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유치원 비리 공개의 후폭풍이 거세다.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이 갑질 사회에 분노를 일으킨 도화선이 됐던 것처럼, 이번 비리 공개를 시발점으로 그동안 당국과 사립유치원 간 ‘짬자미’ 식으로 유야무야됐던 유치원 비리에 학부모들 분노가 봇물 터지듯 터져나오고 있다.
비리 유치원의 대명사가 된 ‘환희유치원’이 있는 경기도 동탄지역 학부모들은 지난 14일 오픈카톡방을 개설해 교육청과 지자체를 성토했다. 16일까지 700여명이 참여한 카톡방에서 학부모들은 비리 유치원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해온 당국이 근본적인 문제라며, 집회·시위와 항의전화·방문 등의 계획을 논의했다. “최순실도 유치원 부원장 출신” “하는 짓들이 최순실 축소형” “촛불로 나라를 바꾸었듯이 이번엔 부모들이 나서야 한다” “전국적인 움직임으로 가야한다”는 논의들이 오갔다.
동탄 학부모들은 이날부터 모임을 갖고 당국에 비리근절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다음주부터 시작되는 사립유치원 입학설명회들을 당국 대책이 발표될 때까지 미뤄야 한다는 주장,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비리 유치원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전체 유치원 감사결과 공개 요구, 급식시스템 학부모 감시 등 온갖 제안들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분노에 더욱 기름을 부은 것은 사립유치원들의 연합단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의 움직임이었다. 지난해 회계감사 등에 반발하면서 ‘집단휴업’에 나서겠다고 해 반발을 산 한유총은 “사립유치원 전체를 비리집단으로 매도하지 말라”며 이날 기자회견과 집회를 한다고 밝혔다. 공분을 산 환희유치원 원장이 지난해 한유총 집회에서 “교육당국은 사립유치원에 간섭하지 말라”고 발언했던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성난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맞대응 집회를 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비판 여론에 부담을 느낀 한유총은 집회를 취소했다가, 오후에 기자회견을 열고 ‘죄송하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정부에 잘못이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는 않았다.
학부모들이 공통되게 토로하는 것은 명단이 공개된 사립유치원들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박용진 의원의 말처럼 비리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원장이 고가의 가방을 사고 7억원을 횡령한 환희유치원은 상징적인 예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국 시·도교육청이 비리나 회계문제 제보·민원이 많은 유치원들을 대상으로 특정감사 등을 벌인 결과를 보면 대전의 한 유치원은 설립자 휴대전화 요금을 유치원 돈으로 994만원 납부했다. 또다른 유치원은 설립자의 해외항공료 268만원을 교비로 지급했다. 채용 서류에도 없는 운전기사에게 월급을 준 곳, 교회 장로와 목사에게 유치원비로 명절 선물 250여만원어치를 사서 준 곳도 있었다. 부산의 한 유치원은 원장에게 조리사 수당 1858만원을 줬고, 같은 지역의 또 다른 유치원에선 원장이 ‘스승의 날 보너스’ 등으로 1350만원을 챙겼다.
정부는 무상교육인 누리과정이 시행되면서 어린이 1명당 누리과정비 22만원, 방과후과정 지원비 7만원 등 29만원씩을 지원한다. 또 교사처우개선비, 급식비, 학급운영비 등을 별도로 지원한다. 올해에만 1조8000억원의 세금이 사립유치원에 투입됐다. 하지만 이 중 상당수가 원장 개인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감사 내용은 의원의 자료제출 요구가 있기 전까지 공개되지도 않았다. 학부모들은 원장이 어떤 식으로 돈을 쓰고 회계처리를 하든 알 길이 없었다.
경기도교육청 감사관 ㄱ씨는 “사립유치원 원장들은 국가에서 지원받는 돈이든, 학부모들이 낸 돈이든 모두 ‘내 돈’이라고 생각한다”며 “심지어 특수목적사업비인 급식지원금과 방과후과정 지원금은 별도 계좌를 통해 관리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지키지 않는 유치원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학부모들이 유치원 알리미사이트에 공개된 원비가 자신이 직접 낸 원비보다 적다며 연락이 오는데 이런 곳들은 다 문제가 있다고 보면된다”고 덧붙였다.
사립유치원들의 비리가 계속되는 것은 돈이 들고 나는 과정을 기록하는 ‘공식적인’ 회계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유치원은 수기로 장부에 기록하고, 어떤 유치원은 민간 회계시스템을 이용한다. 국공립 유치원과 사립 초·중·고교가 국가에서 개발한 ‘에듀파인’이라는 회계시스템을 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간 사립유치원들은 “소규모 유치원에 에듀파인은 안맞는다”며 반대해왔다. 그렇다 보니 감사도 힘들다. 국가회계시스템의 경우 각 지자체나 교육청이 프로그램 상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지만 사립유치원들은 문제를 확인할 ‘길목’이 없는 것이다.
국고 지원만 할뿐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정부에도 문제가 있다. 전국의 유치원은 총 9029곳으로 국공립과 사립이 절반 정도지만 원아 수 기준(2017년)으로 보면 사립유치원생이 75.2%로 국공립의 3배에 이른다. 국고지원이 유치원 교육의 내실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김남희 참여연대 복지조세팀장(변호사)은 “개인영리사업자들에게 유아교육이 맡겨져 있고, 그들을 관리감독할 공적인 체계가 없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라며 “아이들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돈을 받았다면 유치원들은 이같은 목적에 맞게 (교비를) 써야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는 “회계 기준을 제대로 도입해야 하는 것은 물론 각 시도교육청에서도 정기감사를 통해 제대로 된 관리감독 기능을 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입학관리시스템에도 사립유치원들 ‘몽니’...학부모들 “이 와중에 설명회 가야 하나”
사립유치원 회계비리가 불거진 가운데, 다음주부터 전국 유치원들이 본격적으로 내년 원아들을 모집하기 위한 입학설명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국공립유치원과 사립 초·중·고 회계관리시스템 적용을 거부해온 일부 사립유치원들은 온라인 입학관리시스템인 ‘처음학교로’ 개통에도 반대하며 몽니를 부리고 있는 실정이다. 학부모들은 “유치원 회계감사 결과가 전면 공개되고 비리 근절 종합대책이 나올 때까지 입학설명회도 거부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16일 교육부에 따르면, 다음달 1일부터 유치원을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입학을 지원하고 등록할 수 있는 온라인 시스템인 ‘처음학교로’가 개통된다. 지난해부터 시행해온 이 시스템은 유치원 원아모집 시기에 맞춰 운영된다. 교육부는 최근 교육복지정책국장 주재로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담당자들과 회의를 열고 시스템 관리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일부 사립유치원 단체들이 추가 재정지원을 요구하면서 ‘처음학교로’ 참여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교육부는 유치원 단체가 나서서 집단거부를 하거나 일선 사립유치원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행위를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유치원 모집·선발 방법은 지자체 조례로 정할 수 있도록 유아교육법에 규정돼 있어, 조례가 없는 지역에서는 유치원들이 시스템 적용을 거부하는 것을 완전히 막기는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부에 따르면 현재 관련 조례를 마련해두고 있는 곳은 서울시뿐이다.
지난달 교육부 사전조사에서 전국 사립유치원 4090곳 중에 ‘처음학교로’ 참여 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힌 곳은 100여곳에 그쳤다. 교육부는 조례가 없는 교육청들에서는 정원 충족률이 90%가 넘는 사립유치원부터 참여하게 하고, 내년 상반기 중으로 모든 시·도가 조례를 제정하도록 유도하겠다는 방침이다.
학부모들은 회계 비리, 급식 비리를 저질렀을지 모르는 유치원들에 대책 없이 아이들을 보내야 한다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에선 “감사결과가 모두 나올 때까지는 입학설명회들을 보류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학부모들이 당장 입학설명회에 가는 걸 거부하더라도 사립유치원들은 정원을 충족시킬 것이기 때문에 현재로선 아무 방법이 없어 답답하다”는 의견들이 쏟아졌다.
유치원 비리에 고개 숙인 한유총 "죄송...정부도 문제" 일각선 탈퇴 움직임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이사장 사임, 비대위 구성
“정부가 건의 묵살” 불만도
일부 유치원 “연합회 탈퇴”
사립유치원 모임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깊이 반성하겠다”고 사과한 것이다. 비리유치원 명단 공개로 여론이 갈수록 나빠지자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꿨지만 유치원들이 비리집단으로 몰리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숨기지 않았고, ‘정부탓’이라는 시각도 여전했다.
한유총 비상대책위원회는 16일 수원시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에서 전국 사립유치원 원장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유를 막론하고 학부모님들께 큰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밝혔다. 한유총은 이날 오전 최정혜 이사장이 사임하면서 이사회를 열고 비대위를 구성했다. 이덕선 비대위원장(한국유아정책포럼 회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깊이 반성하면서 유아교육을 한 단계 발전시키겠다”며 사과했다. 지난 5일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개최한 사립유치원 비리 근절 대책 토론회에서 ‘실력행사’로 행사 진행을 막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한유총 측은 ‘모든 사립유치원이 비리 집단으로 매도되는 것은 억울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위원장은 “누리과정비는 유아교육법에 따라 학부모에게 직접 지원되는 것인데, 학부모에게 직접 주도록 교육부에 요청했지만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은 “재무회계규칙과 관련해서는 10여 년간 사립유치원에 맞게 개정해달라고 정부와 정치권에 수차례 건의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비대위는 “이번 사태에 우리 운영자들의 책임도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비리 유치원 명단을 공개한 박 의원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한유총에는 여론과 정부에 불만을 품은 ‘강경파’들이 여전히 많으며, 당초 청와대 부근에서 항의성 집회를 열려다가 취소하고 오후에 사과 기자회견을 하기까지 내부에서 격론이 오갔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유총 관계자는 “일을 추진하는 속도나 방식에서 회원들의 불만이 있었다. 최정혜 이사장이 수용해 사퇴하신 것”이라며 “명단에 없다고 강 건너 불 구경할 일이 아닌만큼 한유총이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유총이 오히려 악화된 여론에 기름을 붓자 일선 유치원들 사이에서 탈퇴 움직임도 일고 있다. 경기도의 한 사립유치원은 이날 오후 “연합회를 탈퇴한다”는 안내문을 냈다. 박 의원이 공개한 비리 유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던 곳이다. 유치원 측은 “회계질서를 문란하게 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면서 한유총에서 탈퇴한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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