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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포항지진과 우리의 맨얼굴③] 안전 대신 ‘쩐’ 챙기는 부실시공사

엿가락처럼 휜 기둥, 튀어나온 앙상한 철근들. 1층 일부에 벽체 없이 기둥만 세워 건물을 떠받치는 ‘필로티 구조’의 빌라가 곧 무너질 듯이 서 있는 사진이 포항 강진 뒤에 인터넷에 널리 퍼졌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고안한 필로티 구조는 한국에선 공간의 개방감을 극대화하는 목적보다는 좁은 공간에 주차장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원룸이나 빌라, 다세대주택들에서 유독 필로티 구조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보안과 사생활 보호 등의 이유로 1층을 꺼리는 거주 수요까지 해결할 수 있어, 공간과 비용 모두에서 효율적인 방식으로 각광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항 지진 이후 필로티는 ‘공공의 적’이 돼 버렸다. 소셜미디어에는 “필로티 빌라에 사는데 벽에 금이 갔다. 불안하다”는 하소연이 넘쳐난다. 건설·부동산 시장에선 필로티 수요가 이전보다 급격히 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근대건축물의 혁신이라던 필로티가 한순간에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다.

기둥으로만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필로티는 상대적으로 지진에 취약할 수 있다. 정광량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회장은 “국내 필로티는 대부분 주차장 등으로 쓰는 하층은 기둥식인 데 반해 상층인 주거건물은 벽식”이라며 “구조상 하부가 약하기 때문에 지진이 오면 큰 충격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99년 대만 치치 지진 때도 필로티 건축물 피해가 컸고,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등에서도 필로티 건물들이 내진 보강 대상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필로티 자체만이 문제였을까. 국책연구기관인 건축도시공간연구소 조영진 부연구위원은 “필로티는 무죄이지만 국내의 저층 필로티 주택이 문제인 것”이라고 말했다. 설계와 시공 기준을 제대로 지켰다면 안전에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포항 지진으로 피해를 본 건물들의 부실 시공 의혹은 무시할 수 없다. 필로티 구조로 된 한 4층 빌라에서는 4㎝ 정도여야 할 기둥 피복(철근을 감싸는 콘크리트)이 10㎝가 넘었다. 중심부 철근 두께를 줄였다는 뜻이다.

또 기둥이 부서진 필로티 빌라들을 보면 건물 중심에 있어야 할 계단실이 한쪽에 쏠려 있다. 건축용어로는 ‘편심코어’라 부르는데, 주차장 공간을 넓게 쓰려고 이런 구조를 택할 경우 계단실 반대편에 벽을 세우거나 기둥을 추가해 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조영진 부연구위원은 “문제가 된 필로티 건물들은 비파괴검사 등 정밀안전진단을 통해 철근 배열이 제대로 돼 있는지, 구조계산서대로 철근이 들어갔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 필로티 건물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한 계기는 다세대·다가구 주택 1층에 주차장을 설치하도록 한 2002년의 조치였다. 게다가 2014년 개정된 건축법은 건물 높이를 산정할 때 필로티를 제외할 수 있게 했고, 높이 제한과 용적률을 따지는 건물주들 사이에서 필로티가 인기를 끌었다. 서울의 한 공인중개사는 “정부가 사실상 필로티 구조를 장려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포항의 한 빌라에서 지난 17일 전문가들이 지진으로 철근이 드러난 필로티 기둥을 살펴보고 있다.   이석우 기자

포항의 한 빌라에서 지난 17일 전문가들이 지진으로 철근이 드러난 필로티 기둥을 살펴보고 있다. 이석우 기자


필로티 자체는 무죄일지 모르지만, 안전보다 수익성에 치중한 건축설계는 분명 ‘유죄’다. 내진설계 의무적용 대상이 점차 늘고 있으나 5층 이하 필로티 건물은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1988년 처음 도입된 내진설계 의무 규정은 6층 이상 또는 연면적 10만㎡ 이상 건축물에만 적용됐다. 27년 후인 2015년에야 3층 이상 또는 500㎡ 이상으로 확대됐다. 다음달부터 내진설계 의무 적용 대상이 2층 이상 또는 연면적 200㎡ 이상 건축물과 신규 주택으로 확대되지만, 1988년부터 2015년 사이 지어진 1~5층 건물의 내진성능은 장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내진 보강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건축업계에서는 건물 구조체의 내진성능을 향상시키거나 건물에 작용하는 지진 하중을 줄이는 방식을 거론한다. 기둥을 콘크리트로 덧씌우거나 고탄성 섬유재로 감싸는 구조체 보강, 건물에 댐퍼라고 불리는 충격 흡수재 등을 설치하는 지진 하중 경감법이 대표적이다.

전문가들은 포항 지진을 계기로 내진설계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김재관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정부가 당초 내진설계 의무 적용 대상에서 저층 구조물을 제외했던 게 잘못”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건축사들도 5층 이하 건물의 내진설계를 할 수 있지만, 저층 건물의 내진설계도 고층 건물처럼 내진설계 전문가인 건축구조기술사가 맡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정광량 회장은 “경제논리에 따라 규제를 완화할 때라도 안전 규제는 강화해야 한다”며 “비용만 따지기에 안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반이 물렁물렁해지는 액상화에 대비해, 지반에 잡석을 까는 치환작업이나 모래를 밀어넣어 다지는 모래다짐 말뚝 공법, 파이프로 물을 먼저 빼내는 방법 등을 적용할 필요도 있다. 한 지반공학 전문가는 “이미 내진설계에는 액상화 가능성이 있는 지반을 개량하거나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평가 항목이 있다”며 “교량 등 공공시설 공사와 달리 주택 건축에서는 등한시해왔던 내진설계의 기준을 이번 기회에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