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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지진과 우리의 맨얼굴②] ‘학벌 만능’ 수능 연기에 나라가 들썩

지난 15일 경북 포항에 지진이 난 직후, 흔들리는 교실에서 놀라 뛰쳐나간 학생들에게 교사가 벌점을 줬다는 글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졌다. 이 글이 몇몇 언론에 기사화돼 논란이 벌어졌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또 아이들 안전을 무시하느냐”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훈육’을 빌미로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불신, 입시와 직결되는 벌점제도에 대한 반발이 지진을 계기로 터져나온 것이었다.

경북도교육청 등에 확인한 결과 지진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대피하는 학생들에게 벌점을 준 교사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대형 사건이 일어났을 때마다 인터넷에서 흔히 벌어지는 헛소동의 하나였던 셈이다. 하지만 재난 상황에서 ‘벌점 루머’가 돌았다는 것 자체는 한국 교육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이었다.


지진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연기한 교육당국의 판단과 신속한 현장점검, 예비시험장과 긴급 수송차량 마련 등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교육계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안전보다 중요한 시험은 없으며 어린 학생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정부 당국에 신뢰를 보낸 이들이 많았다. 그렇다 해도 입시를 기준으로 모든 시간표가 짜여 있는 현실과 수능체제, 나아가 입시 위주 교육 전반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지진 6시간여 뒤 교육부가 공식 발표를 하기 전까지,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져온 대학 입시 날짜가 바뀔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능을 주관하는 교육부, 문제를 내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시험을 시행하는 교육청의 대다수 관계자와 청와대도 시험을 연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여진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60만 수험생만이 아니라 사실상 ‘전국의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는 수능 연기는 선택지에서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피해지역 주민들이 대피소에서 힘겨운 겨울을 맞았지만 지진보다는 수능이 ‘국가적 관심사’가 됐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20일 정부 합동브리핑에서 이진석 교육부 대학정책실장은 여진으로 시험을 치르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국가재난사태”가 될 것이라고 했다. 대학 입시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이 국가적 재난이 된다는 뜻이다.

교육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시험 하나에 수십만명의 인생, 사회 전체가 좌지우지되는 입시체계를 되짚어보자는 얘기가 나온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국장은 “일주일 연기가 결정되자 곧바로 이벤트성 사교육 상품이 나왔다는 것은 수능 중심의 교육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석훈 서울 미림여고 교장은 “지진 때문에 수능에 차질이 생겼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 것이고 어디까지 구제했을 것인지 궁금하다”며 “이런 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 학생 선발의 공정성이나 평가 자체가 곤란해질 수 있는데, 학생들이 바람직한 미래 사회의 인재로 크는 데 기여하려면 어떤 평가 방식이 필요할지 머리를 맞대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수능이라는 시험이 이어진 지는 벌써 24년이 됐다. 무수한 ‘기출문제’ 속에 학생들은 문제풀이 기계가 돼버렸고,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가장 어렵고 복잡한 지문을 택해 학생들을 걸러내는 시험으로 변질했다. 주 교장은 “학생들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이런 문제가 필요할까 하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며 “공론화 과정을 거쳐 시험제도를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고등학교에 수능일인 지난 23일 지진대비 행동 요령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서울 용산고등학교에 수능일인 지난 23일 지진대비 행동 요령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수능이 여전히 국민적 관심사라곤 하지만 실제 대학 입시에서의 비중은 즐고 있다. 2018학년도 대입에서 정시모집의 비중은 26.3%다. 그런데도 학교 교육이나 모든 교육 계획은 수능에 맞춰져 있다. 수능으로 승부를 보는 수험생은 성적 상위권 학생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모두를 위한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영식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장은 “일제고사식 시험에 쏟는 사회적 에너지가 너무 크고, 문제풀이와 암기식으로 교육이 왜곡되는 등 부작용이 많다”며 “모든 학생을 일시에 평가하는 시스템을 그대로 둘 것인지 사회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공부 잘하는 학생 20~30%를 위해 모든 사회가 움직인다”면서 “더 많은 학생들에게 중요한 직업교육은 여전히 후진적이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현장실습 중 사고로 숨진 이민호군 사건 같은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수능일 지진 발생 시 대책에 정부 당국과 사회의 관심이 쏠려 있는 사이에 교육현장에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수능에 맞춘 교육으로 학생들이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갖출 수 있겠느냐”며 미래를 준비하고 안전을 확보할 교육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