서 팔아보겠다고 물건을 달라고 해서 줬는데, 2주 있다가 ‘더 안 주셔도 된다’고 답이 와요. 아직까지는 한국인들에게 파파야가 친숙한 작물은 아니에요.”

정씨의 농장에서는 달콤한 과일로 먹는 노란 파파야가 아니라 요리할 때 채소처럼 쓰는 그린파파야를 주로 키운다. 잘 익으면 표면은 노랗고, 깎으면 농익은 늙은 호박처럼 주황색에 가까운 색을 보이는 노란 파파야는 열대과일 특유의 구릿한 냄새가 난다. 농장에서 나는 노란 파파야를 깎아서 먹어보니 복숭아처럼 즙이 많고 달콤한데, 확실히 수박이나 멜론 같은 과일에 비해서는 향이 강하다.

[생태계가 바뀐다](1)제주 바나나·담양 커피·곡성 파파야···‘현실 아열대’ 풍경

한국에서는 태국식 샐러드인 ‘솜땀’ 같은 요리에 들어가는 그린파파야가 노란 파파야보다 많이 팔린다. 솜땀은 생선 액젓과 매운 고추를 버무린 매콤한 샐러드로, 태국 음식점에 가면 꼭 있는 메뉴다. 정씨는 “홍대 근처의 유명한 태국 식당들은 거의 우리 파파야를 가져가서 솜땀을 만든다”고 했다.

아열대 채소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 소비자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결혼이주여성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는 아열대 채소를 파는 ‘아시안 마트’가 많고, 아열대 채소를 직접 기르는 농장도 있다. 경남 사천의 죽천리에는 1000평 정도 되는 ‘사천다문화 아열대채소 농장’이 있다. 2015년에 생긴 이 농장에서는 모로헤이야, 인디언시금치, 공심채, 고수, 롱빈, 차요테, 타롱, 비트, 바기오콩 등 9종의 채소를 재배한다.

중남미,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나물’처럼 먹는 생활과 밀접한 채소들이다. 이집트가 원산지로 ‘왕가의 채소’라 불리우는 모로헤이야, 인디안시금치, 공심채는 한국에서 시금치를 먹듯 삶고 볶아서 줄기와 이파리를 먹는다.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롱빈은 ‘줄콩’이라 불리기도 하며 아스파라거스처럼 생겼다. 한국에서도 샐러드 재료로 많이 쓰인다. 덩굴식물로 마치 울퉁불퉁한 애호박처럼 생긴 차요테는 동남아시아 지역 요리에 흔하게 쓰이고, 한국에서는 장아찌를 담가서 먹기도 한다.

농장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들이 농사를 배워서 직접 작물을 기른다. 재배한 것은 주로 경남 지역 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간다. 농장일 자문을 하는 아열대 작물 전문가 손 다니엘 박사는 “아열대 채소는 노지에서 여름에만 키워서 팔 수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쉽게 사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싸다”고 했다.

커피 재배, 온도와의 싸움

“어쩌나, 커피는 여름이 오기 전에 수확이 다 끝나서 열매가 안 달려 있어요.”

지난 20일 전남 담양. ‘담양커피농장’ 대표인 임영주씨(62)는 500평가량의 농장에서 커피를 기른다. 카페처럼 꾸며진 체험학습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소한 원두 냄새가 코끝에 와닿는다. 숙성이 끝난 생두가 농장 한쪽에서 건조되고 있다. 하우스 안에는 심은 지 1년이 안돼 무릎 정도까지만 올라온 작은 커피나무와 천장까지 가닿는 키다리 커피나무가 고루 섞여 있다.

지난 20일 전남 담양의 커피농장에서 농장주 임영주씨가 커피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임씨는 “커피는 사람이 쾌적하다고 생각하는 온도에서 가장 잘 자라기 때문에 올해같은 폭염은 커피나무에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강윤중 기자

지난 20일 전남 담양의 커피농장에서 농장주 임영주씨가 커피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임씨는 “커피는 사람이 쾌적하다고 생각하는 온도에서 가장 잘 자라기 때문에 올해같은 폭염은 커피나무에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강윤중 기자

커피는 대표적인 아열대 작물로 브라질,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등이 주산지다. 남위 25도부터 북위 25도 사이의 열대·아열대 지역은 커피 생산에 적합한 연평균 기온 20도 정도의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어 ‘커피 벨트’라고 불린다.

한국에서도 커피가 나온다. 한국은 커피 벨트에 속하지 않지만 겨울에 하우스에 난방을 하면서 온도를 맞춰주면 재배할 수 있다. 제주, 강릉, 전남 고흥·담양 등 지역의 농가에서는 커피를 재배한다. 전남 고흥의 경우 국내에서 가장 큰 커피 생산지로, 15농가가 7200평가량의 농장에서 커피를 키운다.

임씨를 따라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작 농장 안에는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나지 않았다. 라면처럼 표면이 꼬불거리는 이파리가 무성하게 달린 나무뿐이다. 나무에서는 커피 냄새가 나지 않는다. 잘 익으면 검붉은 색으로 변하는 커피체리를 따서 외피와 과육을 벗겨내는 ‘펄핑’ 작업을 한다. 그러고 나서 일정기간 숙성과 건조를 해야만 ‘생두’가 나온다. 그 생두를 볶아 열을 가하는 ‘로스팅’을 해야만 고소한 커피향이 나는 원두가 된다. 임씨의 농장에서 자라는 커피나무는 5~6월에 꽃을 피운 후 열매를 맺는다. 7월이 오기 전 초여름에 임씨는 커피체리 수확을 마쳤다.

“올해 수확된 것들 중 일부만 로스팅까지 마쳤어요. 커피도 너무 더우면 잘 자라지 못하는 식물인데, 폭염이 시작되기 전에 수확을 다 해서 올해 더위에 크게 피해를 보지는 않았네요.”

폭염에 커피도 지친다

기록적인 폭염은 커피에도 영향을 미쳤다. 올해 너무 더워서 그런지 꽃이 필 시기가 아닌데 피어 있는 것들이 보였다. 임씨가 물었다. “커피꽃 드셔보실래요?”

커피꽃은 잘 말려서 우리면 달큰한 맛과 향이 나는 차가 된다. 임씨가 내미는 커피꽃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씹어 보니 기분 좋은 꽃향기와 단맛이 난다. 커피는 과육, 씨앗, 잎사귀, 꽃까지 모두 버릴 것 없이 식용으로 쓰인다고 했다.

전직 사진기자인 임씨는 은퇴하기 전인 2012년부터 커피나무를 길렀다. 큰 관심 없이 살아오다가 세계 3대 커피 중 하나로 불리는 ‘코나 커피’를 마신 후 그 맛에 “깜짝 놀라” 커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케냐에 출장을 가서 커피 씨앗을 한 줌 얻어온 후 ‘집에서 길러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2012년부터 화분에 씨앗을 심고 기르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도 커피를 키우는 사람이 있긴 했는데, 이런 농장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묘목을 키워서 화훼 공판장에 내놓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분들을 찾아가서 어떻게 기르는지 물어보고, 인터넷을 찾아보며 재배를 했습니다. 인터넷이 가장 큰 선생이었죠.”

커피열매의 과육을 제거하면 ‘파치먼트’라는 얇은 껍질로 둘러싸인 씨앗이 나온다. 임영주씨가 말린 파치먼트의 향을 맡아보고 있다. 강윤중 기자

커피열매의 과육을 제거하면 ‘파치먼트’라는 얇은 껍질로 둘러싸인 씨앗이 나온다. 임영주씨가 말린 파치먼트의 향을 맡아보고 있다. 강윤중 기자

집에서만 키우던 커피는 무려 30그루가 됐다. 50평짜리 하우스를 담양에 짓고 꽃을 피운 묘목을 다 옮겼다. 그때부터 고생의 시작이었다. 커피는 ‘사람이 쾌적하다고 느끼는 기온과 습도’에서 잘 자란다. 난방시설을 갖춘 하우스가 아니라 비닐로만 둘러싸인 곳이어서, 겨울이 되니 온도가 뚝 떨어졌다. 알코올을 가져다가 끓이고, 난로를 피워가면서 온실 안 온도를 15도 이상으로 끌어올리려고 용을 썼다. 임씨는 “자연에서 1도를 올리려면 정말 눈물 나게 별짓을 다해야 한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커피나무 ‘전멸 위기’를 겪은 후 2016년에 제대로 난방시설을 갖춘 500평짜리 하우스를 짓고 지금의 농장을 만들었다.

“아열대 작물은 역시 온도가 제일 관건이에요. 막상 길러 보니 커피나무가 현지 환경에 제법 적응을 잘하는 편이라서 겨울철에 10도나 15도 정도에서도 견디더라고요. 그래도 10도인 채로 오래가면 생리적 장애가 와요. 그래서 단열시설, 난방시설처럼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시설을 잘 갖춰야 합니다.”

다양한 ‘부산물’로 승부수

커피는 다른 아열대 작물에 비해 생산량이 적은 편이다. 파파야는 여러 그루를 심어서 1년 내내 수확할 수 있고, 패션프루트는 노지에서도 키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 하지만 커피는 열매 수도 적고, 1년에 한 번만 거둬들일 수 있다. 기온변화에 민감해 일정한 온도를 잘 유지해 줘야 하니 겨울철 난방비가 많이 들어가서 생산단가도 높다. 한국에 수입되는 원두의 양이 워낙 많고 맛도 뛰어난 데다가 가격도 저렴하니,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한국 원두가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엔 아직까지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국내 커피농장들은 대부분 소비자들이 농장에 찾아와 체험을 한 후에 신선도가 높은 커피를 그 자리에서 마실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낸다.

임영주씨가 화분에 심어 키운 커피나무를 옮기고 있다. 앞쪽 소쿠리에는 수확해 말린 커피열매(검은색)와 과피를 제거한 뒤 말린 ‘파치먼트’가 놓여 있다. 강윤중 기자

임영주씨가 화분에 심어 키운 커피나무를 옮기고 있다. 앞쪽 소쿠리에는 수확해 말린 커피열매(검은색)와 과피를 제거한 뒤 말린 ‘파치먼트’가 놓여 있다. 강윤중 기자

농장체험을 한 뒤 올해 생산한 아라비카 원두로 만든 ‘골드캐슬’을 마셔봤다. 그 자리에서 갈아 낸 커피가루를 종이 필터에 얹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내린 핸드드립 커피는 향이 무척 진하면서 맛은 부드러웠다. 임씨는 “수입해오는 것보다 신선도가 월등히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커피를 마신 후에는 다양한 커피 부산물들을 맛봤다. 커피체리 과육을 갈고 설탕을 조금 넣어 만든 커피잼. 딸기잼보다는 좀 덜 달고, 무화과맛이 나는 것도 같다. 커피체리의 껍질을 말려서 만든 ‘카스카라’는 스낵처럼 먹기도 하고, 차로 우려내 먹기도 한다. 씹어 보니 체리의 달콤한 맛과 커피의 씁쓸한 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커피잎차는 떫은맛이 덜하고 풀향이 좀 더 강한 녹차 같았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한국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일은 몇십년 후를 내다보면 꽤 경쟁력이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커피나무는 대개 석 달 정도의 건기를 지난 뒤 꽃을 피운다. 땅이 충분히 젖을 정도로 물을 공급받아야 하지만 비가 너무 오래 오면 열매를 맺는 데에 지장이 있다. 기후변화로 계절별 기온 차이가 심해지고 건기와 우기의 패턴이 깨지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월드커피리서치(World Coffee Research)에서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세계 커피 수요는 2050년까지 현재의 2배로 뛰지만, 정작 커피를 재배할 수 있는 땅은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다. 세계 다섯 번째 커피 생산국인 에티오피아에서는 기후변화로 사막화가 심해져 80년 안에 커피 재배지의 60%가 사라질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전남 담양의 커피농장에서 올해 수확한 커피열매. 자연 건조한 상태인 이 열매의 껍질을 벗기고 열을 가하면 커피원두가 된다.  강윤중 기자

전남 담양의 커피농장에서 올해 수확한 커피열매. 자연 건조한 상태인 이 열매의 껍질을 벗기고 열을 가하면 커피원두가 된다. 강윤중 기자

농촌진흥청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의 김천환 박사는 “세계적으로 온난화 때문에 고품질 커피를 재배하려면 점점 시원한 곳으로 산지를 옮겨야 하는데, 당장은 아니더라도 한국이 몇십년 후에는 고품질 커피를 생산해내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씨는 “소비자들이 ‘푸드마일리지’(식품의 생산에서 소비자의 섭취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거리)가 짧은 식품을 점점 선호하게 되면, 조금 비싸더라도 한국에서 생산된 커피를 더 많이 찾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2080년에는 경지 62%가 ‘아열대’

우리 밥상에서도 파파야나 공심채 같은 아열대 작물을 시금치나 콩나물처럼 흔하게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한국산 커피가 일상화되는 때가 올까. 낯설던 외국 음식을 익숙하게 여기고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이국적인 농산물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국내에 사는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와 식생활의 교류로 이어지고, 작은 규모이나마 ‘시장’이 형성되는 단계다.

여기에 기후변화라는 요인이 겹쳐지면서, ‘제주도 바나나’를 넘어 생소했던 아열대 작물들의 재배는 계속 늘고 있다. 온난화대응연구소에서 지난해 말 파악해 보니 전국 1725농가가 354.2ha의 땅에서 아열대 작물을 키우고 있었다. 국내 농가들이 아열대 작물 재배를 시작한 지는 10년 정도 됐다. 여주(쓴오이), 공심채, 얌빈, 오크라 같은 채소 12종과 구아바, 파파야, 애플망고, 패션프루트 등 과일 8종이 제주도와 전남·경남 등 남부 지방에서 재배된다.

[생태계가 바뀐다](1)제주 바나나·담양 커피·곡성 파파야···‘현실 아열대’ 풍경

농진청은 2020년에는 아열대 작물 재배면적이 1000ha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아열대 작물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서다. 장기적으로는 기후변화 때문에 아열대 작물 재배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한국 경지 면적 중 아열대기후라고 볼 수 있는 것은 10.1%다. 농진청은 기후변화로 조금씩 기온이 상승하면서 2080년에는 한국 경지 면적의 62.8%가 아열대기후 지역이 될 것으로 본다.

실제로 기후변화로 인해 한국의 농작물 주산지는 5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지난 4월 통계청이 1970년과 2015년 농산물 주산지 재배면적을 분석한 ‘기후변화에 따른 농작물 주산지 이동현황’ 자료를 보면 사과, 복숭아, 포도, 단감, 감귤, 인삼의 주산지는 남부지방에서 충북·강원 등 북쪽으로 올라갔다. 사과의 주산지는 경북 영천에서 강원 정선·영월 등으로, 포도의 주산지는 경북 김천에서 충북 영동 등으로 이동했다. 통계청 사회통계국 농어업동향과는 “사과, 복숭아, 포도, 인삼 등은 (기후변화로 인해) 재배 가능지가 점차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과, 복숭아, 포도 등이 북쪽으로 올라가면 남은 자리는 아열대 작물이 채울 수 있다.

현재로서는 극단적인 날씨가 아열대 작물 재배에 좋은 영향보다는 나쁜 영향을 더 많이 주고 있다.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추운 이상기온은 모든 작물의 성장에 좋지 않다. 정씨는 “올해 폭염 때문에 파파야가 잘 자라서 좋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 정도 폭염에서는 파파야도 잘 못 자란다”고 했다. 바깥 기온이 35도일 때 냉방을 하지 않는 온실 안 기온은 40도, 45도가 된다. 그러면 파파야도 말라버린다. 실제로 몇 그루는 개화를 할 시기가 아닌데 꽃이 피는 이상현상이 나타났다.

지난겨울에는 곡성 일대가 영하 18도까지 떨어져서 파파야가 얼어 죽지 않도록 열심히 난방을 해야 했다. 정씨는 “기온 상승이 도움이 되려면, 겨울에 0도 이하로 안 떨어질 정도로 한국의 기후가 많이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