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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은 문제은행, 한국은 '감금 출제'...재난 앞에 취약한 대입 시스템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전날인 지난 15일, 예비소집까지 모두 끝난 시간에 포항에서 강진이 일어났다. 그 뒤로 교육당국은 한시도 쉬지 못하고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날 저녁 곧바로 수능이 일주일 연기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상 처음 겪는 일 속에서 학생들이 수험표를 재발급받아야 하는지, 시험장을 옮겨야 하는지, 지진 피해를 입은 포항 수험생들은 어디에서 시험을 봐야 하는지 등 결정할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수능이 미뤄지면서 출제·인쇄본부와 시험장 확보 등을 위해 각 시·도교육청에 교부된 예산은 85억원에 이른다. 

그럼에도 수능 당일 다시 큰 지진이 발생해 수험생들이 대피하고 시험이 무효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 일년에 단 하루,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이 동시에 응시하는 수능이라는 시험 자체의 성격 때문이다. 포항 지진은 ‘온 국민이 인생을 거는’ 대학입시 시스템이 재난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줬다. 이참에 수능 시스템을 개편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세계에서 드문 ‘감금 출제’ 

이번에 피해가 심각한 포항 지역 4개 학교의 시험장을 옮기고, 수능 당일 지진이 일어나면 감독관이 1차 판단을 한다는 수준의 대비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수능 전날 지진이 났기 때문이다. 수능 시험 중에 지진이나 폭설, 홍수, 화재 같은 자연재해가 덮쳐 몇몇 고사장이나 특정 지역 학생들의 수능 성적이 무효가 된다면? 20일 기자회견에서 ‘연기된 시험일에 다시 지진이 일어나면 시험이 또 연기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교육부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국가비상사태”라면서 그건 추후에 논의해 결정할 문제라고 했다.

한 차례 미뤄져서 치러지는 수능 예비소집 전날인 21일 경북 포항 남구 이동중학교에서 포항여고 선생님들이 시험장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이동중학교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포항여자고등학교를 대신할 대체시험장으로 선정됐다. 교사들이 안내문을 붙이고 있는 ‘분리시험실’은 시험 전 불안심리를 호소하거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곳이다. 이준헌 기자


한날한시에 같은 문제로 동시에 치르는 수능의 성격상 특정 지역에서만 재시험을 치른다면 형평성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700명 넘는 출제위원들이 한 달 이상 외부와 격리돼 수능 문제를 출제하는데, 이 ‘격리 시한’을 일주일 연장하기 위해 숙박시설을 논의하는 데도 당국이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출제 과정에 두 달이 걸리니, 수능 문제를 다시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한국처럼 출제위원 수백명이 감금당해 출제한 문제로 한날한시에 모든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과 가장 유사한 ‘센터시험’이라는 대입시험을 치르는 일본의 경우에는 본시험과 추가시험·재시험 날짜를 못 박아 놓았다. 2018학년도 본시험은 1월13~14일, 추가시험·재시험은 일주일 뒤인 20~21일로 잡혀 있다. 

시험지도 처음부터 본시험용과 추가시험용 두 세트를 만든다. 질병이나 부상, 사고, 기타 부득이한 이유로 본시험을 치르지 못한 학생들은 추가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눈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 시험장 사고로 본시험을 치르지 못했거나 시험 도중에 중단했을 경우 재시험을 치른다. 정해진 재시험일에도 시험을 치르기 어려울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빠른 날짜로 시험일을 다시 잡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이런 대책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운전면허시험처럼 여러 개의 문제를 만들어 놓고 돌려가며 출제하는 문제은행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일본·미국은 ‘문제은행’ 

미국의 대입시험 격인 SAT·ACT는 각각 1년에 7번 치러진다. 수능을 한 해에 14번 볼 수 있는 셈이다. 문제은행 방식으로 출제되는 것도 일본과 같다. 매년 6월 한 차례 치르는 중국의 수능인 가오카오(高考)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학생들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문제와 운영방식이 각 지역별로 모두 다르다. 

한국에서는 수능 문제 오류가 불거질 때마다 문제은행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매년 ‘물수능’ ‘불수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들쭉날쭉한 난이도를 예측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문제은행으로의 전환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제기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에는 “2010년까지 수능을 문제은행식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2005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연구용역까지 했지만 모두 백지화됐다. 입시경쟁이 치열한 한국에서 문제 유출 우려가 크고, 교육과정 변화를 반영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수능이 인생을 결정짓는 중대사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문제은행을 채택한 미국과 일본 대학들에서 대입시험이 차지하는 위상은 수능과 크게 다르다. 일본 대학들은 센터시험을 자격요건으로만 활용하며 대학별로 일종의 ‘본고사’를 치른다. 미국 대학들도 SAT나 ACT를 입학 자격요건으로만 활용한다. SAT나 ACT도 문제가 사전 유출됐다는 논란에 몇 차례 홍역을 치렀다. 시험시간에 비행기가 멈추고 증시 개장이 늦춰질 정도로 ‘공정성’이 핵심인 수능에 당장 적용하기는 어려운 셈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재난 대비가 어려운 데다 하루짜리 시험의 영향이 학생의 인생에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현 수능 체제를 이번 기회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의 한 고교 교사는 “수능은 특정 지역·계층에 유리한 시험인데도 일반인들은 공정하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포항 학생들의 고사장 이동 문제가 현안이 됐지만, 국내에서도 도서지역 학생들은 이런 부담을 늘 안고 시험을 봐왔다. 이 교사는 “수능은 학생들의 인생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치는 시험”이라며 “줄 세우기를 탈피하는 방향으로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현직 교사는 “근본적으로 수능의 영향력을 크게 줄여 자격고사로 바꾸고, 대학이 학생을 평가할 능력을 키우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수험생에 '공개 편지' 김상곤, 발빠른 '안전대책' 조희연

수험생에 '공개 편지' 김상곤, 발빠른 '안전대책' 조희연…두 교육 수장의 눈길 끄는 지진 대응

포항 지역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수험생 등을 다독이기 위해 공개 편지를 썼다. 조희연 서울시교육청 교육감은 내진성능을 확보하기 위한 관내 학교 건물을 점검하고, 안전 대책 마련을 위한 예산 지원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김 부총리는 21일 교육부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에 띄운 공개서한에서 “수능 연기는 ‘학생의 안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마음으로 고심 끝에 내린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며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시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여러분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김 부총리는 이어 “뿌리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의 도전과 인내를 믿고 더욱 심지를 굳게 하여 지금까지 걸어온 그 길이 빛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힘을 내주시길 바란다”며 “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능 결과가 아니라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도전하고 성실하게 준비하는 자세라는 것도 마음에 깊이 새겨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 부총리는 또 23일 수능 시험일에 지진이 날 경우 학생들의 대피 여부를 결정하는 감독관(교원)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학생 안전이 최우선이므로 대피 결정과 관련해 시험실 감독관과 시험장 책임자의 책임소재를 따지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이례적인 ‘장관의 편지’로 수험생들을 다독이면서, 재난 때 현장이 징계를 두려워해 움직이지 못 하는 일이 없도록 면책권을 준 것이다. 김 부총리는 수능 당일에 아예 포항에 내려가 여진 대책을 살피겠다고 전날 발표한 바 있다.

조 교육감은 지진 때 이재민대피소로 활용할 서울 지역 학교건물 723곳의 내진보강을 2019년까지 마치기로 하는 것을 포함해, 구체적인 안전 점검 계획을 발표했다. 매년 학교 내진보강에 쓰는 예산을 기존 400억원에서 내년부터 516억원으로 늘려, 당초 계획보다 4년 이른 2030년까지 학교건물에 내진성능을 갖추도록 할 방침이다. 지진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난 ‘필로티’ 구조 건축물이 있는 학교 142곳은 긴급 시설점검을 할 예정이다. 필로티는 1~2층에 벽 없이 기둥만 세우는 건물 구조를 말한다. 이밖에 2019년부터 2027년까지 학교 석면제거에 투입할 예산도 연간 300억원에서 370억원으로 늘린다.

전국적으로 내진 성능을 갖춘 학교는 전체 학교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서울은 학교의 내진 비율이 26.5%로 전국 평균보다 조금 높다. 서울의 학교 건물 5개 중 1개는 지어진 지 40년이 지난 노후건물이다. 교육청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으로 5년 간 5조2283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내다봤다. 학교 건물 2654동의 내진 성능을 보강하는 데에 7103억원, 40년이 넘은 교사 651동을 개축하는 데에 4조1073억원, 석면제거에 4107억원이 쓰인다. 

조 교육감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교육환경개선특별회계 등으로 예산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 교육감은 “재해공포로부터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학교 내진성능을 시급히 개선할 국가 수준의 재정 투자가 필요하다. 문 대통령이 심각하게 생각해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