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문화진흥회가 13일 우여곡절 끝에 김장겸 사장을 해임함에 따라 2010년 김재철 사장 부임 이후 신뢰도와 공정성, 경쟁력 추락으로 오랜 몸살을 앓았던 MBC 정상화의 서막이 올랐다.
이날 오후 4시쯤 방문진 이사회에서 의결된 해임안은 1시간30분 뒤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곧바로 확정됐다. MBC 지분 중 70%는 방문진이, 30%는 정수장학회가 보유하고 있다. 방문진은 “주주 전원이 참여해 만장일치로 행한 주주총회 결의는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MBC의 소집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이날 바로 정수장학회 측과 만나 해임안을 결론지었다.
파업 중인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는 이르면 15일 현업에 복귀한다. 지난 7월
▶김장겸 사장 해임 가결되던 순간.. 부둥켜안고 오열한 파업 노조원들
시민들과 방송계의 관심사는 새 사장 선임을 비롯한 MBC의 미래에 쏠려 있다. 사장 선임권을 갖고 있는 방문진 이사회는 김재철·안광한·김장겸 전 사장 선임 당시 비판받았던 것처럼 ‘낙하산 사장’이나 ‘밀실 선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사장추천위원회 도입, 최종면접 생중계 등 혁신적 개선안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완기 이사장은 이날 이사회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혁신적인 사장 선임 방안을 고민중이다”라며 “새 사장 선임까지 한 달이 넘게 걸리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 사장 후보로는 전직 MBC 논설위원과 직능단체장 등을 비롯해 내부에서 신망이 높은 원로급 기자·PD 출신 인사 10여명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방문진은 16일 오후 예정된 정기 이사회부터 사장 선임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다.
▶이용마 기자 “간절히 바라던 승리...촛불항쟁 덕, 공영방송 이제 국민에게”
MBC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지난 시간 망가진 조직을 전면 쇄신할 수 있는 인사가 새 경영진으로 와야 무너진 신뢰와 공정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 오간다. 한 전직 노조 관계자는 “구성원들이 투쟁할 때 보고만 있었던 사람이나 개혁보다는 과거 세력과 타협하려는 사람이 사장 자리에 앉는다면 재파업도 불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 사장이 선임되고 경영진이 새롭게 구성되면 2012년 파업 때 쫓겨난 해직자 6명도 연내에 복직할 길이 열린다. 이미 1심과 2심 법원은 방송 공정성을 목표로 내건 당시 파업의 정당성을 인정했고, 이들 6명의 해고가 무효라고 판결한 상태다. 하지만 사측은 2심 판결이 나온 2015년 4월 상고해, 이 사건은 아직까지 대법원에 계류돼 있다. MBC의 새 사장이 상고를 취하하면 고등법원 판결이 확정돼 해직자들이 복직할 수 있다. 구성원들이 승소했으나 사측의 항소·상고로 아직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징계무효 소송들도 같은 방법으로 결론날 가능성이 크다. 부당 전보를 당한 기자·PD·아나운서들의 원직 복귀, 시사교양국·보도국 영상취재부 등 전 사장 시절 해체된 부서들의 복원, 2013년 이후 중단된 신입사원 채용에 대한 논의 등도 불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직 공영방송 간부 신분을 벗은 김 사장 등 경영진에 대한 검찰 수사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서울서부지검은 김 사장과 백종문 부사장, 최기화 기획본부장 등 전·현직 MBC 임원들을 노동조합 및 노사관계조정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이다. 검찰은 지금까지 부당전보 피해자 등 70여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피의자인 김 사장 등에 대한 조사도 가까워오고 있는 상태다. 이날 대검찰청은 백 부사장이 최승호 PD, 박성제 기자를 두고 “증거 없이 해고했다”고 밝힌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서부지검에 지시했다.
이용마 기자 “간절히 바라던 승리...촛불항쟁 덕, 공영방송 이제 국민에게”
MBC에서 해직된 지 13일로 2080일째를 맞은 이용마 기자(48·사진)는 김장겸 MBC 사장 해임과 파업 승리가 누구보다 기쁠 수밖에 없다.
2012년 전국언론노조 MBC본부의 파업 당시 노조 홍보국장으로 파업을 주도했던 이 기자는 가장 먼저 회사에서 해고됐다. 법원이 1심과 2심에서 그를 포함한 해고자 6명에 대한 해고는 무효라고 선언했지만 회사 측이 대법원에 상고하는 바람에 그는 아직도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지난해 가을에는 복막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그가 해고된 지 5년이 지나 MBC 노조는 다시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 회복을 위해 파업을 벌였고, 한 명의 징계자도 해직자도 없이 목표를 달성했다. 이 기자는 김 사장 해임이 가시화된 지난 11일 경향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간절하게 바라고 바라던 승리”라며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임무도 크다”고 감회를 밝혔다.
이 기자는 “지난해 10월 이후 진행된 촛불항쟁이 없었다면 이번 파업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MBC 정상화의 공로를 촛불시민들에게 돌렸다. 이 기자는 “그동안 외부 언론 인터뷰 한 번만 해도 정직 2~3개월 징계를 하는 상황이라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웠는데, 언론을 폭압하던 박근혜 정권이 촛불항쟁으로 조기에 무너지면서 구성원들이 다시 항쟁의 깃발을 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2년 파업을 이끈 이 기자는 김원배 전 방문진 이사가 지난달 자진 사퇴해 방문진 이사회 구도가 역전됐을 때 집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는 “해고자들에게도 긴 싸움이었지만 2000여 조합원들을 생각하면 정말 간절하게 바라고 바라던 승리”라며 “오랜 시간 조합을 믿고 따라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2010년 39일 파업부터 따져도 벌써 7년 넘는 기간을 오로지 공정방송을 목적으로 싸우며 보냈습니다. 특히 2012년 170일 파업 이후에는 일반 조합원들도 현업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자기 업무를 하지 못했던 만큼 진정으로 갈구했던 시간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임무도 그만큼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자는 MBC를 정상화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언론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건전한 상식을 갖춘 분들을 경영진으로 모시는 것”을 꼽았다. 그는 “신임 사장은 MBC를 재건하겠다는 의지가 명확해야 한다”며 “공영방송의 최고 과제가 과거 적폐를 청산하는 것인 만큼, 기존 ‘적폐 세력’들과의 통합이나 화합을 운운하며 MBC를 다시 세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제 기능을 상실한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을 복원하고, 이를 위해 적재적소에 적절한 인재를 배치하는 일도 시급하다고 했다. 그는 “(MBC의) 모든 부문이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인적·제도적 청산은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야당과 MBC 경영진은 MBC 파업과 사장 해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문재인 정권의 방송장악”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 기자는 “도둑이 빼앗은 공영방송을 주인인 국민에게 다시 돌려주려 하자 도둑이 여전히 내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국민들이 권력을 잠깐 위임한 것을 계기로 그 권력을 이용해 공영방송을 사실상 강탈했습니다. 국정원과 청와대가 나서서 언론인들을 내쫓고 시사 프로그램을 없앴습니다. 공영방송이 국민들에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새롭게 들어선 민주정부가 이를 바로잡으려 하는데 이를 방송장악이라고 하는 것은 적반하장입니다.”
그는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반성할 줄 모르는 자들의 태도”라고 덧붙였다.
이 기자는 지난달 책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를 펴냈다. 올해 열 살인 쌍둥이 아들들이 어른이 되어 읽길 바라며 올해 1월부터 7개월 동안 매일 조금씩 기록을 남겼다. 지난해 복막암 판정을 받았던 일, 유년기와 젊은 시절, 기자 생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앞으로의 꿈을 담았다. 이 기자는 “언론계 후배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각 부문에서 대한민국 실태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조직 논리에 휩쓸려 기득권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따라가지 않게 됩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이 어떤지 정확히 알고 오로지 사회적 다수와 약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훌륭한 언론인이 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이번 파업 돌입을 앞두고 한 번은 꼭 집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했던 이 기자는 지난달 25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MBC 파업콘서트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해졌지만, 그는 힘 있는 목소리로 “공영방송을 국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외쳤다.
파업은 승리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그의 상태는 나빠져 가고 있다. 지난 7일 경기도 자택에서 경향신문 취재진과 만나기로 했던 그는 그날 통증이 심해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그러면서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e메일로 인터뷰 답변을 보내왔다. “많은 시민들이 회복을 응원하고 있다. 회사에 돌아간다면 어떤 역할을 맡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이 기자는 짧게 대답했다. “많은 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로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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