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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김군, 홍양 되지 않겠다” 구의역에 모인 특성화고·마이스터고 학생들

‘특성화고등학생 권리연합회’를 결성한 특성화고 학생들이 26일 오후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승강장에서 현장실습생들의 노동권 보호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지난해 5월 현장실습 업체에 취업해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김모군이 숨진 구의역 9-4번 승강장에 모여 “제2의 김군이 될 수는 없다”면서 ‘학생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강윤중 기자

‘특성화고등학생 권리연합회’를 결성한 특성화고 학생들이 26일 오후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승강장에서 현장실습생들의 노동권 보호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지난해 5월 현장실습 업체에 취업해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김모군이 숨진 구의역 9-4번 승강장에 모여 “제2의 김군이 될 수는 없다”면서 ‘학생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강윤중 기자


“구의역 사고,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의 죽음. 매년 반복되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특성화고 학생들은 취업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또 다른 아픔이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26일 오후 1시 서울 2호선 구의역, 여름방학이지만 교복을 갖춰 입은 고등학생 20여명이 역사에 모여들었다. ‘특성화고등학생 권리연합회’ 학생들이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다시는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스스로 권리를 지켜나가기 위해 현장실습을 한창 준비하는 시기에 이 자리에 모였다”라고 밝혔다. 기자회견 장소는 9-4번 승강장, 지난해 5월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김모군(19)이 숨진 곳이다.

김군은 현장실습을 나간 서울메트로 하청업체 은성PSD에 취업했다가 숨졌다. 전주지역 특성화고 3학년 홍모양은 전공과 무관한 콜센터에 실습을 나가 ‘해지방어 부서’에 근무하다 지난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리연합회는 제 2의 김군, 홍양이 나오지 않도록 ‘학생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서울·경기지역 특성화고 학생 30여명이 모여 구성한 단체다. 이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책이 나오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없었다”며 “학생들의 요구가 담긴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학생들은 “김군과 홍양 사례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크고 작은 일들로 현장실습생들은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서울 대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을 나간 보험업체에 취직했다는 김환수군(19)은 “현장실습생을 채용하는 기업들이 가족처럼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 것인지, 가정부처럼 일할 사람을 찾는 것인지 묻고 싶다”라고 말했다. 김씨 친구는 통신서비스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면서, 계약서에 적혀 있지도 않은 주말 출근을 해야 했고 성희롱도 당했다고 한다. 김군도 실습생 시절 야근을 매일같이 하면서 “원래 사회가 이렇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교육의 연장선이 돼야 할 현장실습이, 기업들에게는 ‘값싼 노동력’으로 여겨져 학생들이 장시간 노동과 각종 안전사고에 내몰리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5년 전남 여수 엘리베이터 정비업체에 파견나간 실습생이 추락사했고 2011년 광주 기아차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현장실습생이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까지 뇌사 상태다. 2006년 노무현 정부가 현장실습을 사실상 폐지하는‘현장실습 정상화 방안’을 내놓았지만 이명박 정부가 2008년 ‘학교 자율화 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무력화됐다.

취업률에 따라 예산을 차등 지원하면서, 학생 전공과 무관하거나 열악한 업체로 실습을 내보내는 경우도 잦다. 권리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수원의 특성화고 3학년생 ㄱ군(19)은 같은 지역의 제조업체로 현장실습을 나갔다. 업체는 ㄱ군을 베트남 공장으로 파견했다. 사전 협의되지 않은 내용이었고 ㄱ군은 베트남에서 하루 12시간~22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건강이 나빠진 ㄱ군은 올해 4월 일을 그만뒀다. ㄱ군이 졸업한 학교는 올해에도 그 업체로 학생들을 보내려 하고 있다.

사고가 날 때마다 실태점검과 대책들이 나왔으나, 실효성은 적었다. 여전히 현장실습생들은 ‘노동자’와 ‘학생’사이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다. 현장실습생은 직업교육훈련촉진법의 적용을 받는 교육생인 동시에,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 적용을 받는 노동자 신분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사회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교육·노동당국의 방치 속에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리곤 한다. 학교장·교육생·사업주 3자가 맺은 표준협약서와 별도로 임금·노동시간 등에서 불리한 이면계약서를 작성하는 사업장도 있다.

‘공부 못 해서 기술 배운다’는 주위의 시선도 학생들을 괴롭힌다. 서울 유한공업고등학교 1학년 이강혁군(16)은 “집안 형편상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에 가느니 빨리 취업하기 위해 공고에 입학했다”라며 “학교 안에서는 만족스럽지만 ‘특성화고는 공부 못 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라는 편견이 있다”라고 말했다.

권리연합회는 오는 9월23일 공식 창립대회를 연다. 그때까지 서울·경기지역부터 각 학교에 지부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또 현장실습생을 위한 24시 신고상담센터 ‘특성화고 119’를 운영하고, 특성화고 학생들의 노동권과 인권교육을 위한 멘토단도 꾸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