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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

[기타뉴스]빙하기 때 내려온 멸종위기 ‘기생꽃’의 비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수정2018-10-14 17:27:28
 

기생꽃 | 환경부 제공

한국의 높은 산에 사는 멸종위기 야생화 ‘기생꽃’이 각각의 서식지에서 모두 유전적으로는 동일한 ‘클론’으로 조사됐다.

환경부 소속 국립생물자원관은 원효식 대구대 교수팀과 2016년부터 최근까지 기생꽃을 연구한 결과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낮았다고 14일 발표했다. 기후변화로 여름철 기온이 오르면서 멸종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는 ‘클론’ 기생꽃

기생꽃은 꽃모양이 기생의 머리를 장식하는 장신구와 비슷하다거나 황진이가 울고 갈 만큼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기생꽃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관상용으로 마구 캐는 일을 막기 위해 환경부 보호식물,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리산부터 설악산까지 높은 산지와 습지에 살고 있다.

연구진은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대암산의 기생꽃 집단과 일본·중국·몽골 등 총 13개 집단, 126개체의 서식지 현황을 조사하고, 유전자를 분석했다. 그 결과 국내에선 지리산과 대암산에 사는 개체군을 제외한 나머지 개체군은 집단 내 유전적 다양성이 없는 ‘복제 개체군’으로 분석됐다. 복제 개체군은 겉으로는 각각의 식물이 다른 것들처럼 보이지만, 유전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개체로 이루어진 개체군이다.

국내 기생꽃 집단은 대암산과 지리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좁은 영역에서 사는 작은 집단이었다. 지리산과 대암산의 기생꽃 집단을 빼고는 유전적 다양성이 ‘0’이었다. 집단에 있는 모든 개체들이 유전적으로 동일한 복제 개체(클론)라는 의미다. 1000개 넘는 식물이 모여있더라도 유전자형이 동일하면 유전적으로는 한 개체나 다름없다.

■기생꽃은 왜 클론일까

기생꽃은 가늘고 옆으로 퍼지는 땅속줄기로 무성생식을 해 개체를 늘린다. 식물의 경우 뿌리가 분리되는 ‘포기나누기’와 같은 무성생식으로 번식해서 유전적으로 모체와 동일할 때 복제 개체라고 부른다. 뿌리 줄기가 나뉘어서 번식하면 겉보기로는 떨어져있는 다른 개체로 보여도, 땅속의 뿌리줄기가 연장돼 생겨난 것이어서 유전적으로는 동일하다. 땅속에서 뿌리가 끊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서로 복제개체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생물 다양성의 3대 요소는 생태계 다양성, 종 다양성, 유전자 다양성이다. 이중 유전자 다양성은 동일한 종 내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유전자형을 갖는지를 의미한다. 동일한 종이라도 사는 곳에 따라서 각각 다른 유전자형을 지닐 수 있다. 유전자 다양성이 낮으면 질병이나 환경 변화에 민감하다. 외부에 대응하는 힘이 약하고, 집단 내에서 교배가 이루어져 건강한 집단을 유지하기 어렵다.

유전적 다양성은 겉모습으로 가늠할 수 있지만, 기생꽃처럼 힘든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다양한 유전자 표지를 분석해 유전자 다양성을 수치화한다. 유전자 다양성 지수(He)는 0~1 사이 값을 가지는데, 일반적으로 0.5 이상은 다양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한다. 한국에 사는 기생꽃은 상당수 개체군에서 0으로 나왔다.

■기생꽃의 운명은

기생꽃은 가뜩이나 개체수도 적은 데 유전적 다양성까지 낮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최근 외부 환경도 나빠지고 있다. 기후변화 때문이다.

한대 식물인 기생꽃은 빙하기 때 한반도까지 내려왔다가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온이 오르자,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은 일부 고산지대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들이다. 이러한 환경 변화로 개체군이 줄어들고, 높은 산에 고립되면서 유전자 다양성도 낮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최근 기생꽃의 개화시기는 빨라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생꽃은 7~8월에 개화해 9월에 열매를 맺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무더운 날씨로 올해는 지난해 6월14일보다 열흘 일찍 개화한 것으로 관찰됐다.

연구자들은 기후변화로 기온이 계속 오르면 한국에 사는 기생꽃이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2002년 발표된 국태생태학회지 논문에 따르면, 기생꽃은 여름철 최고기온이 15.6도 이하일 때만 생존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국립생물자원관은 기생꽃을 보전하기 위해 현재 분포 환경과 다른 곳에서 기생꽃을 가져와 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섣불리 다른 집단의 개체를 들여오면, 병해충 적응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기생꽃 | 환경부 제공

기생꽃은 앵초과에 속하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 식물로, 북반부 한대지방에 분포하는 대표적인 지표식물이다. | 환경부 제공

기생꽃 | 환경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