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민주노조’ 공식 출범
처음 가면을 벗고 당당히 나선 노동조합…“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동료들 보며 결심”
삼성과 함께 ‘무노조 경영’ 원칙의 대명사였던 포스코에 민주노조가 공식 출범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포스코지회는 지난 16일 비공개 총회를 열고 지회장 등 노조 집행부 5명을 선출했고, 17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노조 출범을 공식화했다. 그동안 회사의 보복조치를 피하기 위해 공식석상에서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던 노조 집행부는 이날 처음으로 가면을 벗고 얼굴과 이름을 드러냈다.
이날 오후 서울 중구 금속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한대정 지회장(41)은 “주변 동료들은 물론 가족도 내가 노조 설립을 주도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며 “오늘 출범선언 후 ‘응원한다’는 문자메시지만 100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가까운 곳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노조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정비 일을 하다 보니 외주협력업체와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외주업체 소속의 한 동료가 감전사했는데, 회사가 과로사로 처리한 일도 있어요. ‘내가 죽어도 그렇게 되겠지’란 생각을 한 적이 많습니다.” 권력과 유착해 정권교체기마다 홍역을 치르는 경영진의 모습도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했던 시대가 지나가고 노동자들조차 파편화돼 노조 조직률이 떨어진 지금 국내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인 포스코에서 노조가 생겨난 것은 ‘우리를 대표할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8년 노동자 대투쟁 바람을 타고 설립된 포항제철노조가 있었지만 회사 방해로 3년 만에 유명무실해졌다. 임금과 복리후생 등 노사협상은 ‘노경협의회’가 맡아 했지만 노조 역할을 했던 건 아니었다. 복수노조 설립이 허용된 뒤 몇 차례 노조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무산됐다. 회사 내의 어떤 조직도 노동자들을 대변하거나 경영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불만이 누적되자 노조 결성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한 지회장은 지난해 정권교체로 노조에 우호적 분위기가 만들어진 뒤 네이버 밴드 등으로 알음알음 사람들을 모았다. 얼마전 개설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는 2000명에 가까운 직원이 모였고 이를 토대로 지난 3일 ‘새노조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오픈채팅방에는 ‘노조 가입 인증’이 줄을 잇고 있다. 한 지회장은 “정확한 조합원 수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1차 목표로 설정한 숫자는 초기에 넘겼고, 이미 다수노조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쉽지는 않았다. 새노조가 출범을 준비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갑작스레 미심쩍은 움직임이 포착됐다. 한국노총은 이날 포스코에 있던 조합원 9명짜리 기존 노조를 재건하겠다고 발표했다. 양대 노총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새노조는 “노노갈등을 조장하려는 시도”라고 본다. 한 지회장은 “해당 노조는 지금까지 활동이 없었고 대다수 직원들은 존재조차 모른다”며 “사측이 대항노조를 만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에 가입하기로 결정하면서 “강성 노선을 따르다 기업 경쟁력을 해친다”는 비난도 안팎에서 나왔다. 한 지회장은 “처음에는 상급단체 없이 기업별노조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기업별노조를 만들려다 탄압으로 와해된 일이 많아서 금속노조에 가입해 힘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새노조는 앞으로 직원들의 권익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포스코 경영을 감시해 진짜 투명한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밝혔다. 한 지회장은 “회사가 경영과 투자를 투명하게 하도록 감시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노동자들만 쥐어짜는 군대식 문화를 개선해나가겠다”고 했다. 노조에 힘이 더 생기면 사외이사를 추천하는 등 경영감시를 제도화할 방법도 마련하는 게 목표다. 사내하청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료이기 때문에 함께 가야 한다는 원칙으로 관계를 닦아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은 이날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새노조에 대해 “아직 설립 안된 것으로 아는데 (설립되면) 당연히 대화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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