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18시간을 근무하고 새벽부터 운전대를 잡은 버스기사의 졸음운전으로 1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대기업 직장인이 자살하고, 집배원들은 우편물을 배달하다가 거리에서 쓰러진다. 4차 산업혁명을 눈앞에 두고, 과로사라는 전근대적인 죽음에 내몰리는 노동자들이 늘어만 간다. 초과근무와 야근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과 삶의 균형, 연간 1800시간대 노동시간 정착.” 문재인 정부의 공약이다. 노동계에서 오래 전부터 외쳐온 요구에 정치권도 응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 68시간에 달했던 법정 최대노동시간을 52시간까지 줄이고, ‘무제한 노동’을 가능케 했던 근로기준법 일부 조항 개정에 착수하는 등 발을 내딛고 있다.
■근로기준법상 1주일은 5일? 7일?
하루 8시간씩 주 5일 근무. ‘주 40시간 원칙’은 국제노동기구(ILO)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적정 수준”으로 제시한 노동시간이다. ILO가 1935년 제47호 협약으로 채택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은 2011년에야 이 협약을 비준했다. 하지만 아직 원칙과 현실의 간극은 크다. 실질적인 최대 노동시간은 68시간까지 훌쩍 늘어나 있는 상황.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법정 기준부터 확실히 정리해야 하는 이유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을 넘길 수 없다. 노사 합의 하에 가능한 12시간 연장근로를 더하면 최대 노동시간은 주당 52시간이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1953년 이후 줄곧 정부는 “근로기준법상 1주일은 근로의무가 있는 5일”이라고 해석해 왔다. 이에 따르면 토·일 노동은 연장근로에 포함되지 않는다. 주 40시간과 연장근로 12시간, 거기다가 휴일 이틀의 16시간을 더해 68시간이 최대 노동시간이 된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는 쪽으로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지난 3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야 의원들은 “1주는 휴일을 포함한 7일이며 주당 최대 노동시간은 52시간”이라는 내용을 근로기준법에 넣기로 잠정 합의했다. 다만 주 8시간의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는 것과, 휴일수당 중복할증 문제를 두고는 의견이 갈린다. 지금은 휴일근로는 연장근로가 아니라는 고용노동부 해석 때문에, 휴일에 일을 시켜도 사용자는 통상임금의 50%에 해당하는 가산금만 주면 된다.
휴일근로가 연장근로에 포함되면, 휴일에 나와 일하는 사람에게는 휴일수당과 연장수당을 더해 통상임금 100%에 상당하는 가산금을 줘야 한다. 경영계는 “부담스럽다”고 하고, 노동계는 “법리 상 휴일·연장수당 중복 할증은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주 68시간마저 넘어서는 ‘무제한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조항도 논란거리다. ‘근로시간 특례조항’인 근로기준법 59조다. 운수·통신·보건 등 26개 업종에 한해 주 12시간으로 정해진 연장근로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사업체의 60.6%, 전체 종사자의 42.8%가 특례업종에 해당한다. 예외(특례조항)가 원칙(주 40시간 노동)을 흔든 셈이다. 집배원 과로사, 버스 졸음운전 등이 잇따르자 지난달 31일 환노위 법안심사소위는 특례업종을 26개에서 10개로 줄이고 여객버스업도 제외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버스를 제외한 나머지 운수업은 여전히 특례로 남아 있어, 택시기사처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다른 직종들의 불만을 샀다. 노동시간 특례조항 자체를 손보거나 전면 폐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345만명, ‘연장근로 한도 초과’
노동시간 단축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이를 가늠하려면 주 40시간, 혹은 주 52시간보다 더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봐야 한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종사자 1인 이상 사업체들의 월평균 총근로시간은 171.1시간이다. 이를 매달 평균 일하는 날 수인 21일로 나누면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8.14시간이다. 근로기준법이 정한 하루 노동시간 8시간을 크게 웃돌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균치’이다. 일감이 들어오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거나, 계절적 영향을 받는 많이 업종은 특정 시기에 주 52시간을 넘게 일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야근이 당연시되는 기업 문화에 비춰 보면 조사대상 기업과 노동자가 1~2시간 정도의 초과근무는 줄여서 응답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2015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주 40시간을 넘겨 연장근로를 하는 사람은 1042만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었다. 연장근로 한도인 주 52시간을 넘겨 일하는 노동자는 345만여명(17.9%)이고, 과로사 기준인 주 60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자는 113만여명(5.9%)으로 나타났다.
장시간 노동에 의존해 온 기업들은 노동시간을 줄이면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기업 주문을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 협력업체들이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연장·휴일노동을 하는 경우가 잦다. 게임업계에서 출시를 앞두고 철야에 돌입하는 ‘크런치 모드’도 비슷한 사례다. 이런 기업들은 “근로시간 단축을 입법화하기 전에 고용 유연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중소기업이 합리적인 방향으로 교대제 근무를 개편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새 설비를 도입하는 걸 지원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대체로 3조2교대, 4조3교대 같은 하루 8시간 근무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근무제도를 개편해온 데 반해, 소규모 사업장일수록 적은 인력으로 생산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2조2교대, 주야 맞교대 등 ‘낡은’ 교대제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배 연구위원은 ”업종별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노사가 맞춤 해결방안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부품 하청업체들에게는 그동안 낮은 가격에 납품을 받아온 원청의 지원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떨어질 수도 있다. 고용노동부는 주당 최대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면 노동자들의 월평균 임금은 12.7%인 38만8000원 감소할 것으로 본다. 노사 담합이 장시간 노동 관행을 초래한 측면도 적지 않은 까닭이다. 회사는 연장·휴일근무를 시키는 대신 추가채용과 교육훈련 비용을 아끼고, 기존 숙련 노동자들은 초과근무 수당을 챙겨온 것이다. ‘초과근무로 노동자 생계비를 보전한다’는 논리는 장시간 노동의 굴레를 쉽사리 벗지 못하는 주된 원인이었다.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저임금이 장시간 노동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노동이 저임금 구조를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라며 “그런 논리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대기업 노동자들에게까지 장시간 노동 관행이 퍼져 있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박 교수는 “노동조합도 노동시간을 줄여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임금 축소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연간 1800시간, 가능할까
노동시간 관련법을 개정하더라도 과제는 남는다. 정부가 목표치로 삼고 있는 OECD 평균 연간 노동시간은 1800시간이다. 1년 52주로 나누면 주당 34시간 꼴이다. 모든 기업들의 연장근로를 금지한다 해도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다. 법정 상한시간을 확립하는 것은 ‘출발선’에 불과할 뿐, 추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휴가일수를 늘리고 연차사용을 의무화하는 등의 대책이 거론된다. 주 35시간 근무가 일반적인 유럽연합(EU)은 연간 최소 4주 이상의 연차를 권고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2013년 기준 평균 14.2일의 연차가 주어졌고, 실제 사용일수는 8.6일이었다. 평균적으로 연차의 40%에 가까운 5.6일을 쓰지 못하고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연차휴가 사용률을 두 배 이상 높이고, 산업별로 연차 사용률을 모니터링 하는 것같은 대책이 필요하다”며 “영세 중소기업들은 고용창출 지원금을 노동시간 단축과 연계해 패키지 형태의 제도를 꾸려야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노동시간을 줄이면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기업들이 고용을 늘릴 것이라는 계산이다. 2015년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주 52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일 때 11만2000~19만3000명, 특례업종까지 주 52시간으로 단축할 때에는 15만7000~27만2000명의 추가 고용여력이 생길 것으로 추산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가장 큰 목적이 고용 창출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기업들은 추가고용 대신 기술혁신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정부의 산술적인 예측과 맞아 떨어질 지는 미지수이고, 일자리 효과가 신통치 않을 경우 정책 추진력이 오히려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태주 교수는 “외국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이 고용을 늘린다는 주장과 아니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라며 “노동시간 문제는 일자리 창출보다는 일과 삶의 균형이나 산업안전처럼 산업혁명 시대로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목표의식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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