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있는 곳에 갑자기 불이 나 화재경보가 울린다면? 혹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빠져나가겠다고 생각했다면 다시 고민해야 한다. 불이 났을 때 엘리베이터는 유독가스가 모이는 굴뚝이 될 수 있다. 무조건 방 밖으로 뛰쳐나가기 전에 우선 창밖을 내다보고,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연기가 보인다면 내가 있는 곳 아래쪽에서 불이 났다는 뜻이니 무턱대고 내려가려 해선 안 된다. ‘불길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위쪽에서 불이 났다면, 아래로 빨리 이동해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
단, 방문을 열기 전에 먼저 손등을 문에 대보고 복도의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야 한다. 연기와 유독가스가 새어들어오기 시작했다면 일단 문틈을 막고 소방관에게 전화로 연결해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적절한 대처법을 듣는 편이 좋다. <거의 모든 재난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안전 매뉴얼 책에 소개된 화재 대응요령이다.
<거의 모든 재난에서 살아남는 법>을 쓴 성상원씨. 김창길 기자
지난해 12월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지난달 26일의 밀양 세종병원 화재로 숱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재작년 경주 지진과 지난해 포항 지진에 이어 11일 포항에서 또 다시 규모 4.6의 지진이 일어났다. 자연재해이든 화재이든, 재난은 우리 모두가 일상 속에서 미리 대비해야할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재난을 맞닥뜨렸을 때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익숙하지 않다. <거의 모든 재난에서 살아남는 법>은 ‘재난맹’인 시민들에게 쉽고 빠르게 행동수칙과 준비요령을 가르치는 책이다.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성상원씨를 지난 12일 만났다. 10년 동안 인도, 네팔, 인도네시아의 재난지역을 두루 돌아다녀 ‘오지 탐사 로봇’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이다.
“소위 ‘악으로 깡으로’를 입에 달고 다니시던 분들이 험한 곳에서 더 빨리, 많이 다치는 걸 봤어요. 재난은 정신력으로 대비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몸으로 배웠죠.”
지진과 화재, 화산 폭발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을 오랫동안 몸 성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준비’ 덕분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처음으로 ‘위험’을 생생히 느꼈던 것은 2006년 인도 뭄바이에서 다큐멘터리 촬영팀 조사원으로 합류하게 되면서였다. 그 때 뭄바이에선 209명이 숨진 열차 폭탄테러와 관광객을 노린 로켓추진수류탄(RPG) 공격이 벌어졌다. ‘그냥 돌아다니다간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의사, 소방관, 재난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도구 쓰는 법, 소독하는 법 등을 스스로 공부했다. 국제 구호·개발 전문가들에게서도 생존 노하우를 끌어모았다.
험지를 돌아다니지 않더라도, “일상 도처가 재난”이라는 생각에 책을 쓰게 됐다. 지진이나 대형 화재, 쓰나미같은 참사를 굳이 들 것도 없다. 그는 “한국의 산에서 사망하는 이들은 히말라야에서의 사망자보다 33배 더 많다”고 말한다. 살인사건으로 숨지는 이들의 11.2배가 교통사고로, 4.5배가 추락으로 목숨을 잃는다. 전기 사우나실에 물을 뿌리다가 감전돼 쓰러질 수도 있다. 시속 20㎞로 움직이는 차량에도 크게 다칠 수 있다. 찹쌀떡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 숨진 이들이 2009년 기준으로 1394명에 달한다.
재난 대비의 첫단계는 위험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를 판단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이를테면 산악 사고의 대부분은 산에 올라가 술을 마시고 내려오는 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전 수칙에 왜 이토록 둔감한 것일까. 성씨는 “매뉴얼을 지키지 않는 게 융통성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같다”고 했다.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권위주의를 들었다. “현장과 소통하지 않은 채 위에서 내려오는 비현실적인 매뉴얼을 경험하면서 불신이 커진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2015년 네팔 대지진 때 그는 네팔에 있었다. “한국인들을 대피시켜야할 대사관 직원들부터 제대로 대피를 못했어요. 박근혜 정부 시절 ‘모든 보고는 서면으로 하라’는 지시가 온 탓에 보고서를 써야 했다는 거예요.”
더 근본적으로는 안전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이 문제다. 그는 사립학교들의 부실시공을 지적하면서 2013년 유리창 틀이 떨어져 학생이 머리를 맞아 27바늘을 꿰어야 했던 사고를 언급했다. “안전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기는커녕, 학교 자체가 안전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정부는 ‘국가안전대진단’ 기간을 정해 점검에 나섰고, 다음달 30일까지 이어지는 이 기간 동안 생활주변 안전위협요소를 신고한 학생들에게 ‘봉사활동 4시간’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건축안전진단에서 늘 위험을 지적받는 공공건물 중 상당수가 학교 시설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성씨의 책은 119 신고법, 비상식량 준비법, 비상시 화장실 만드는 법, 반려동물과의 대피방법까지 알려준다. 소화기 사용방법을 시험보는 용도로만 외우는 교과서보다 낫다. 자칫 ‘스스로 살아남아라’라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이 책은 국가의 재난대응시스템이 72시간 내에 작동될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그 시간 동안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매뉴얼이다. 책의 결론은 한국의 재난대응시스템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로 나아간다. 재난과 그 대응은 결국 정치의 문제다. ‘재난과 정치’ 챕터에서는 여행자보험 보장범위를 넓히고 학교 지진 안전대책을 만들 것, 건물 내진설계 강화, 소방인력 확충 등 시민들이 국가에 요구해야 하는 것들까지 정리했다.
그는 밀양·제천 화재에서 드러난 시스템의 문제를 언급했다. “세브란스 병원 화재와 비교해서 봐야해요. 투입할 수 있었던 소방 인력이 23배였잖아요.” 사람 목숨의 무게는 같은데 서울의 소방인력은 필요인력의 90%, 전국 평균은 60%다. 게다가 무전기가 잘 작동되지 않을 정도로 지역의 소방장비는 서울보다 더 열악하다. “언론도 사고현장의 스펙타클만 쫓을 뿐 평소엔 소방관, 구조요원, 비행기조종사, 의사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잘 몰라요. 시민들이 평소에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도, 언론도 재난대응시스템에 늘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구급상자 꾸리기
·붕대·밴드 종류: 압박붕대, 삼각건, 탈지면, 거즈, 화상 거즈, 붕대 고정용 반창고, 일회용 밴드 세트, 붕대 고정 핀
·응급처치용 도구: 가위, 핀셋, 면봉, 족집게, 혀를 누를 때 쓰는 나무 숟가락, 체온계, 포이즌 리무버
·먹는 약: 해열진통제(어른용·아이용), 제산제, 소화제, 항히스타민제, 구충약, 지사제
·바르는 약: 물파스, 소염진통 로션, 암모니아수, 항생제 성분 연고, 항히스타민 계열 스프레이와 연고, 스테로이드 계열(부신피질 호르몬) 연고, 화상 연고
·소독약: 요오드팅크, 과산화수소수, 알코올, 붕산, 어린이용 소독약
·기타: 찜질약(붙이는 파스), 안약, 입안 상처용 연고, 생리식염수, 냉찜질용 팩, 방진 마스크(N95 등급 이상)
생존배낭 꾸리기
·기본식료품: 비상식량과 물(1인당 3ℓ)
·위생용품: 식구 수만큼의 칫솔, 100장짜리 물티슈 2팩 이상, 여성위생용품, 휴지 1롤, 20ℓ 쓰레기 봉투 10장 이상(용변 처리용)
·구호용품: 마스크, 야광봉, 가족 수만큼의 안전모, 덕트 테이프(혹은 청테이프), 호루라기, 복용 중인 약품 모두
·피난용품: 랜턴, 휴대용 라디오, 우비, 예비 건전지, 체온 유지 시트, 휴대용 소형 소화기, 방수팩에 든 성냥, 라이터, 1인당 침낭 1개, 속옷과 겉옷 한 세트, 핫팩, 은박 담요
·생활용품: 버너, 장갑, 수저, 멀티툴, 아기용품, 책, 상세한 지도, 72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5000원권 이하 소액권 현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퍼즐 등 놀잇감
차량 안전용품 체크리스트
발광 삼각 표지판과 경광등, 소화기, 사각지대를 비춰주는 거울, 안전띠 커버, 점프선, 손전등, 미끄럼 방지 보조 페달, 생수, 사계절용 워셔액, 장갑과 비상용 공구함, 타이어 리페어 키트, 형광조끼, 차량용 다용도 망치
지진 대비 안전대책
▶지진이 나기 전에
·가족들이 72시간 버틸 수 있는 생존배낭은 재난 대비의 기본
·집·직장·학교 주변 가장 가까운 개활지 위치 적어두기
·개활지로 이도할 수 있는 길 중 전선과 고층건물이 적은 길 표시해놓기
·조리 뒤에 가스밸브를 잠그는 습관 들이기
·응급처치법 배워두기
·옷장 등이 넘어지지 않게 고정해놓기
▶지진이 나면
·자세를 낮추고 옷이나 가방 등으로 머리를 보호
·집 안에 있더라도 신발을 신는다
·밖으로 나갈 땐 문을 열어둔다
▶진동이 멎으면
·안전모를 쓰고 생존배낭을 들고 개활지로 대피
·가족들 상태를 확인, 떨어져 있는 가족과는 약 한 시간 이후 전화 연락
·응급환자들이 폭주하는 병원으로 가기 앞서 우선 구급상자로 부상에 대처
·카카오톡 등 통신 메시지는 단문으로
·재난방송 듣기
고층건물에서 화재가 나면
·경보음이 들리면 창밖부터 확인
→연기가 올라오면 위쪽 대피구역으로
→연기가 보이지 않으면 아래쪽 대피구역으로
·현관문에 손바닥이 아닌 손등을 데어본다
→연기가 없거나 문틈으로 연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수건에 물을 적셔 마스크를 하고 대피구역으로
→열기가 느껴지거나 연기가 들어오면 문틈을 틀어막고 119에 신고, 소방대원들과 방법을 상의
·눈 앞에서 불이 났을 때
→불이 옮겨붙지 않았으면 소화기나 담요 등으로 끈다
→이미 옮겨 붙었으면 화재 경보기를 울리고 119에 신고한 뒤 대피
·불이 나서 대피할 때
좋은 대응: 계단 벽을 따라 이동, 앞이 보이지 않으면 손으로 만져가며 직진, 짧게 호흡하면서 이동
나쁜 대응: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는 것, 탈출하기 위해 불이 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
알아둬야 할 세 가지 응급처치법
·심폐소생술, 인공호흡법, 하임리히법
·응급처치법을 직접 배울 수 있는 안전체험장
보라매안전체험관, 서울시민안전체험관(서울), 부산119 안전체험관(부산), 시민안전테마파크(대구), 경기 고양시 민방위교육장, 365세이프타운(강원 태백), 충청남도 안전체험관(천안), 전라북도 119 안전체험관(전북 임실), 경남 양산시 민방위교육장, 포스코글로벌안전센터(경북 포항)
내 아이에게 ‘더 안전한 집’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
·아이 나이에 맞는 카시트
·‘아이가 타고 있어요’ 스티커는 차 유리가 아닌 트렁크 등에 부착
·연기 감지기(배터리 교환일자는 반드시 달력에 표시)
·베란다와 창문의 안전 창살
·문턱은 없애고, 욕실과 화장실에 미끄럼 방지 타일 깔기
·가스 밸브 잠그기, 주방 가스레인지와 조리기구에 아이들 손이 닿지 않게
·집 안의 모든 콘센트에는 안전 덮개 씌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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