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을 믿고 만족하던 터였는데 너무 충격이었어요.”
5살배기 아이를 경기도의 유치원에 보내고 있는 전모씨(37)는 최근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공개한 ‘비리유치원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이 명단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씨는 “당장 유치원으로 전화를 할까 했지만 아이에게 불이익이 갈까봐 못했다”며 “이번 기회에 부모들이 내는 돈을 유치원이 제대로 쓰는지 알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 의원이 지난 11일 공개한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2013년∼2017년 감사 결과에 따르면 사립유치원 1878곳에서 비리 5951건이 적발됐다. 적발 금액은 총 269억원이다. 전수조사가 아니라 시·도교육청들이 선별조사를 했는데도 이 정도 비리가 나왔다. 박 의원은 “향후 자료를 확보해 추가로 공개할 것”이라면서 “적발된 유치원 수와 건수, 금액은 더 커질 수 있다”고 밝혔다.
경기도의 한 사립유치원 원장은 정부 지원금과 매달 학부모가 내는 돈으로 노래방, 숙박업소에서 결제하고 명품백과 성인용품까지 샀다. 개인차량 기름값, 차량 수리비, 자동차세, 아파트관리비로도 썼다. 교직원 복지적립금 명목으로 설립자 개인 계좌에 1억8000만원을 쌓아두거나 6000만원을 설립자 명의의 만기환급형 보험에 넣은 곳도 있었다. 교육업체와 짜고 교재비를 실제보다 많이 지급한 뒤 차명계좌로 돌려받기도 했다.
사립유치원 비리가 끊이지 않는 원인은 회계가 투명하지 않고, 이를 제대로 관리감독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정부는 매년 2조원이 넘는 누리과정예산을 사립유치원에 지원하지만 정작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국공립 유치원은 사립 초·중·고교와 함께 국가관리 회계시스템인 ‘에듀파인’을 통해 회계를 상세히 공개하지만 사립유치원은 예외다. 사립유치원에도 같은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정부 계획은 집단휴업도 불사하겠다는 사립유치원들의 반발 속에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사립유치원 단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은 지난해 9월 집단휴업을 예고했다가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로 철회했다. 당시 이들이 아이들을 볼모로 극단적인 카드를 꺼낸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사학기관재무·회계규칙 개정안’ 시행이었다. 유치원 회계 감사를 학교법인과 같은 기준으로 강화한 개정안은 원래 2016년 가을에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사립유치원들 반발로 미뤄져 지난해 9월부터 시행됐다.
그 뒤에도 유치원 재정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비판이 계속 나왔지만 유치원들의 저항이 거셌다. 지난 5일 박 의원이 사립유치원 비리 근절 대책을 논의하자며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한유총 회원 300여명이 토론회장을 점거하고 회의 진행을 막았다. 한유총은 박 의원이 일부의 문제만 가지고 전체 사립 유치원을 ‘비리 집단’으로 매도한다고 주장했다. 한 한유총 회원은 이 자리에서 “사립 유치원은 사유 재산”이라며 “감사를 하려면 공립 유치원을 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가 너무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비리 유치원·어린이집 명단 공개를 요구해온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의 장하나 대표는 “비리가 관행이 된 데에는 사립유치원의 책임도 있지만 감사와 처벌을 약하게 한 교육당국 탓도 있다”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국공립 유치원 취원율을 40%로 늘리겠다고 공약했는데 지금이 기회다. 교육은 공공영역인 만큼 강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전국 4200개 사립유치원과 4500개 국공립유치원 전체에 대한 감사 결과를 공개할지 시·도교육청과 협의해 결정할 것이며, 회계·감사시스템 개선을 포함한 사립유치원 종합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라고 14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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