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투자·복지서비스·적정임금·책임경영’ 새 모델
“저성장시대 일자리 실험”…“지자체 치적용 투자유치”
“성장만 하면 일자리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이제 일자리를 만들어야 성장이 된다고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광주는 고용친화적 산업정책과 사회통합적 노사관계가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줘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2015년 3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에서 ‘소득주도성장과 광주형 일자리’ 토론회를 주최하고 직접 축사를 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후 소득주도성장을 주요 과제로 삼았고, 새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광주형 일자리’ 모델 확산에 주목했다. 노동자와 사용자, 민간, 지방정부가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해 일자리를 만들어보자는 광주시의 이 실험은 현대자동차가 투자의향을 보이면서 탄력을 받는 듯했다가 최근 두 번이나 좌초 위기를 넘기고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지만 고용·복지 안전망은 튼튼해 ‘한국형 유연안정성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주형 일자리 실험이 다른 곳으로도 확산돼 제조업 쇠퇴와 고용 없는 성장, 지방소멸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아니면 지자체의 치적 쌓기용 투자유치 사업으로 끝날지 관심과 우려가 집중되고 있다.
■ 노·사·민·정 타협으로 새 일자리
고용률 64.1%, 1인당 지역 내 총생산(GRDP) 2200만원. 전국 최하위 수준인 광주의 지역 일자리 성적표다. 고용률은 하위권에 그치고 1인당 GRDP도 전국 평균의 70% 수준에 머문다. 인구유출은 2012년 1825명에서 2014년 2997명, 2017년 8118명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순유출 인구 중 20~30대 청년이 66%를 차지한다.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며 활기가 사라지고 있는 지방도시의 일반적 풍경이다.
광주형 일자리의 골자는 노동자와 사용자, 민간, 지방정부가 서로 양보하고 협력해 ‘경제적으로 적정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새 일자리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대기업이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하면 노동자들은 대기업 수준의 고임금이 아닌 ‘적정임금’을 받는다. 적정임금은 국내 완성차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의 절반 수준인 연 4000만원대로 의견이 모아졌다.
대신 잔업과 특근을 없애 법정노동시간을 준수하고,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주거와 교육, 의료, 교통 등 노동자들의 삶에 꼭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연봉을 낮추는 대신 노동시간을 줄이고 복지를 강화하는 삶의 질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하청업체 대금 결제방식을 바꾸는 등 상생방안을 찾아나간다. 노사가 함께 경영에 참여해 ‘책임경영’을 실현한다.
2014년 윤장현 당시 광주시장이 추진하기 시작한 이 사업은 광주시가 조성하고 있는 빛그린국가산업단지에 자동차공장과 부품사 등 복합단지를 조성해 모두 1만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내용으로 구체화됐다. ‘일자리 정부’를 강조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로 고용난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 주목했고, 광주형 일자리 사업 안착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시켰다.
이 모델이 성공하면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청년들을 붙잡을 수 있고, 해외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는 기업들의 국내 투자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거란 기대감도 나왔다. 올 들어 고용상황이 점점 나빠지면서 관심도 더 커졌다. 가장 큰 난관일 거라고 여겨졌던 투자자도 나왔다. 현대자동차가 지난 6월1일 광주시에 사업참여의향서를 제출한 것이다.
■ 투자유치에 급급…‘반값 연봉’
그러나 광주시와 현대차가 본격적으로 세부적 투자협상을 시작한 뒤로 오히려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 사업에 ‘반값 연봉으로 굴러가는 현대차공장이 만들어진다’는 해석이 붙기 시작하면서 모든 사회적 관심이 ‘노사민정 대타협’으로 만드는 일자리 구조 개혁이 아닌 ‘현대차 투자와 반값 연봉’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광주시는 처음 광주형 일자리 모델이 나온 뒤 이 사업을 전담할 사회통합추진단과 노사민정 대화 시스템인 ‘더나은일자리위원회’를 꾸리고 2년간의 논의를 거쳐 ‘4대 원칙’을 내놓았다. 노동자에게 적정임금을 보장하고 적정노동시간을 지키며 노사가 함께 책임경영을 추진하고 원·하청 간 관계까지 개선하겠다는 구상이 담겼다. ‘적정임금’은 광주형 일자리의 핵심이 아니라 구성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지역에서 광주형 일자리 사업에 관여해온 관계자들은 시가 투자를 받는 데만 급급해 노사민정 합의 정신이 실종되고 ‘투자’와 ‘반값 연봉’만 거론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광주시와 현대차 간의 논의과정에서 더나은일자리위원회가 배제되고 초기 논의됐던 적정임금이 아니라 ‘저임금’이 강조되면서 노동계와 학계, 지역시민사회 등의 반발이 커졌다.
박해광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광주형 일자리의 기본 정신은 노사민정의 협치를 기본으로 새로운 산업모델과 노사관계 모델을 만들자는 것이었고 투자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갈수록 핵심은 무시되고 ‘투자를 얼마 규모로 받을 수 있느냐’는 이야기만 나오고 있다”며 “단순히 투자를 받아서 새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기존의 대기업 위주 고임금구조, 불공정한 원·하청관계 관행 등의 문제는 해소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광주형 일자리 논의에 적극 참여해왔던 한국노총은 “협상에서 노동계가 배제됐고 저임금의 나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7월부터 노사민정 협의체에 참여하지 않았다.
자동차회사가 아니라 지자체가 대주주인 자동차공장이 지속 가능하냐는 근본적 의문도 제기된다. 신설되는 공장에는 자기자본금 2800억원, 차입금 4200억원 등 총 7000억원이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시가 자기자본금의 21%인 590억원, 현대차가 19%인 530억원을 각각 투자한다. 현대차가 광주시에 제출한 투자의향서에 따르면 현대차는 이 공장에서 완성차를 위탁생산한다. 광주시는 처음에 친환경차 생산을 원했지만, 1000㏄ 이하의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자동차(SUV)가 생산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의 지분출자 비중이 너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광주형 일자리 사업에 처음부터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지자체 소유의 기업은 경기불황 등의 요인으로 경영위기에 처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지역주민이어서 고용조정(구조조정)을 할 수가 없다”며 “경영상황이 나빠지면 광주시의 추가지원이나 출자 등으로 시가 빚더미에 앉을 수 있고 최악의 경우 파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광주형 일자리의 원칙 중 하나는 정규직 직접고용이지만, ‘반값 연봉’이라는 선정적인 구호를 따라 비용절감에 매몰되다 보면 생산직이 모두 저임금 사내하청 비정규직으로 채워진 기아차 위탁생산공장 동희오토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도 나온다.
■ 급제동 걸린 실험, 방향은 어디로
지역사회와 전문가들의 우려가 깊어지면서 지난 6월 이후 광주형 일자리 사업에는 두 차례 제동이 걸렸다. 광주시와 현대차는 6월19일 문재인 대통령까지 참가하는 광주형 일자리 투자협약 행사를 열기로 했지만 이 행사는 하루 전날 갑작스럽게 무기한 연기됐다. 지역사회에서 이대로 협약을 맺어서는 안된다는 반발이 커졌기 때문이다. 광주시는 7월 이용섭 시장이 취임한 뒤 투자협상에 속도를 내 8월 안에 협약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역시 무산됐다.
광주형 일자리 사업 추진의 컨트롤타워를 맡고 있는 이병훈 문화경제부시장은 지난달 23일 기자회견에서 “광주형 일자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해보는 어려운 일인 데다 업무추진을 서두르다 보니 미숙한 점이 적지 않았다”며 “노사민정 정신에 따라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칙을 갖고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노동계와의 소통이 부족했던 데 대해 사과하고 협상에 노동계를 참여시키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돌고 돌아 광주형 일자리의 본래 정신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시 관계자는 “현대차와도 협상을 계속해나가고 있지만 일단 노동계와 소통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5년 광주형 일자리의 기본 틀을 설계했던 박명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은 “오히려 이번 위기가 광주형 일자리의 원래 목표를 살릴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수석전문위원은 “ ‘투자를 받아 일자리를 늘린다’는 데만 매몰되지 말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잘 듣고 조율해, 생산성을 갉아먹고 투자기회를 제약하며 결과적으로 양극화를 부추기는 노사관계 현실을 개혁해 가도록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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