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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돈 벌기

죽음 부르는 ‘노동시간 특례조항’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옆에서 열린 버스노동자 장시간 운전 철폐를 위한 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옆에서 열린 버스노동자 장시간 운전 철폐를 위한 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과중한 업무 때문에 오전 6시부터 ‘무료노동’이 시작됩니다. 몇분 더 쉬고 싶어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계단을 뛰어다니다가 오후 9~10시나 돼야 퇴근합니다. 살려고 직장에 들어왔지 죽으려 들어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집배원 ㄱ씨)”

“버스 운전하다 졸리면 청양고추를 씹기도 하고, 이쑤시개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졸음이 사라지지는 않아요.(버스기사 ㄴ씨)” 

‘노동시간 특례업종’을 규정한 근로기준법 59조가 도마에 올랐다. 집배원들의 잇딴 과로사와 최근 경부고속도로 버스 참사 등 안타까운 죽음이 계속되면서, 장시간 노동을 조장하는 주범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59조는 특정 업종에 대해 주 12시간을 넘는 연장노동이나 휴게시간을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해당 조항의 개정 논의를 앞두고 “무제한 노동을 막아 달라”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27일 국회에서는 정의당 이정미 의원실 주최로 ‘사람잡는 근로기준법 59조 폐기를 위한 노동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시민 안전과 직결된 운수업 종사자들의 불안감이 특히 컸다. 6년 넘게 버스운전을 한 임환학씨는 “아침부터 일하기 시작해도 새벽에야 일이 끝나 회사 앞 찜질방에서 눈 붙이고 실제 잘 수 있는 시간은 3시간도 안 된다. 그리고 다음날 18시간에서 20시간 가까이 운전을 한다”라고 말했다. 버스기사들의 과로는 지난 9일 2명의 사망자를 낸 경부고속도로 사고처럼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 지난 24일에는 광주의 한 시내버스 기사가 운전 중 심근경색으로 돌연사하기도 했다. 지난 5월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민간 시외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의 하루 최대 근무시간은 평균 17시간에 달한다.

27일 국회 앞에서 한국노총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민주노총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택시업종 노동시간 특례 폐지와 노동관계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27일 국회 앞에서 한국노총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민주노총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택시업종 노동시간 특례 폐지와 노동관계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대노총 택시노조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졸음운전은 버스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근로기준법 59조 폐기를 촉구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택시기사 노동시간은 월 233~288시간에 달하며, 사고율도 50%~60%를 상회한다. 특히 택시업계의 경우 정확한 노동시간 측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소정근로시간을 노사 합의로 정하도록 한 근로기준법 58조까지 적용받고 있어 저임금 문제도 심각하다. 사업주들이 최저임금 인상분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일부 지역 법인택시의 경우 소정근로시간을 2~3시간까지 줄여버리는 경우도 잦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오는 31일 법안심사소위를 열어 근로기준법 59조 개정 논의를 시작한다. 환노위에는 특례조항과 관련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8건이 올라와 있다. “근로시간 특례업종을 26개에서 10개로 축소(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근로시간 상한을 60시간으로 제한(홍영표 더민주 의원)”“근로시간 특례규정 삭제(이정미 정의당 의원)”등이다. 현재 버스 같은 노선여객운송사업은 특례업종에서 제외하는 방향으로 공감대가 모아지고 있다.

근로시간 특례 조항은 1961년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당시 특례업종은 운수업·통신업·보건업 등 12개였으나 산업분류표가 변경되면서 26개까지 늘었다. 올해만 12명이 숨진 집배원은 특례업종인 통신업으로 분류된다. 특례조항 기준인 ‘공중의 편의’와 크게 관련이 없는 방송산업도 마찬가지다. 2014년 영화산업노조에 따르면 방송 스태프의 경우 월평균 311시간 이상 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 이한빛 PD의 자살도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기준 특례업종에 해당하는 사업체는 전체의 60%가 넘고, 종사자 비중은 42.8%에 달한다. ‘예외 조항’이 모법인 근로기준법이 정한 ‘1일 근로시간 8시간’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특례업종의 일부 축소보다는, 근로기준법 59조의 폐기 혹은 전면 손질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국이 특례규정 입법시 참고한 일본은 1987년 노동기준법 개정을 통해 주 40시간인 법정근로시간을 특례업종에 한해 주 44시간까지 설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1주 상한선을 두고 특례를 활용하도록 했다.

민변 노동위원회 정병욱 변호사는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정한 1호 협약은 공업부문 사업장에서 노동시간을 1일 8시간, 1주 48시간으로 제한하는 것이었다”라며 “한국은 100년 전 국제적으로 정한 기준에도 벗어난 근로기준법을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변호사는 “공중보건·안전 관련 업종 등 꼭 필요한 부분에는 특례가 적용될 수 있다 하더라도, 상한선도 없이 광범위하게 무제한 노동을 허용하는 조항은 대폭적인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