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지질조사국(USGS·위 사진)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미국 전역의 단층지도가 뜬다. 마우스를 움직여 미국 전체에서부터 마을 단위까지 축척을 바꿔가며 확인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맵’이다. 지진 다발지역인 서부 해안에는 그런 단층 표시가 빽빽하다. 이를테면 캘리포니아의 산마테오 부근에는 150년 이내에 활동한 적이 있는 단층이 있다. 최근에 활동한 어린 단층은 빨간색 실선으로 표시돼 있다. 활동 기록이 오래된 ‘늙은’ 단층일수록 실선의 색이 옅어지고 암반화된 것은 점선으로 표시된다.
지진이 잦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 국토지리원이나 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 웹사이트의 지도에는 수백개의 실선이 곳곳에 표시(오른쪽)돼 있다. 동네별로도 파악할 수 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이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하고 있는 인터랙티브형 단층 지도. 아래 사진은 단층이 많은 서부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_ USGS 웹사이트
지진은 예측하기 힘들다. 하지만 최소한 어떤 지역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지는 알 수 있다고 지질학자들은 말한다. 지각판이 움직이면서 에너지가 터져나오는 단층의 구조를 알면 재난 피해를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한국엔 아직 변변한 단층지도조차 없다. 연구자들이 지역에 따라 개별적으로 파악한 분포도가 있을 뿐 정부가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제공하는 지도는 없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에야 단층지도를 만들기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2021년까지 경주와 포항이 있는 양산단층 주변의 단층지도를 만들 계획이지만 전국의 단층지도는 2041년에나 완성된다.
단층지도를 만들려 한 적이 없지는 않았다. 2009년 소방방재청은 ‘활성단층지도 및 지진위험 지도 제작’ 연구용역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지질연)에 발주했고 그 결과가 2012년 나왔다. 그러나 이후 이 업무를 인계받은 당시 국민안전처는 전문가 심의를 통해 연구결과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국민안전처는 추가연구와 모니터링 등 보완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댔지만 정작 후속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질학자는 “땅값이 국내에선 가장 큰 고려 대상인 탓에 단층 연구와 지도 제작에 늘 소극적이었고, 그때도 결국 그런 논리가 먹혀들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양산단층대 부근에는 고리, 월성 등 원자력발전소가 밀집해 있어 친원전계가 연구결과 공개를 막는 데 애썼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지질연은 앞서 2000년에도 활성단층 추정지역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 역시 비공개 처리됐다. 2000년 당시의 연구계획을 보면 2006년까지 활성단층 위험분포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중간보고서가 비공개되면서 후속연구도 중단됐다.
일본의 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가 제공하는 활성단층 지도. 구글맵 버전과 일반 지도 버전 두가지가 있다. 지역별로 검색해 단층이 존재하는지 확인할 수도 있다. | AIST 웹사이트
근본적으로는 지진에 무감했던 역대 정부가 인력·예산 투자를 하지 않은 점이 문제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단층지도 제작 연구를 총괄하는 김영석 부경대 교수는 “지난해 정부와 연구계획을 논의할 때 이번 포항 지진처럼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추가 조사를 할 수 있는 센터를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당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단층 조사는 항공기에서 ‘라이다’라는 장비를 이용해 레이저를 쏜 후 얻은 사진을 토대로 시작한다. 라이다를 이용하면 건물이나 나무를 제거한 상태의 지표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연구자들이 단층일 가능성이 높은 지점을 짚어낸 후 땅을 판다.
지층이 어느 깊이에서 어긋났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문제는 예산이다. 김 교수는 “포항 지진은 그간 알려지지 않은 단층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추가 연구를 위해 항공사진을 찍으려 해도 1억5000만원이 추가로 필요한데 어떻게 충당해야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이번 포항 지진 뒤 국내에선 처음으로 지표면 아래 진흙이 위로 솟구치는 액상화가 관찰됐다. 단층 분포는 지진이 일어날 만한 곳을 보여주고, 액상화는 지진 뒤 지표면이 늪처럼 변할 수 있는 지점을 알려준다. USGS 지도를 보면 캘리포니아에서는 동네 단위로 액상화 위험지역이 상세하게 나온다. 주민들이 지도를 이용해 각기 어떤 대응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가이드라인까지 달려 있다.
액상화 지도를 만들려면 지반 특성과 지하수 깊이 등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 일단 위험성이 가장 큰 해안가부터라도 액상화 지도가 필요하다. 개별 연구자들이 미국이 쓰고 있는 산식에 따라 액상화 위험지도를 만들어본 적은 있지만 한국 지질 특성을 반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보기 힘들다. 만일을 대비하는 투자가 없었던 안일한 태도가 단층을 통해 실질적인 ‘삶의 위험’으로 터져나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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