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환씨(33)는 5년차 택배기사다. 서울 강남지역의 CJ대한통운 대리점에서 배송 일을 한다. 택배기사들 중 젊은 편이고 체력도 좋아 업무평가는 늘 괜찮다. 지난달에는 일하는 대리점의 소비자만족점수 평가에서 1등을 했다. 하지만 아침마다 박씨가 고객들에게 보내는 배송안내 문자메시지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배송문의 전화를 한 고객도 다른 기사의 이름을 부른다. 회사가 1년 넘게 일감을 주지 않아 다른 택배기사의 사번코드를 빌려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씨는 2016년 일했던 대리점에서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지난해 출범한 택배연대노조 활동도 열심히 했다. 일하던 대리점이 문을 닫은 뒤 이곳저곳에서 다시 택배기사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번번이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노조 활동을 했던 동료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올해 초, 지금 일하는 대리점에서 빈자리가 나왔으니 같이 일하고 싶다고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택배기사 한 명이 그만두는 자리였다. 대리점 사장과 이야기를 끝내고 지점을 찾아갔지만, ‘(사번)코드를 내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일반적으로는 대리점장이 기사 면접을 본 뒤 지점에 기안을 올리면 지점에서 본사 승인을 받아 코드를 발급해주는데, 박씨에게는 코드 발급이 거부된 것이다. 지점 관계자는 “왜인지 알지 않느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씨는 노조 활동 전력이 문제가 됐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는 지금 그만둔 동료의 코드를 받아 ‘차명 배송’을 한다. 워낙 이례적인 경우라 주변 택배기사들은 “아직도 코드가 안 나왔냐”고 종종 묻는다. 고객들에게 이름을 불리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실제 경제적 손해도 크다. “택배는 업체에서 물건을 받아오는 ‘집하’와 고객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배송’으로 나뉘어요. 배송을 많이 하는 건 한계가 있어서 돈을 더 벌려면 집하를 많이 해야 합니다. 나름 젊은 편이고 그동안 성실하게 일해 와서 집하처에서 긍정적으로 봐주시는 경우가 많은데, 계약을 맺기 직전에 ‘다른 사람 코드로 일하고 있다’고 실토하면 열에 아홉은 연락이 안 돼요. 당연한 일입니다. 코드도 없는 저를 어떻게 믿고 일하겠어요?”
노조 활동을 한 뒤 석연치 않은 이유로 취업이 안 돼 남의 코드로 일하는 사람은 박씨뿐이 아니다. 택배연대노조는 8일 오후 국회에서 민중당 김종훈 의원실과 함께 ‘블랙리스트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고 수개월째 동료들의 물건을 받아서 일하는 CJ대한통운 택배기사들의 사례를 공개했다.
경북 경주에서 택배연대노조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이진성씨(53)도 지난해 9월부터 코드를 발급받지 못해 동료 조합원이 떼준 물량을 배송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경주터미널에서 일하는 본사 주재원과 택배노조 경주지회장이 나눈 대화 녹취록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 녹취록에서 본사 주재원은 이씨가 CJ대한통운 본사 앞 기자회견에 참여한 일을 거론하며 “이진성이 본사 앞으로 간 거, 음악 틀고 난리 난 거. 솔직히 바로 전화가 와서 욕 얻어먹었다. 이진성님 이야기가 본사 입장에서는 안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씨는 그 후로 동료가 자기 몫 가운데 4분의1 가량 떼주는 물량을 배송하며 생계를 유지해왔다. 동료가 짐을 싣고 나간 뒤 나머지 짐을 실을 때 등 뒤에 꽂히는 눈빛들에 모멸감을 느낄 때도 많다고 했다. “너 똑똑한 척 하더니 꼴 좋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 모멸감을 모를 겁니다. 아침에 출근했을 때 저한테 물량을 내준 동료 표정이 안 좋으면 불안해요. 혹시 나 때문에 무슨 일이 있나, 회사에서 압력을 받았나…
2015년부터 CJ대한통운 택배기사로 일했던 김명환씨도 노조 활동을 하던 중 일하던 대리점이 문을 닫았다. 그 뒤로 다른 대리점 문을 두드렸지만 거절당하는 상황을 똑같이 겪었다. “채용공고 보고 대리점에 연락하면 반갑게 맞아줘요. 내일부터 일할 수 있느냐 해서 알겠다고 하고 서류를 떼서 가져가면 ‘나간다던 사람이 안 나간다더라’ 같은 이유를 대면서 취업을 거절하는 일이 반복됐어요.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면접을 본 뒤에는 대리점장이 ‘취업불가 명단에 포함돼 있어 사번이 안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지금 다른 택배회사로 옮겨서 문제없이 일을 하고 있다.
CJ대한통운은 일부 대리점과 기사 간의 문제일 뿐 본사가 대리점들의 채용에 관여하지 않으며, 대리점이 기사를 채용해 코드 발급 요청을 하면 기계적으로 코드를 발급해주고 있다는 입장이다. 본사 차원에서 블랙리스트를 운용하거나 취업을 거절하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CJ대한통운이 노동조합 활동 여부를 점검해왔다는 정황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지난 6월 CJ대한통운 강남지점장과 직원들, 택배기사들이 함께 가입된 카카오톡 단체방에는 지점별 노조 가입 현황이 적힌 표가 올라왔다. 직원 실수로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표에는 지점별로 노조에 가입한 직원들의 실명과 탈퇴 여부, 탈퇴 예정 시기 등이 명시돼 있다. 택배연대노조는 “정부가 블랙리스트 실체를 조사해 조직적 개입이 있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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