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해고 이후에 어려워진 건 생계만이 아니었다. 어제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등을 돌렸고, 동네사람 몇몇은 “해고자 가족이래”라며 수군거렸다. 깊은 잠을 자는 날은 일주일에 이틀도 되지 않았고 수시로 우울해졌다. 삶을 놓아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다.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 이후 해고자뿐 아니라 아내와 가족들의 일상도 무너졌다.
2009년 쌍용차 대량 해고 사태 이후 해고자들과 복직자, 그리고 그 배우자들의 건강상태와 심리상태를 들여다본 연구결과가 6일 발표됐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와락’과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 연구팀은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이날 ‘당신과 당신의 가족은 이런 해고를 받아들일 수 있나요’라는 이름의 연구결과 발표회를 열었다. 쌍용차 해고자·복직자와 가족의 심리상태, 사회적 관계, 국가폭력 경험 여부를 종합적으로 조사한 첫 연구결과다.
■ 천안함 생존장병 수준의 트라우마
조사는 설문과 심층 인터뷰 방식으로 4~6월 진행됐다. 해고자 89명(전체 대비 74.1%), 복직자 34명(전체 대비 97.1%)과 해고자의 배우자 28명, 복직자의 배우자 38명이 참여했다. 김승섭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정리해고가 사실상 합법화된 지 20년 가까이 되는데 그동안 당사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정리해고가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시간들을 감내하게 하는지는 얘기된 적이 없었다”며 연구취지를 설명했다.
해고자와 그 배우자들은 비슷한 나이대의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심리상태가 많이 불안정했다. “지난 1주일 동안 우울 증상을 겪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해고자의 89.3%, 배우자의 82.6%가 “그렇다”고 답했다. 복직자는 62.5%, 복직자 배우자는 48.4%로 해고자 부부에 비해서는 낮았으나 평균치보다는 높았다. 김 교수는 “한국복지패널 조사에 참여한 일반 인구와 비교했을 때 해고자는 13.37배, 해고자의 배우자는 8.27배 높은 수치”라고 설명했다.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에는 해고자의 배우자 48.0%, 복직자의 배우자 20.6%가 “그렇다”고 답했다. 지난 1년 동안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참여한 일반 여성들이 자살을 생각한 비율(5.7%)과 비교하면 각각 8.67배, 3.72배나 높다. 김 교수는 “수치가 높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으나 결과를 받아보니 더욱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천안함 생존장병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조사해보니 50% 정도가 자살을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해고자 배우자의 48%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어떤 정도인지를 생각해보실 수 있을 겁니다.”
건강상태도 좋지 않았다. “건강상태가 나쁘다”고 답한 복직자는 30.3%, 복직자 배우자는 17.1%다. 해고자는 50.5%, 해고자 배우자는 42.3%로 나타났다. 해고노동자의 경우 국민건강영양조사와 비교했을 때 일반인보다 20.8배나 ‘건강이 나쁘다’고 응답한 것이다. 2015년 한 차례 해고자들의 건강상태를 조사했던 김 교수는 “당시 나온 수치(39%)보다 압도적으로 증가한 수치”라며 “3년이 지나는 동안 복직하지 못한 이들은 건강과 우울증상이 더 악화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 배우자에게도 DNA 요구…국가폭력과 인권침해
해고는 사회적 관계와 가정의 안정도 깨뜨렸다. “해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고 해고자의 87.8%, 해고자 배우자의 70.8%가 답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한 해고자가 49.3%, 해고자 배우자가 33.3%였다.
연구에서는 해고자와 가족들이 당한 국가폭력과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2009년 파업 이후 해고자의 42.3%, 복직자의 34.5%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해고자의 32.5%, 복직자의 35.7%는 경찰이나 검찰로부터 DNA 시료 추출을 요구받았다. 해고자 배우자 12.5%, 복직자 배우자의 28.1%도 DNA 시료 추출을 요구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이날 발표회에 참석한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은 “행정부나 공권력만 폭력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사법부도 국가폭력을 저지른다”며 “피해자들은 국가에 배신당하고, 기댈 곳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 조사는 가장 비참하고 아픈 상처를 당사자들에게 질문하고 기억해내게 해서 그 결과를 숫자로 만들어내는 것이었기에 질문 하나하나에 고민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이라는 창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정리해고가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고, 기업이 아닌 해고자와 가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며 “이런 고통에 대한 연구는 올해가 마지막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국가기관 폭력 밝혀져도 포털엔 ‘악플’들…일상 공간에서 ‘차별’
“해고노동자의 배우자들은 생계와 육아,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의 걱정까지, 감정적인 에너지를 쓰면서 다 떠안아야 했습니다. 당사자가 가장 힘드니까, 그 외의 것들은 배우자들이 안아야 했죠.”
6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쌍용차 해고자·복직자 가족의 심리·건강상태 연구결과’ 발표회에는 해고노동자의 배우자들도 참석해 발언했다. 해고자 가족대책위원회 대표를 지냈던 이정아씨(44)는 복직자의 배우자로서 이번 조사에 참여했다. 이씨는 “연구결과 발표를 듣는 동안 눈물이 나서 자리에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작년에 남편이 복직하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크는데 무엇이 문제냐, 이렇게 생각하는 시선들을 느낀다”고 말하다가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국가기관이 부당하게 개입한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지만, 포털사이트에 기사가 뜨니까 16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악플들이더라고요. ‘경찰들에게 쇠파이프 휘두르고 화염병 던진 폭력새끼들’이라는 댓글을 봤어요. 한참을 보다가 못 참고 그거 아니라고 댓글을 달았어요. 인터뷰 같은 것에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저의 발목을 잡아요.”
해고노동자의 아내로 해고자·가족 지원단체인 ‘와락’ 대표를 맡고 있는 권지영씨(44)는 “해고자들도 힘들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늘 여성이 그런 (돌봄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측면이 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역할을 적절하게 나누면 됐는데 그러지 못하고 ‘남편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서 기운을 북돋우려고만 했다”고 말했다.
경제적인 압박보다 이들의 마음을 더 깊은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은 동네 사람들, 직장 동료들의 등돌림이었다고 했다. 조사에서 해고자 아내들에게 차별을 경험한 장소를 물은 결과(복수응답) ‘직장·일터’(66.7%), ‘거리나 동네’(33.3%), ‘상점·음식점·은행’(30.0%) 같은 일상적인 공간들이 많았다. 김정욱 쌍용차노조 사무국장은 “10년 넘도록 함께 모임도 하고, 1년에 두 번씩은 가족여행도 같이 다니던 형님이 파업 직후 회사의 ‘관제데모’에 동원돼 나왔는데, 얼굴에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제 앞에 서 있었다”며 “여전히 우리 동료들은 이런 경험들 때문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집 밖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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